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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청원군 두루봉 유적을 통해본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와 환경

희미한 구석기시대의 생활상, 기후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가장 풍부하게 보존된 두루봉일대. 유물로 제작된 타임머신을 타고 20여만년전의 과거를 여행해 본다.


때는 제4기 홍적세의 전기구석기시대. 지금으로부터 약 20만년 전 3월 하순의 어느 따뜻한 봄날, 오늘날의 충북 청원땅 두루뭉실하게 생긴 산중턱에 남향으로 입구가 열린 석회암동굴 안에서 나이가 든 여자 한명과 어린 남자가 불을 지피고 있다.
 

둥그렇게 돌을 놓아 만든 화덕위에 늙은 참나무와 소나무 가지들을 이용해 사슴고기를 굽고 있는 중이다.
 

굴의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넓은 공간이 나온다. 10여평이 훨씬 넘어 5,6명 정도의 가족이 생활하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동굴바닥에는 사슴이며 하이에나 등이 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입구 맞은편 쪽에는 꺾어다 놓은 진달래꽃이 한아름 놓여있어 굴안을 환하게 장식해주고 있다.
 

진달래뿐 아니라 굴입구에는 잡아먹고 남은 동물뼈를 이용해 만든 얼굴모양의 장식물도 놓여 있다.
 

굴입구를 통해 내려다보이는 물가(현재의 금강줄기)에서는 남자들 서너명이 사냥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먹만한 크기의 돌을 질긴 나무줄기에 묶어 물마시러 온 사슴을 향해 던지기도 하고, 동물뼈를 뾰족하게 다듬어 막대기에 붙들어맨 창으로 찌르기도 한다.
 

익숙한 사냥솜씨는 백발백중이어서 곧 사슴이 돌에 맞아 쓰러졌다. 또 물건너 산기슭에서는 힘센 남자 10여명이 거대한 쌍코뿔소를 추격, 몰이사냥을 하고 있다. 저마다 손에 돌과 창을 들고는 고함을 지른다. 지난 3월초순에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몰이사냥에 나서 6백㎏이 넘는 동굴곰을 잡은 적이 있다.
 

한편, 물이 많은 상류쪽에서는 주로 나이 어린 축에 드는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다. 잡은 물고기 중에는 거북이처럼 생긴 남생이도 보인다. 남자건 여자건 짐승의 가죽이나 털나뭇잎 등으로 적당히 앞만 가린 채 사냥과 물고기잡이에 여념이 없다. 아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다.
 

사냥을 끝낸 축들은 짐승들을 끌고 동굴로 돌아오고 있다. 힘들여 잡은 쌍코뿔소는 너무 무거워 그 자리에서 끝이 뾰족한 돌과 짐승뼈로 가죽을 벗기고 고기들을 떼냈다. 해는 어느새 중천에 높이 떠올랐지만 무성한 오리나무 그늘이 사냥하느라 흘린 땀을 식혀줘 마냥 상쾌한 모습이다
 

이상은 20만년전의 한반도에서 살았던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을 유적을 통해 그려본 것이다. 오늘날의 구석기문화 연구는 이처럼 엄청난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주고 있다.

 

완전한 사람뼈, 동굴곰뼈가 나오다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해서 구석기시대의 생활상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일까. 이야기의 무대인 충북 청원군 가덕면의 두루봉 구석기유적과 그 연구내용을 살펴보자.
 

지난 76년 8월부터 83년 1월까지 10차에 걸쳐 발굴작업을 한 결과, 두루봉일대의 동굴에서 쏟아진 구석기유물은 국내 구석기유적 발굴사상 최대·최고의 것이었다. 중요한 발굴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2굴>;


이곳을 발굴해본 결과 4m50㎝의 깊이에서 모두 34개의 지층(퇴적물과 흙색깔로 층을 구분한다)으로 돼있음을 확인했는데, 큰망치와 끌을 이용해 70∼90㎝를 파들어가다가 7번째 지층에서 구석기인들이 살며 남긴 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즉, 불을 피우면서 남긴 화덕자리와 숯, 그 주변에 망치와 긁개 자르개 등 짐승의 가죽을 벗기거나 살을 자르는데 사용됐을 예리한 돌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멸종돼 없어진 첫소 쌍코뿔소 하이에나 큰원숭이 동굴하이에나 등 3문7강15목28과37속46종이라는 구석기유적발굴사상 최대의 짐승뼈화석을 찾아냈다.
 

또 2굴의 퇴적층마다에서 모두 3백43개의 꽃가루(현미경으로 확인)가 검출돼 당시의 식물상과 기후 등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또 사슴발가락뼈로 만든 일종의 악세사리도 나왔다.

 

<;새굴>;


두루봉의 정상에 있던 이 굴에서는 옛코끼리상아(길이 62㎝, 지름 7.6㎝)와 13점의 사슴머리뼈, 목걸이 2점(사슴뿔을 갈아 만든 것)과 쌍코뿔소이빨 큰원숭이 동굴하이에나 앞발뼈 큰곰이빨 꽃사슴화석 등이 확인됐다.

 

<;처녀굴>;


거의 완전한 형태의 동굴곰뼈가 나와 세계적으로 귀중한 고고학자료가 되고 있다. 약30만년 전의 동굴곰으로 추산되는데, 골격이 거의 원상태로 복원되고 있다. 이외에도 쌍코뿔소의 아래턱뼈 허벅지뼈 정강이 등이 출토됐다.

 

<;흥수굴>;


완전한 사람뼈와 석기 동물화석이 모두 나와서 이상적인 구석기문화유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사람뼈는 2개체분이 나왔는데, 1호사람뼈는 5∼6세의 어린이로 보이며 키는 1m 정도이고 머리뼈와 허리뼈 갈비뼈의 생김새로 보아 정상인은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출토상태는 두발을 모으고 오른팔은 곧게 뻗쳤으나 왼팔은 안으로 굽어 손이 엉덩이뼈 위에 놓였으며, 배부분에 네모난 판자돌을 얹어 놓았다.
 

2호사람뼈는 1호사람뼈의 서쪽으로 약2m쯤 떨어져 출토되었으나, 머리부분은 이미 없어진 상태였고, 매장방법은 하늘을 향하여 곧게 바로 펴 묻었다. 뼈의 생김새와 구조 및 부분의 특징으로 보아 1호보다 크기가 작고, 나이도 어린 것 같으며, 현대인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후기 홍적세(약10만년 전)때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 인골은 현재 미국의 비클리대학 인류학과 교수팀들과 함께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어 금년내에 그 자세한 내용이 밝혀질 전망이다. 우리나라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한 형태의 구석기시대 인골이 발굴된 것은 처음이어서 고고학·체질인류학적인 의의는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또 흥수굴에서는 여러 지층에서 주먹도끼 사냥돌 등 전형적인 석기들이 나왔고, 동물화석으로는 멧돼지 사슴 오소리 박쥐 달팽이 등이 출토됐다.

 

5명이 4년 이상 살았던 제2굴


두루봉유적에서 나온 동물상을 통해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당시(구석기인들이 동굴에서 살았던 시기)의 기후이다. 예를 들어 제2굴의 7층에 사람이 살았던 때는 큰원숭이 쌍코뿔소 하이에나 등 더운 시기에 살았던 동물들이 특징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기후가 더웠으리라고 짐작된다.
 

더욱 시기에 두루봉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렇다면 동굴에서 1년내내 살았던 것일까, 아니면 몇달 살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동굴에서 발견된 짐승뼈들을 토대로 이것들에서 얻을 수 있는 총열량을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열량으로 나누는 방식이 도입된다. 그러자면 동굴에 몇사람이 기거했는가도 문제가 되는데, 제2굴의 경우는 약 40㎡의 넓이에서 5명 정도가 산 것으로 계산을 했다. 그런데 이 5명을 1부1처와 자녀3명으로 된 일가족으로 보고있다. 미국 프랑스 등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미 구석기시대에 핵가족형태의 주거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얻어진 결과는 제2굴에서 최소한 1천6백70일 이상은 살았으리라는 것으로 나타났다(물론 열량산출방식과 주거면적당 인구산출방식에 여러 학자들이 많은 이견을 보이고 있다).
 

한편, 사슴뼈를 분석하면 굴에서 살았던 시기를 알 수 있다. 사슴은 다른 짐승과 다르게 새끼를 낳는 시기가 5월하순∼6월초순에 걸치게 되는 특징이 있으므로, 사슴이빨의 특징과 마모도로 미루어 잡힌 시기가 판명된다.
 

제2굴에서 나온 사슴은, 최소한 49마리로 밝혀졌는데, 태어 난 달을 5월로 기준해 따져보면 9월(14마리)과 10월(11마리)에 가장 많이 잡혔고, 반면에 11월과 4∼7월 사이에는 거의 죽은 사슴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두루봉 제2굴에서 살던 사람들이 적어도 두차례(11월과 4∼7월) 이상 굴을 떠났었다고 추리해볼 수 있다. 반면에 12월∼3월 즉 겨울동안에 죽은 사슴마리수가 각각 4, 3, 5, 4마리나 돼 겨울에도 제2굴에서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최소한 4년 이상을 철따라 살았었다는 얘기가 된다.
 

(좌)주먹도끼 (우)창만드는데 쓰인 뼈연모

 

최초로 꽃을 사랑한 사람들


식물상을 통해서는 당시의 기후의 변화를 밝혀주는 식생대를 분석해볼 수 있는데, 그 단서가 되는 것이 꽃가루와 숯이다.
 

두루봉 제2굴의 22개 지층에서 검출, 확인된 꽃가루(채취된 토양을 비이커에 넣고 KOH ZnCl₂ 빙초산 등 용액을 이용하는 일련의 분석과정을 거쳐 현미경으로 검출)는 2강3아강10목13과12속, 포자 16개, 불분명한 꽃가루 28개로 모두 4백35개나 되었다.
 

이 4백35개의 꽃가루 가운데 나무꽃가루가 3백32개(73.3%), 풀꽃가루가 59개(13.6%) 포자 16개, 불분명한 꽃가루 28개로 나타났고 이중 나무꽃가루에는 낙엽성활엽수 (오리나무·자작나무·서나무·참나무·진달래과 등)가 2백23개(67.2%) 상록성 침엽수(전나무 소나무 등)가 1백1개(30.4%) 등으로 분석됐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나무꽃가루가 우세한 것으로 미루어 산림이 그만큼 발달돼 자연의 정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점과, 주로 낙엽성 활엽수와 상록성 침엽수가 식생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각 지층별로 꽃가루분석을 해보면 동물뼈가 출토된 층(7층)에서 특히 나무꽃가루가 82%나 차지하고, 이중에서도 낙엽성 활엽수가 72.9%여서 따뜻한 기후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는데, 이는 더운 동물뼈화석에서도 뒷받침 되고 있다.
 

이 7층의 꽃가루구성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나무꽃가루 2백51개중 진달래과가 무려 1백57개(62.5%)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진달래과의 꽃가루가 제2굴의 어느 지층에서도 나오지 않고 오직 동물뼈가 출토된 7층의 굴입구에서 집중적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추측을 가능케 해준다.
 

즉, 다른 곳에서는 1점도 검출되지 않는 꽃가루가 한곳에서만 집중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꽃을 일부러 갖다 놓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진달래는 산성토양에서 특수하게 떼를 형성, 황무지 습지 경사지에 자라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알카리성 토양인 두루봉의 가까운 곳에 있었던 진달래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 꽃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 쓴 최초의 예는 6만년전경 네안데르탈인을 묻은 '샤니다르'동굴(이라크)이었다. 역시 꽃가루 분석으로 밝혀진 이 샤니다르동굴의 꽃은 죽음에 대한 경외의 표시로 쓰인 것으로 분석돼 이 굴에 살던 사람들을 '꽃의 첫사람들'(the first flower people)이라고 불러왔다. 그렇다면 두루봉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이야말로 진정한 '꽃의 첫사람들'인 셈이다. 게다가 꽃 이외에도 악세사리(사슴뼈로 만든 얼굴모양의 것등) 같은 게 나온 것을 보면 이들이 미적 감각을 갖고 있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제 7층의 풀꽃가루를 분석해보면 습지를 좋아하는 사초과·벼과·국화과가 89%를 차지한다. 이는 습도가 상당히 높았었다는 얘기다. 결국 제2굴에 사람들이 살던 시기에는 기후조건이 대체적으로 온대남부였으며 습기가 높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제2굴의 7층 이하에서 나온 꽃가루를 살펴보면 낙엽성 활엽수인 오리나무와 침엽수인 소나무속이 교대로 우세하게 나오고 있어 더운 기후와 추운 기후가 교대로 나타났다고 추측된다. 예를 들어 10층에서는 소나무꽃가루만 14개가 나오고 다른 꽃가루는 없는 것으로 미루어 소나무가 상당히 번성했고, 그 기후는 아주 추운 빙기였으리라는 것.
 

제2굴의 꽃가루를 모두 분석한 결론은 두루봉에 사람이 살기 이전에 추운 기후와 더운 기후가 적어도 9차례나 바뀌었고, 소나무와 오리나무가 교대로 번성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한마디로 꽃가루는 '기후의 훌륭한 기록 보관소'인 셈이다.
 

(좌)목걸이로 사용한듯한 짐승뼈 (우)장난감으로 이용한 얼굴모양의 짐승뼈

 

늙은 나무가지들을 땔감으로 이용


꽃가루와 함께 중요한 자료가 숯이다. 이를 통해 나무의 나이테를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의 나이테는 그 나무의 나이를 정하는 한 방법이 되고, 나이테의 폭은 환경에 의해 뚜렷한 변화를 나타낸다. 즉, 건조한 지역에서는 나이테의 폭이 좁고, 강우량과 습기가 많은 지역은 폭이 넓다. 그러나 온난한 기후에서는 나이테의 변화가 별로 없다.
 

두루봉 제2굴의 문화층(사람이 살던 층, 7층)에서 채취된 숯은 모두 29개로 화덕부근에서 나왔는데 거의가 분량이 적고 크기도 지름이 5㎜이하의 것이 대부분인데다 남아 있는 상태가 좋지않은 것들이었다. 따라서 이중 5개의 시료를 얻는데 그쳤는데, 참나무속 1개 소나무속 3개 단풍나무속 1개였다.
 

참나무속으로 밝혀진 시료에서는 현미경 관찰로 2개의 나이테가 확인됐는데 나이테폭이 1.55㎜였다. 여기서 얻어진 결론은 ① 1년간 균등하게 세포가 성장했고, ② 나이테의 폭이 좁은 것으로 보아 성장이 극히 부진한 늙은나무였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이 늙은 나무의 가지로 불피우는데 썼던 것이라고 보여진다.
 

5개의 숯을 분석한 결과로는 참나무 소나무 단풍나무가 모두 늙은 나무의 가지였고, 이는 땔감으로 이용됐으며 나이테폭으로 보아 강우량의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짐승뼈를 이용, 창을 만들기도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인골·동식물상과 함께 구석기유물의 핵심인 각종의 석기들이다. 짐승을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얻으려면 각종의 사냥·조리용 연모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각각의 용도에 알맞게 만든 석기(石器)들이 다양하게 출토된 것이다. 이른바 긁개 찌르개 주먹도끼 망치 자르개 밀개 사냥돌 등이 그것인데, 이중에는 돌이 아닌 짐승의 날카로운 뼈를 가다듬어 이용한 것도 적지 않게 나왔다.
 

예를 들어 사냥할 때는 둥글고 단단한 사냥돌을 질긴 나무줄기에 묶어 목표물에 던졌고, 날카로운 짐승뼈를 막대기에 매달아 훌륭한 창을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이같은 석기와 뼈연모들은 한군데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기도 해 석기제작소가 따로 있었다고 추측된다. 또 뼈연모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위적으로 날카롭게 가다듬은 흔적이 보여 당시의 사냥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구석기유적으로서 두루봉동굴이 갖는 중요성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인골과 함께 풍부한 동·식물상자료, 석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는데 있다. 두루봉동굴에서 이처럼 구석기유물이 많이 나온 것은 이곳이 석회암지대여서 유물보존상태가 양호했기 때문.
 

두루봉유적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므로 좀더 시간이 흘러야 그 최종적인 결과가 나올 것 같다. 특히 인골에 대한 연구가 끝나야만 정확한 연대라든가 구석기인들의 정체, 생활상이 나올 것이다. 동식물상에 대한 연구도 더 진척되면 당시의 자연환경과 기후 농경 의식주생활이 보다 뚜렷하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1986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황의봉 기자
  • 사진

    윤기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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