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곧바로 전구 안의 필라멘트 옆에 금속판을 놓고 실험했다. 이때 금속판은 필라멘트보다 전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 상태로 전구 안에 전류가 흐르자 필라멘트는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열 때문에 필라멘트에서 나온 전자는 전자가 부족한 금속판으로 이동해 금속판에도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반대로 금속판을 필라멘트보다 전자가 많은 상태로 만들어 실험을 했더니, 필라멘트에서 금속판으로 전자가 가지 않아 금속판에는 전류가 흐르지 않았다. 에디슨은 이런 현상을 ‘에디슨 효과’라고 불렀다. 진공 상태에서도 전류가 어떻게 흐를 수 있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에디슨의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그 원인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 전기공학에 관심이 많았던 과학자와 공학자들은 생각이 달랐다. 에디슨 효과는 여러 연구에 쓰일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라고 여겼다.

진공관의 발판이 된 에디슨 효과
그중에서 당시 에디슨 전기조명회사의 과학 고문으로 있었던 영국의 과학자 존 앰브로즈 플레밍은 에디슨 효과를 관찰하던 중, 필라멘트에서 금속판으로 흐르는 전류는 무조건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추가로 발견했다. 뜨거운 필라멘트에서는 전자가 나와 금속판으로 흐르지만, 금속판은 전자를 다시 내보낼 만큼 뜨겁지 않기 때문에 다시 필라멘트 쪽으로 전자를 흐르게 할 수 없었다. 에디슨 효과가 항상 직류만 만들어 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1904년 진공관이라 부르는 새로운 발명품을 탄생시켰다.
플레밍이 만든 진공관은 두 가지 획기적인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교류를 직류로 바꾸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공중에 떠다니는 전파 중에 필요한 신호를 잡는 기능이다. 사람들은 전류를 조절할 수 있는 발명품이 탄생하자, 일종의 라디오 수신기 같은 전파 수신 장치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기능만으로는 라디오 수신기를 만들 수 없었다. 공중에서 흘러 들어온 전파를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증폭시켜주는 기능이 추가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미국의 과학자 리 드 포레스트 박사가 등장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플레밍의 진공관 발명 2년 만에 ‘오디온’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진공관을 개발한 것이다. 오디온은 플레밍의 진공관기능에 증폭 기능까지 더해져 라디오 수신기의 조건을 모두 갖췄다. 플레밍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며, 포레스트 박사를 고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전기전자기술자협회(IEEE)는 1906년 오디온이라고 불리는 3극 진공관은 포레스트 박사가 발명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정확히 말하면 포레스트 박사는 플레밍의 진공관을 개선한 사람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지만, 그 작은 변화가 라디오와 텔레비전, 컴퓨터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가히 놀랍다. 실제로 3극 진공관의 발명은 일반인도 전파를 이용한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빠른 계산을 돕는 진공관
시간이 흐를수록 진공관은 전기 분야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입맛에 맞는 역할을 톡톡히 하며 더욱 ‘만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최초의 진공관 컴퓨터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당시 미 육군 산하의 탄도연구소에서 대포나 미사일을 발사할 때, 대기 온도, 풍속 등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환경에 따라 탄도 하나의 사거리를 계산하려면 200단계나 거쳐야 했다. 이는 노련한 수학자들이 수작업으로 계산을 하려면 적게는 7시간에서 많게는 20시간까지 필요한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탄도연구소 관계자는 획기적으로 계산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소식에 미국펜실베니아대 공과대학 존 모클리 교수의 연구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모클리 교수는 주로 계산기계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진공관으로 계산 속도를 높인 기계식 컴퓨터도 그중 하나였다. 초기 컴퓨터에서 진공관은 데이터를 처리하는 논리 회로를 구성하거나,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 역할을 했다.
결국 1943년 5월 31일, 미 육군은 존 모클리 교수 연구팀과 계약을 맺고 새로운 컴퓨터를 만들기로 한다. 하지만 새 컴퓨터가 세상에 등장하기도 전에 전쟁은 끝이 났고, 모클리 교수와 대학원생이었던 프레스퍼 에커트는 1946년 2월 ‘에니악(전자 숫자 적분 및 계산기)’이라는 이름의 컴퓨터를 선보였다. 전원 스위치가 켜지면, 에니악 내부에 있던 1만 7468개의 진공관이 깜빡이며 계산을 시작했다.
에니악이 이끈 컴퓨터의 미래
다행히 에니악은 전쟁 이후에도 수소폭탄 설계, 날씨 예측, 우주선 연구, 열 폭발 감지, 임의 숫자 연구, 풍동 설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쓰였다. 에니악은 당시 수학자들이 7~20시간 걸렸던 문제를 30초 만에 풀어냈다. 에니악은 당시에 있었던 그 어떤 컴퓨터보다 1000배 이상 빠른 속
도로 계산할 수 있었다. 1초에 5000번의 덧셈, 357번의 곱셈, 38회의 나눗셈이 가능했다.
하지만 에니악은 폭이 26m이며, 무게가 27톤으로 42평(약 138.84m2) 정도의 공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너무 많은전력이 필요했는데, 2만 개에 가까운 진공관이 열을 뿜어대 에어컨 설치는 필수였다. 비용도 비용이었지만 자주 교체해 줘야 하는 진공관 때문에도 관리가 어려웠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에니악은 그 뒤로 약 10년 동안 최초의 전자 컴퓨터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에니악의 뒤를 이어 다음 세대 컴퓨터를 개발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이나 헝가리 출신 미국 수학자 폰 노이만 역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진공관의 장단점을 따져 반영했다.
에디슨의 작은 궁금증으로 시작해 라디오, TV, 컴퓨터의 역사를 다시 쓴 진공관.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전기전자분야에서 퇴물이 아닌 역사속 슈퍼스타로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