"과잉보호속의 아이는 고3병에 약하다. 스스로 어려운 일을 극복할 기회를 갖도록 하자."
새로운 열병
우리 사회는 요사이 매년 새해 벽두부터 사회전체가 떠들썩할 정도로 커다란 회오리바람과도 같은 열병을 앓곤한다. 다름아닌 대학입학학력고사와 그 결과에 따른 입시지원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들은 그동안 여기저기 많은 글에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논의되어오고 대책이 이야기되었지만 그중의 한가지인 소위 고3병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끌지 못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새엔가 중3병이니 고3병이니 하는 의학교과서에 있지도 않은 전혀 낯선, 그렇지만 홍역과도 같이 앓고 지나가는 신종병이 유행되어왔다. 정신과의사이며 이미 고인이 되신 한동세선생께서 1972년도 신경정신과학회지에 '고3병과 중3병'이라는 짧막한 논문을 쓰신 것이 있는데 의학관계 문헌에서는 아마도 가장 처음으로 쓰여진 것이 아닐까 한다. 이같이 의학적인 병명이 아니면서도 의학 문헌에 등장하고 고3병으로 대표되며, 입시수험생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들 증후군의 실체는 과연 어떠한 것일까? 물론 이 병이 의학적인 의미에서의 병명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동일한 원인에 의해 동일한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나타나는 증상들
이것은 사실 수험생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증상은 아니다. 그들 가족과 또 관련되는 주위사람들, 넓게는 우리 사회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우선 범위를 좁혀서 수험생자신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보기로하자.
먼저 수험생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체질환의 악화를 들 수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대부분의 신체질환은 정서적으로 불안하다든지, 안정이 되지 않을때는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다양한 종류의 신경증적 증세가 나타난다. 특별한 신체질환이 없으면서 '머리가 아프다, 집중이 안된다, 소화가 안되고 밥맛이 없다, 기억력이 나빠졌다, 짜증을 잘 부린다' 등의 비교적 가벼운 정도에서부터 '자주 기절을 한다, 손발이 뒤틀려 쓰러진다, 가슴이 뛰고 손발이 떨려 안정을 할 수가 없다, 잠을 못이룬다'와 같이 심한 정도까지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이보다 더 심한 증세나 심지어는 정신병증세도 보일 수 있다. 이때는 강박속에서 어떤 행동을 습관적으로 반복해야 한다든가,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혀 질려있다든가, 환각상태에 빠지거나 이상한 망상이나 착각을 현실로 받아들여 엉뚱하게 행동한다든지 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는 두번째로 짜증이 심하고, 말도 잘 안하고, 불안·초초·우울, 긴장성두통, 히스테리를 보이는 정도이다. 이런 때는 보통 병원을 찾지않지만 또 병원을 찾게 되더라도 대개는 몇가지 기본적인 검사나 진찰에서 정상임을 확인하고 간단한 안정제나 긴장·불안에 의한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점만으로 족할때가 많다.
그렇지만 흔히 우리가 고3병이라고 알고있는 것 가운데 빠뜨리고 지나가거나 간과되는 몇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 입시제도가 대학입시에 몰려있다보니 고3시기에만 모두의 관심이 몰려있어 고3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 시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높은 교육열이 잠재되어 있다가 대학입시에 이르러 봇물이 터지듯이 일시에 터져나오기 때문에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다.
높은 기준과 강박
그러나 이와 비슷한 문제는 국민학생이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또는중학교에 진학하여 갑자기 공부량이 늘어나면서, 또는 중3이 되어 고입연합고사를 앞두고 흔히 일어나고 있다. 특히 올해와 같이 고입연합고사의 탈락자가 많아진다고 했던해는 이같은 현상이 더욱 두드러져, 많은 학생들이 심한 경우 중도탈락을 하는 수가 있었다. 대입시에 내신을 반영한 후 고1, 2학생에게도 나타나며 고3이 지난 경우에도 흔히 보는데, 고시공부를 하는 수험생, 대학원진학이나 취직시험을 준비하는 상당수에서 비슷한 양상을 볼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면은, 부모를 포함한 외적인 기대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설정해 놓은 높은 기준(standard)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신을 능력 이상으로 채찍질하다보니 심신이 모두 지쳐버리면서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인 것이다.
둘째로 이들은 대개 합격을 하든지 낙방을 하든지에 관계없이 그 상황이 종결지어지면 스스로 증상이 소멸되는(self-limiting) 특성을 갖는다. 두가지중 어떤 경우든지 인간에게는 그러한 결과를 받아들여 평정을 되찾으려는 능력(homeostasis)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합격을 했을 경우에는 자신의 기준에 도달한 만족감에, 낙방했을때는 낙담실망과 함께 일단은 긴장속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증상이 소멸되어 버린다. 그러나 앞서 예를 든 세번째와 같이 심한 경우는 비교적 심각한 정신질환의 시초일 가능성이 높고, 또 저절로 회복되는 경우가 적으므로 간과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우리는 흔히 이같은 경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좋게 생각하여 넘어가 버리려는 경향이 있기때문에 후에 크게 문제가 되는수가 많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고3병이라는것이 일반적인 질병과 같이 수험생당사자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위에서들 흔히 '저집에는 고3수험생이있어'라고 하여 가족이나 친지들이 방문을 꺼리게 되고, 가족들도 항상 비상대기 상태로 긴장속에 지내며, 휴가나 휴일도 즐기기 어렵고, 심지어는 집안에서 텔리비전도 보지 못하거나, 큰소리로 담소도 즐기지 못하는 수가 있다. 이런 상태가 무려 일년간이나, 거의 수십만 가족이 형태나 정도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매년 비슷한 정도로 겪어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전체 국민의 정신건강이나 에너지소비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작게는 수험생 몇명의 개개인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실상은 전 국민의 상당수가 이러한 고통속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즉 고3병이란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이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나타내는 불안, 우울, 초조 등에서 유래되는 다양한 증세를 갖는 증후군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여기에 덧붙여 그들을 둘러싼 가족이나 사회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함께 겪어나가는 일종의 사회 병리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원인과 대책
필자는 고3병을 논의하면서 여러가지 사회병리적인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믿지만 여기서는 우리나라 아동 및 청소년의 사회화과정을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다루고자한다.
요사이 많은 연구자들이 거의 일치하여 우리나라 아동들이 '참을성이 없고 자기통제력이 부족하다 '즉 사회성이 부족함을 보고하고 있다. 이것을 사회화과정의 발달학적 측면에서 보면 과거의 전통적인 '엄부자모(嚴父慈母)'의 형태에서 '극성어머니와 무관심한 아버지'의 형태로 바뀌어 가면서 과잉보호되고, 독립성을 키우지 못하고, 의존심이 높아지며, 보다 이기적인 아동으로 키워지고 있는데에 커다란 원인이있다고본다. 그러면서 학교나 사회에서도 정상적으로 청소년시기에 이루어져야할 사춘기의 변화에 대한 적응이나, 자아(Identity)의 확립과 같은 정서적인 면에의 고려는 거의없고, 오로지 주어진 과제만을 반복하여 높은 성적을 받아오고, 경쟁에 이겨나갈것만을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대학입시가 있기전까지 대입학력고사와 비슷한 경쟁이나 선택이 주어져서 성취감, 좌절, 극복등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제공되지를 못하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난생처음으로 이같은 커다란 선택을 앞에 두고 전전긍긍하면서 긴장과안, 초초 속에 고3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역경속에 놓여질 때 비로서 개개인의 인격의 성숙도나 가정의 화목정도를 알 수 있다. 즉 평상시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이던 성격이나 화목하던 가족이 이런 시련이 닥치게 되면, 견디어 나가기 어렵게되거나, 숨겨졌던 갈등이 노출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3시기에는 잘 견디어 나가는 듯이 보이다가도, 대학에 진학한 후 나타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스스로 어떠한 일을 생각하고, 결정하고, 노력해 보는 기회가 별로 주어져 보지 못했고, 인생의 가치라든지 영원, 역사, 사랑등과 같은 자아의 확립에 필수적으로 겪어야 하는 정신적인 고통을 경험한 적이 없다가 대학진학후에 처음으로 부딪치게 되고, 덧붙여 요사이 우리 사회의 현실인 '대학문제'에 휩싸이게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례는 필자가 서울대학교 보건진료소에 진료를 나가면서 상담실을 찾는 학생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는 이분야 전문가에게는 흔히 볼 수있는 경우이다.
근본적으로는 교육제도개선
그렇다면 고3병이란 단지 고3 시기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그 대책이나 예방은 어떠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물론 한마디로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치료대책이나 방법은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힘써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중 한가지 대책은 역시 교육제도의 개선이다. 물론 여기에 필수적으로 따라야할 선행조건으로 교육차별이나 학벌에 따른 사회적 편견이나 불균등의 시정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여기서 다룰 문제는 아니라고 보고, 필자가 개인적으로 제안하고 싶은 의견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능력에 따라 방향전환이 미리미리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적능력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능력도 포함되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에 따른 내적기준이나 가족들의 기대 또한 현실적이 될 수 있다. 문제가 널리 확산되는 부작용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지나친 기대나 강요속에 억지를 쓰느니 보다는 아동이나 청소년에게 자신의 약점이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현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어려서부터의 육아과정에서도 의존적이고, 이기적이고, 과잉보호되어 일일이 부모(대부분은 어머니 혼자서지만)가 해 주어야 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결정하고, 실패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고3시기와같은 시련에 부딪치거나, 역경에 처해서도 아이들이 불안해 하지않고, 좌절하지 않으며 이겨나갈 수 있도록 주위에서 도와주는 것이다.
고통의 의미를 새기고 견디는 능력
고3병이란 여러가지 원인에서, 다양한 형태로 수험생개인을 포함한 가족, 사회가함께 겪는 열병과 같은 현상이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심각한 정신질환의 초기증세가 고3 시기와 일치해서 나타나거나 발병하는 수가 있으므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고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심각한 문제이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조기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정도는 심하지 않아 그늘에 가려있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을 불안과 초조, 긴장속에 보내는 수많은 수험생과 그 가족들의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같은 노력을 다른 건강한 부문에 쏟아넣는다면 더욱 보람된 일을 이룰 수 있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회적인 병폐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높은 교육열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이들을 인간답게 만드는 교육을 위해서 쏟아진다면,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이루어 온 외형적인 성장에 덧붙여 질적인 면, 정신적인 풍요도 함께 누릴 수 있는 훨씬 나은 사회가 될 수 있을것이다. 흔히 지적되는 말로써 '지적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성숙한 청소년'들이 정서적으로나 사회적인 행동에 있어서는 아주 유치할 정도의 미숙한 발달 정도를 보이는 것을 볼때마다 그들의 절름발이 상태를 어떻게 해야할까 걱정이 앞선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일원모두가 이러한 문제를 깨닫고 고3병과 같이 시련을 극복하기 힘들어 하고 전전긍긍 불안해 하는 미숙한 아이들을, 의젓하게 자신의 처지와 앞날을 생각하며 고통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어렵고 힘들지만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