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공구성, 마스크와 손 씻기를 전파해서 조선을 휩쓴 급성 호흡기 감염병 ‘홍진(홍역)’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에게 찾아온 두 번째 기회, 바로 천연두(두창) 예방입니다. 이번에 공구성은 유교 사상을 이용해서 천연두를 물리치려 합니다. 과연 이번에는 조선 팔도에 종두법을 퍼뜨릴 수 있을까요?


편집자 주
시간을 되돌려 조선시대에 떨어진다고 해도, 설계도만 있다면 증기기관차를 만들 수 있을까요? 현재환 서울대 교수의 소설 ‘내 손으로 조선에서 과학혁명?!’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해보려 합니다.
서양과학사 전공자인 대학원생 공구성이 조선시대로 떠난 강제 현장실습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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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5월 14일, 어린 소년 제임스 핍스에게 처음으로 우두법을 시행하는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를 묘사한 그림. 제너는 최초로 소에서 얻은 고름을 접종해 천연두 면역을 얻는 우두법을 만들었다.
예습
소머리에서 우두로 이어지는 연상게임?
수업 준비에 논문 강독에 주말도 바쁘다며 버티는 공구성을, 부모님은 기어코 차에 태우고서 파주 마장호수 출렁다리로 향했다. 가을 단풍도 아름다운데 청국장이나 한 그릇 비우고 오자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긴 구성은 차 뒷좌석에서 아이패드를 켜고 다음 주 수업 논문들에 형광색으로 열심히 밑줄을 그었다.
‘아, 어지럽네…. 차멀미인가?’
한참을 읽다 눈꺼풀이 무거워져 멍하니 차창 밖을 내다보니, 멀찍이 축산 농가의 축사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구수한 소똥내가 맡아지는 듯도 했다. 울타리 사이로 고개를 내민 누렁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구성의 머릿속에 불현듯 ‘우두(牛痘)’라는 단어가 스쳤다.
“소머리(牛頭)에서 우두(牛痘)라니… 한자는 전혀 다르지만 이거 완전 기묘한 의식의 흐름 연상게임이네. 어,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읽은 정약용의 ‘마과회통’ 초간본에는 왜 우두법 이야기가 쏙 빠져 있었지? 음…”
창밖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음매~’ 소리 뒤로, “여보, 출렁다리 보고 나서 청국장 말고 저기 호수 앞에 소머리국밥 잘하는 집 있던데 거기로 갈까?”하고 도란도란 나누시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아득해지며 구성은 스르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과제
조기 우두법 도입으로 위생적 근대화의 단초 마련하기

GIB
“소머리국밥은 싫어!”
앉아서 졸다 말고 벼락같이 터져 나온 공구성의 고함에, 마침 점심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서던 하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쿠쿠! 아이고, 음식은 다행히 멀쩡하구먼유…. 관찰사 나으리, 진지에 국물이 싫으시면 찬을 새로이 대령할까유…?”
“크흠흠! 흠, 아니다. 바깥채에 잠시 물려 두어라.”
헛기침을 삼키며 번쩍 정신을 차린 구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또다시 강제 회귀 현장실습에 내던져진 상태였다. 밀려오는 기억을 더듬어 관직과 신분을 정리해 봤다. 이번 빙의 대상은 호남 도정을 총괄하는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유원이었다. 지난 번에 홍역 예방에 실패해 한바탕 홍역을 치뤘지…. 이번 현장실습은 의학사 2회차로, 관악산 산신령이 천연두를 막아보라고 관찰사로 보낸 모양이었다.
“이유원? 도통 과학기술과는 거리가 먼 골수 문인 관료잖아? 가만있자, 지난번 양지 현감 때는 일개 수령이라 힘이 없다고 생각해서 이번엔 호남 전체를 주무르는 관찰사 권력을 쥐여준 건가?”
천연두(두창), 옛말로 마마는 누적 사망자만 10억 명에 달할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다. 치명률만 30%에 달했고, 살아남는다 해도 흉터가 얼굴을 비롯한 온몸을 뒤덮어 사회적 고통 속에 살아가야 했다. 이렇게 무서운 병이 인류가 완전히 정복한 단 하나의 병이라는 게 또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다. 인류가 처음 발명한 천연두를 막는 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사람의 고름을 채취해 사용하는 인두법. 다른 하나는 우두에 걸린 소의 고름을 채취해 사용하는 우두법.
인두법은 조선에서도 알려져 있었다. 특히 구성이 도착한 철종 연간 무렵은 인두법이 민간과 유의들 사이에서 마마 예방법으로 정착해 가던 시기였고, 우두법에 관한 소문도 청나라 사행길을 통해 알음알음 지식인들에게 전해지던 때였다. 당시 조선의 인두법은 감염 위험이 큰 생고름(시묘) 대신, 환자의 말린 딱지나 정제된 고름(숙묘)을 가루 내어 대롱으로 코에 불어넣는 비묘법과 수묘법 형태가 주류였다. 반면 우두법은 소의 고름이나 딱지(우두묘)를 사람의 팔에 접종하고, 이를 다시 다른 아이들에게 차례로 접종시키는 방식이었다. 인두법에 비해 안전성과 효과가 탁월한 우두법이야말로 최고의 방역 수단이 될 터였다.
“우두법을 1851년에 전라도에서 조기 정착시키면, 근대 공중보건 체계도 반세기 앞당겨 완성할 수 있잖아? 지난번 홍역 마스크의 굴욕을 씻고 이번에야말로 보건 혁명을 이뤄내리라!”
의욕이 충만해진 공구성은 정약용의 ‘마과회통(麻科會通)’부터 다시 찾아 손에 넣었다. 책장을 넘기던 구성은 정약용이 순조 28년(1828년)경 유배에서 풀려난 뒤 증보판 말미에 부록으로 수록한 ‘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을 발견했다. “찾았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우두법을 퍼뜨려야지!”
해결 방안
유교적 사고방식에는 유교로 맞서라!
그런데 잠깐, 부록을 훑어보던 구성의 뒷목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내용이 너무 듬성듬성했던 것이다. 에드워드 제너가 우두법을 발견한 내력이나 영국과 마카오를 거쳐 동아시아로 도입된 경로는 물론이고 서양 인명과 지명이 싹 지워져 있잖아!
“신유박해 이후 서학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시퍼렇던 시절이니 몸을 사린 건 이해하지만, 핵심 술기들도 죄다 도려내 버렸으니 이걸 보고 접종을 어떻게 따라 해?”
턱을 괴고 한참을 고심하던 공구성은 원주인 이유원의 기억 속에서 자택 서가에 꽂힌 서책 한 권을 번뜩 떠올렸다. 1845년(헌종 11년) 북경에 갔을 때 청나라의 저명한 장서가 요형(姚衡)과 교유하며 선물로 받았던 구희(邱熺)의 ‘인두신법전서(인두략(引痘略)의 변형 판본)’이었다. 급히 한양 본가로 심부름꾼을 보내 장서를 가져오게 한 뒤 책장을 펼친 구성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인두략’은 동아시아 전통 의학의 문법으로 서양 우두법을 성공적으로 현지화한 명저였다. 구희는 두창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체내의 태독이 발현하는 병으로 규정하고, 우두묘를 몸속 태독을 안전하게 끌어내어 해소하는 상서로운 기운으로 설명했다. 또한 소는 오행 중 토(土)에 속하고 인체의 비장(脾臟) 역시 토에 속하므로, 비장에 잠복한 두창의 독을 무해하게 끌어내어 배출시킨다는 논리까지 갖추고 있었다. 접종 혈자리 역시 음양 이론을 따른 남좌여우(男左女右)의 원칙에 따라 상박의 삼초경을 취하도록 규정해 유학자들의 거부감을 차단했다.
공구성이 무릎을 탁 쳤다. “이거다! 조선 사대부들의 성리학적 반발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는 현지화 텍스트가 이미 내 서가에 있었잖아! 럭키비키는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이번에야말로 굿 필링이다! 크캬캬캬!!”
구성이 실패의 쓴맛을 본 것도 이미 8번째, 특히나 지난 번 홍역 수업에서는 마스크를 도입하려 했지만 수많은 오해와 사회적 저항에 부딪쳤다. 우두법도 마찬가지였다. “대감, 소의 축기와 사람의 영기는 상충합니다. 우두법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문밖에 주저앉은 선비들이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인두략’을 따라 한다면 이를 돌파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유교드래곤은 유교드래곤으로 돌파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후기 우의정을 역임한 문신 오명항의 초상화. 얼굴에 천연두에서 회복된 후 남은 흉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오명항 초상화는 조선 사람들이 어떤 병을 앓았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예술 작품이다.
보고서
필요한 건 사실 병든 소와 냉장고?
신이 난 공구성은 즉시 ‘인두략’을 필사해 전라도 관내 고을 수령들에게 하달했다. 도내 의원들은 전주부 감영으로 소집해 시범 접종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구성에게 조선이라는 현실의 벽은 더없이 높았다. 감영 문턱을 넘나드는 수령들과 의원들은 책을 읽을수록 더 큰 혼란에 빠졌다. 며칠 뒤, 호남의 저명한 유의와 감영의 의관들이 관찰사 집무실로 몰려와 읍소했다. 이번에는 실무적 사항이 부족한 게 첫 문제였다.
“영감마마, 보내주신 ‘인두략’의 문리와 음양오행의 도리는 참으로 정묘하옵니다. 허나 글만 보아서는 소의 젖봉오리 어디서 두묘를 긁어내야 하는지, 접종침을 얼마나 깊이 찔러 넣어야 하는지 손끝의 감을 전혀 잡을 수 없사옵니다.”
구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호남 도정을 총괄하며 주도했으니 모른다고 발을 뺄 수도 없고…’ 하지만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옳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개량도 버밍엄의 만월회(Lunar Society) 같은 지식인-기술자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했잖아? 유의들과 각 고을 의원들을 정기적으로 모아 임상 술기를 토론하게 하자. 이름은 종두회다!”
하지만 종두회를 조직해 서책의 내용을 함께 강독했음에도 현장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영감마마! 시범 접종을 행하려 하였으나 백성들의 동요와 곡성이 영문 앞을 뒤덮고 있사옵니다!”
첫 번째 장벽은 시술 방식에 대한 대중적 거부감이었다. 당시 어느 정도 정착 가도에 선 인두법은 마른 딱지 가루를 대롱으로 코에 흡입시키는 비묘법이라 신체 훼손이 없었다. 이에 비해 우두법은 종두침이나 칼로 살갗을 째거나 긁어내는 완종법(腕種法)이었다. 부모들은 “신체발부 수지부모이거늘, 완종법은 아이의 몸에 칼을 대어 피를 내는 해괴한 술수”라며 자식을 숨겨두고 접종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보다 치명적인 진짜 문제는 바로 우두에 걸린 소가 없다는 것이었다.
“영감마마, 도내 삼남의 모든 외양간을 샅샅이 뒤졌으나 우두를 앓는 소는 단 한 마리도 찾지 못했사옵니다!” “아니, 전라도 소들은 어찌 이리 건강하단 말이오?! 나 원 참 죽을 노릇이네!”
인두법은 두창 환자가 발생하면 언제든 인두묘를 현장에서 채취할 수 있었지만, 우두법은 자연 상태에서 두창을 앓는 소의 수포나 딱지에서 두묘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두창에 걸린 암소는 백 마리 중 한두 마리 찾을까 말까 할 정도로 극히 드물었다.
또, 두묘는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을 구하는게 가장 중요했다. 한여름 비유행기가 찾아와 접종할 어린아이가 없으면 마땅한 보관 기술이 없는 조선에서는 피종접자로부터 얻어지던 두묘 사슬 또한 끊겨버렸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겨울 북경 사행길을 통해 어렵사리 두묘를 공수하려 해도, 한양을 거쳐 전라도 전주 감영까지 운송하는 데 최소 15일 이상 소요되는 동안 두묘의 활력이 모두 사멸해 버렸기 때문이다. 완벽한 이론에 의학 지식 네트워크까지 구축했지만, 이를 실현할 기술 인프라가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내게 필요한 건 사실 두묘를 얻을 병든 소와 냉장고 아니었을까?” 공구성이 ‘인두략’을 내려놓으며 깊은 탄식을 내뱉는 순간, 집무실 허공에서 펑~ 하는 굉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 속에서 관악산 산신령이 나타났다. “
허허허! 기특하구나, 기특해! 비록 기술적 한계에 부딪혀 실패했으나, 지식 너머에 존재하는 물질성과 기술 인프라의 가치를 깨달았으니 괄목상대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로다!” 처음 듣는 산신령의 극찬에 구성은 잔뜩 찌푸렸던 얼굴을 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 산신령 영감님! 이 정도면 A+ 아닌가요? 저 이제 과거의 오만한 서양 과학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요!”
“에이잉… 칭찬 한마디 해줬더니 꼬리를 살랑대며 기어오르는구나. 이번 과제 학점은 B+다!”
“아, 질질 끌지 말고 제발 종강 좀 시켜주세요!” “허허허, 시끄럽다. 마장호수 앞 소머리국밥이나 한 뚝배기 든든하게 말아먹고 가거라!”
“아, 소머리국밥은 냄새나서 싫다니까요~!”

서울역사박물관
1915년 경성(서울) 삼청동에서 우두약의 원료인 두묘를 생산하기 위해 송아지를 선별하는 모습. 우두법 도입은 일제강점기까지도 꾸준한 저항에 부딪쳤다.
현재환 교수와 소설 뜯어보기
우두법은 어떻게 동아시아에 도입됐을까?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에드워드 제너가 개발한 우두법이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이므로 도입 즉시 널리 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의료 기술이 한 사회에 안착하는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서양의 새로운 우두법은 칼로 피부를 절개해 백신을 넣는 완종법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두법이 수용되기 위해서는 시술에 대한 문화적 거부감을 줄이고, 태독론이나 음양오행 등 전통적인 병인론으로 우두의 원리를 재해석하는 토착화 과정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중국의 구희가 저술한 ‘인두략’은 이러한 현지화에 기여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일본 역시 난학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동서양 지식을 융합하며 우두법을 빠르게 수용했습니다.
반면 조선에서는 정약용이 1828년 이후 ‘마과회통’에 부록으로 ‘신증종두기법상실’을 포함시킴으로써 우두법을 처음 소개했지만,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는 서학 탄압이라는 상황 속에서 정약용이 정치적 위험을 피하고자 백신의 지속적 공급과 보존에 필수적인 전종법 등 주요 내용들을 삭제해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의사학자 김성수의 연구에 따르면 1830~1850년대 사이에 ‘인두략’ 계통의 지식이 유입됐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두묘를 수입·생산·보관하고 지식을 교류할 의학 지식 네트워크와 국가적 지원이 결여돼 있었기에 중국 및 일본과 달리 우두법은 널리 확산되지 않았습니다.
| 공구성의 답답함에 공감하고 싶을 때 딱 좋을 글들
신규환, 조정은, 김영수, 이현주 지음. 동아시아, 두창에 맞서다: 두창 유행과 백신 개발의 역사. 역사공간, 2025.
김성수, “조선 후기 우두법 수용의 새로운 이해.” 연세의사학 제28권 1호, 2025.

Korean J Med Hist
우두법을 동아시아 전통 의학과 성공적으로 접목한 의서 ʻ인두략’에 실린 우두칼. 우두 접종에 사용되는 도구였다.
현재환
서울대 학부대학 및 과학학과 교수. 전공은 과학사 및 과학기술학(STS)이다. 과학기술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기를 희망하며 과학사와 STS의 대중화를 시도하고 있다. jhwanhyun@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