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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주요기사][Disable? This Able!] ABLE TO HANDLE 떨리던 손을 멈추다 자이로글로브

▲GIB, Gyrogear, 박주현
 

바늘에 실을 꿸 때처럼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우리는 약간의 손떨림을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본태성 떨림(수전증)을 앓고 있거나 후천적으로
수전증이 생긴 파킨슨병 환자는 다르다. 식사나 악기 연주 등 생활에 커다란 어려움이 생긴다. 영국에선 팽이의 원리가 적용된 장갑이 이들의 떨리는 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자이로글로브(Gyroglove)’를 제작한 스타트업 ‘자이로기어(Gyrogear)’의 창업자 파이 옹과 e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편집자 주
 
 
인기리에 연재된 ‘Disable? This Able!’ 기사를 이번 화로 마칩니다. 지난 6개월 동안 보조공학의 세계에 관심 가져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1~6화 전 회차 기사는 한 번에 볼 수 있습니다. QR코드를 스캔하면 과학 콘텐츠 플랫폼 ‘d라이브러리’로 연결됩니다. (6월 1일 오픈 예정).

 

“손을 제어할 수 있게 되면서 수십 년 만에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았어요.”
영국의 70대 여성 사라 호든 씨는 수십 년 동안 본태성 떨림(수전증)을 앓아왔다. 수전증은 선천적으로 손이나 다리, 머리 등 신체의 일부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거나 떨리는 신경 질환이다. 질환은 주로 성인기에 시작되며 나이가 들며 서서히 악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 인해 수전증 환자들은 정교한 손동작을 요구하는 행위는 물론, 매일 하는 식사 과정에서도 고충을 겪는다. 수저를 사용하지 못하고, 손으로 집어든 음식도 손떨림 때문에 떨어뜨릴 우려가 있어 따뜻하거나 차가운 음식은 먹을 수 없다. 호든 씨의 평소 소원은 가족과 함께 즐기는 게임이었다. 손떨림 때문에 그간 제대로된 게임을 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새 삶이 찾아왔다. 손떨림을 제어하는 장갑 ‘자이로글로브’를 만난 2024년 3월, 호든 씨는 살면서 처음으로 ‘주도권’을 되찾았다. “자이로글로브를 끼고 난 이후로는 마침내 혼자서도 음식을 먹고 마실 수 있게 됐어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가족과 함께 섬세한 손동작이 필요한 젠가 게임을 하기도 했죠. 제게 젠가는 단순한 게임 이상의 의미였어요. 가족과의 웃음과 유대를 다시 찾은 시점이었어요.” 그는 2024년 한 해 동안 자이로글로브를 사용한 후기를 자이로기어에 전했다.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수전증은 40세 이상 인구의 약 4%에서 나타나는 가장 흔한 운동장애다. 연령이 증가하면서 발병률도 높아지고 있지만 그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한국에서 호든 씨처럼 선천적으로 손떨림을 달고 사는 환자는 2021년 기준 6만 5235명에 달한다.


2015년 설립된 자이로기어는 2020년 자이로글로브를 처음 출시했다. 이후 2020년 영국 정부로부터 손 떨림 제어 기술을 인정받아 300만 달러(약 42억 원)의 보조금을 확보했으며, 같은 해 열린 동남아시아 슬링샷(SLINGSHOT) 2020 스타트업 경연대회에서 7500개 참가 기업 중 2위를 차지했다. 자이로글러브는 2024년
에 타임지 ‘올해의 발명품’에 선정됐으며 2024 소비자가전전시회(CES)에선 혁신상 8개 부문에서 상을 거머쥐었다.

 

▲Gyrogear
30대 무렵 수전증 증상이 심해진 영국의 70대 수전증 환자 사라 호든 씨는 2024년 자이로기어의 수전증 완화 장갑인 자이로글로브를 착용한 후로 게임이나 그림 그리기 등을 하며 일상을 되찾았다.

 

자이로글로브 작동 원리
▲Gyrogear
 
사용자는 긴 장갑을 끼듯 팔을 넣어 자이로글로브를 착용할 수 있다. 자이로글로브의 손등에는 은색 원통 모형의 자이로스코프가 달려 있다. 자이로스코프는 사용자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미세하게 무게중심을 바로잡아준다.

1 사용자가 자신의 팔 크기에 맞는 자이로글로브를 착용한다.
2 사용자가 무작위로 팔을 움직인다.
3 팔에 부착된 CPU가 시시각각 달라지는 무게중심을 계산한다.
4 무게중심에 맞춰 자이로스코프를 조절하며 떨림을 억제한다.

 

환자 돌보던 의사, 발명가 되다

 

자이로기어를 창립한 파이 옹 대표는 의사 출신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 의대에 진학했다. 그러다 의대생 신분으로 일하던 병원에서 고령의 환자들이 불편함을 겪는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게 됐다.

 

“103세의 파킨슨병 환자가 수프 한 숟가락을 떠먹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아나요? 무려 30분이나 걸립니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앞치마 위에 흘리고 말죠. 약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닌지 간호사들에게 물으니 의학적 조치는 이미 끝났다고 했어요. 제게는 의료의 한계라는 말이 곧 ‘환자를 포기하겠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날 결국 저는 수업을 건너뛰고 환자의 옷을 갈아입히며 생각했죠.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데 왜 아무것도 해줄 방안이 없다는 걸까’라고요.”


현재 후천적 수전증의 원인인 퇴행성 신경 질환인 파킨슨병에 대해 알려진 뚜렷한 치료법은 없다. 환자들을 돌보던 옹 대표는 “환자들의 일상 속 어려움이 개선 불가능한 ‘불치’라는 의료진의 말에 의료기기 개발을 결심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에서 의학 석사 과정을 밟은 후 웨어러블 기기 연구를 위해 미국 하버드-매사추세츠공대(MIT) 헬스 사이언스&테크놀로지(HST) 프로그램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손 떨림 방지에 쓰일 40가지 이상의 기술을 검토하며 골머리를 앓던 옹 대표는 어느 날 문득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장난감 ‘자이로스코프’를 떠올렸다. 그는 어느 방향으로 기울여도 항상 원상태로 복귀하는 자이로스코프가 균형 잡는 모습을 보며, 자이로스코프 기술을 활용한 장갑을 생각해 냈다.

 

장갑에 적용된 팽이의 ‘중심 잡기’ 원리

 

자이로글로브의 사용법은 간단하다. 사용자가 팔에 끼워 착용하고 전원을 켜면 곧바로 손 떨림이 진정된다. 옹 대표는 자이로스코프 기술이 적용된 자이로글로브를 ‘물리학 기반 위에 세워진 정교한 기계공학 집약체’라고 설명했다. 자이로글로브는 회전하는 원판 형태의 장치인 자이로스코프를 손등에 부착한 뒤, 각운동량의 보존 법칙을 활용해 떨림을 억제한다. 자이로스코프는 방향이 바뀌려는 외부 힘에 저항하는 성질이 있는데, 이를 손의 미세한 떨림을 막는데 적용한 것이다.


사용자의 손이 떨리면 자이로스코프는 반대 방향으로 힘을 가해 손의 흔들림을 실시간으로 상쇄한다. 마치 흔들리는 팽이가 반대쪽으로 기울며 다시 무게중심을 잡아가는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양상이다. 이 원리는 항공우주 산업에서 비행체의 자세를 안정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옹 대표는 자이로글로브를 두고 “기계 역학에 쓰이는 자이로스코프를 의료기기에 접목한 최초의 사례”라고 강조했다.


옹 대표에 따르면 자이로글로브의 떨림 상쇄 성능은 상상 이상이다. 그는 “장갑에 탑재된 자이로스코프는 제트 터빈 블레이드보다 최대 4배 빠르게 회전하고, 컴퓨터 드라이브보다 100배 이상의 정밀도를 갖췄다”며 “제품 사용 기간인 3년 동안 약 11억 회의 회전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돼 있어 장기 사용에도 고장에 부담이 없다”고 설명했다.


단순해 보이는 디자인도 “기능성과 편의성을 모두 고려한 결과”라고 옹 대표는 짚었다. 그는 “은색 원 모양의 자이로스코프는 손등에 위치해 장시간 착용해도 피로가 적다”며 “사용자별로 다양한 손 크기에 맞게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돼 고령의 사용자에게도 사용 친화적”이라고 전했다.


옹 대표는 무엇보다 자이로글로브의 최고 장점으로 ‘비침습적 기기’라는 점을 꼽았다. 자이로글로브를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수술이나 약물 없이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간 극심한 손떨림으로 일상 속 갖은 행동에 제약을 받던 환자들은 식사, 필기,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 같은 일상 동작을 능숙하게 해내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겼다. 현재 자이로글로브는 5899달러(약 825만 원)에 맞춤 제작이 가능하다.

 

▲Gyrogear
자이로글로브를 착용한 수전증 환자들이 그린 나선 그림. 착용 전에는 형태가 불안정했지만, 착용 후에는 비교적 매끄럽고 안정적인 나선을 완성했다.

 

“손을 넘어 삶을 바꾸는 기술을 꿈꿉니다”

 

자이로기어가 그리는 ‘떨림 없는’ 미래는 손에만 머물지 않는다. 옹 대표는 손 떨림만이 아닌, 신체 다른 부위의 불수의 운동(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근육의 움직임)까지 진정시킬 수 있는 기기를 개발하겠다는 야심을 밝혔다.


“우리는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기술을 만듭니다. 자이로글로브는 손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다시 잡게 해주는 장치예요. 다리 떨림이나 하지불안증후군과 같은 다른 부위의 불수의 운동에도 자이로스코프 기술을 적용할 겁니다. 한국에서도 이 기술이 하루빨리 사람들의 손에 닿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넓은 신체 움직임에 적용할 수 있는 우리 기술의 비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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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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