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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이라 하면 자연스럽게 검정색 정오각형과 흰색 정육각형이 교차하며 만나는 깎은 정이십면체를 떠올린다. 그런데 이 축구공과 모양이 같아 ‘실험실의 축구공’이라 불리는 물질이 있다. 축구공이 무수히 많은 발길질에도 끄떡없듯이, 이 물질도 대단히 높은 온도와 압력을 견뎌내는 안정적인 구조다.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축구공, 풀러렌을 만나 보자.

‘이건 순수한 탄소만으로 이뤄진 또 다른 분자다!’
다이아몬드와 흑연에 이어 탄소만으로 이뤄진 세 번째 물질을 발견했다. 마치 깎은 정이십면체의 각 꼭짓점 자리에 탄소가 있는 분자 구조처럼 보인다. 아마 이건 분명히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증명한 그 구조와 같은 것이 분명하다!

 

1985년 영국의 화학자 해리 크로토와 미국의 화학자 리처드 스몰리, 로버트 컬 세 사람은 탄소만으로 이뤄진 새로운 물질을 발견했다. 크로토의 아이디어와 다른 두 사람의 실험 기술이 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처음 집중한 물질은 ‘흑연’. 흑연은 탄소 원자가 육각형 모양으로 서로 연결돼 만들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레이저를 쏘자, 흑연에 있던 탄소 원자가 불에 탄 숯처럼 번쩍 타올랐다. 레이저가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던 그을음에서 바로 이 물질이 발견됐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받아 만들어진 기체 상태의 탄소 원자가 공기 중에서 급격히 온도가 낮아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구조가 공을 닮았다!

새 물질은 탄소 원자 60개로 이뤄져 있었다. 세 사람은 레이저가 흑연에서 탄소를 큰 덩어리 상태로 떼어냈으며, 떨어져 나온 탄소 원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추측했다. 세 사람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발견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탄소는 친화력이 좋아 쉽게 다른 원자와 반응한다. 그런데 이 물질은 다른 원자와 반응하지 않은 것은 물론, 탄소만으로 안정적인 구조를 이뤘다. 서로 다른 구조를 상상하던 세 사람은 여러 번 회의를 거치며 점점 생각을 좁혀갔다.

마침내 세 사람은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만국박람회에서 미국의 건축가 리처드 벅민스터 풀러가 선보인 ‘지오데식 돔’을 떠올렸다. 만국박람회는 19세기의 산업 경쟁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세계 각국의 중요한 산물을 모아 진열하고 새로운 산업 기술의 성과와 문화를 겨루던 국제박람회다. 당시 풀러는 적은 재료로 큰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건축 구조를 만들기 위해 구를 닮은 다면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 결과 풀러는 전통적인 건축물보다 훨씬 더 적은 재료를 사용해 더 큰 공간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건축 양식인 지오데식 돔을 개발했다.

세 사람은 새 물질의 구조가 이와 닮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건축가 풀러의 이름에서 본 떠 새로 발견한 물질을 ‘풀러렌’이라고 정했다. 공을 닮은 구조물이라는 점과 풀러의 애칭(버키)을 더해 ‘버키볼’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렀다.

수학적인 아이디어로 분자 구조를 증명

풀러의 지오데식 돔은 정삼각형에서 출발한다. 커다란 정삼각형을 합동인 작은 정삼각형으로 잘게 쪼갠다. 그 다음 이것을 구에 내접시키고, 잘게 쪼갠 정삼각형의 각 꼭짓점을 구 표면에 정사영시킨다. 즉, 표면을 최대한 구에 가깝게 합동인 삼각형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오데식 돔이 된다. 평면이었던 정삼각형을 단숨에 입체로 만들기 어렵다면, 정이십면체를 기본으로 다면체의 각 면을 작은 삼각형으로 쪼개 만드는 방법도 있다. 보통은 지오데식 돔 구조를 재현하기 위해 정이십면체를 이용한다.

세 사람은 이런 성질이 있는 지오데식 돔 구조와, ‘육각형으로 둘러싸인 오각형이 12개가 있으면 완전히 닫힌 곡면을 만들 수 있다’는 스위스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명제를 떠올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정오각형 12개와 정육각형 20개로 이뤄진 축구공이 떠올랐다. 어떤 화학적 결합 없이도 안정적인 구조를 자랑하던 풀러렌은 아무래도 축구공과 같은 ‘깎은 정이십면체’를 닮은 것 같았다. 꼭짓점도 딱 60개여서 오각형과 육각형이 만나는 모든 꼭짓점을 탄소 원자로 바꾸면 풀러렌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실제로 풀러렌의 분자 구조와 깎은 정이십면체가 완벽히 일치한다고 밝혀내기까지 5년이나 걸렸다. 세 사람은 수백 번의 실험 끝에 풀러렌의 분자 구조가 3억 분의 1 크기로 축소한 축구공 같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공로로 1996년에는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에이즈 치료약 개발에도 쓰인다

풀러렌은 우연히 발견됐다. 같은 탄소 원자로 이뤄져 있어도, 원자의 결합 방식이나 개수가 달라지면 전혀 다른 분자가 된다. 다이아몬드와 흑연의 특징이 전혀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풀러렌 역시 다이아몬드나 흑연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원자가 결합돼 있다. 특히 풀러렌은 안쪽에 공간이 비어 있다. 그 공간에 다른 분자를 집어넣거나 표면을 변화시켜 새로운 물질을 찾는 연구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에이즈 치료 약 개발에도 풀러렌 화합물을 쓰기도 했다.

1991년 일본 메이조대의 화학자 스미오 이이지마는 풀러렌이 발표되자, 풀러렌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분자 찾기에 돌입했다. 다른 결합 방식으로 생기는 새로운 분자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이이지마도 흑연 실험을 진행하며, 그을음뿐만 아니라 실험 전후의 흑연 표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탄소 원자가 한 방향으로 길게 결합돼 마치 원기둥 모양을 이루는 ‘탄소나노튜브’를 발견했다. 이렇게 발견된 탄소나노튜브는 지금도 군사, 자동차, 반도체, 의학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풀러렌은 1985년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사실 ‘불’이 발견되면서 만들어진 물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어느 누구도 관심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세 과학자를 만나, 세상을 바꾸는 물질로 거듭났다. 그리고 풀러렌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수학의 도움으로 풀러렌은 많은 과학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과학과 수학, 앞으로도 세상을 바꿀 발견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2015년 09월 수학동아 정보

  • 염지현(ginny@donga.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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