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 리사, 싸이, 테일러 스위프트, 도널드 트럼프, 스펀지밥, 아돌프 히틀러, 찰스 다윈의 공통점은? 유명인(캐릭터)의 이름인 동시에 학명으로도 쓰인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어쩌다 이들의 이름이 과학적 이름인 ‘학명’에 들어가게 된 걸까요. 자연에 이상한(?) 이름을 붙이는 속사정을 알아봤습니다.

삼각형의 검은 눈. 툭 튀어나온 눈썹과 머리를 감싸는 딱딱한 껍데기. 두 눈 사이로 삐져나온 더듬이. 당신이 보고있는 얼굴은 심해 깊은 곳에 사는 신종 등각류입니다.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징그러운 곤충 확대사진? 먼 우주에서 찾아온 외계인?
피터 응 싱가포르국립대 생물학과 교수가 이끈 국제 공동연구팀은 이 얼굴에서 영화 ‘스타워즈’의 악역인 ‘다스 베이더’를 떠올렸습니다. 2025년 1월 14일, 응 교수팀은 새로 발견한 심해등각류의 학명을 다스 베이더의 이름을 딴 ‘바티노무스 바데리(Bathynomus vaderi)’라고 명명했습니다. doi: 10.3897/zookeys.1223.139335
등각류는 등각목에 속하는 갑각류입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등각류로는 쥐며느리, 공벌레, 갯강구 등이 있죠. 다들 작은 크기에 딱딱한 껍데기와 많은 다리를 가진 청소 동물입니다. 그러나 연구팀이 바티노무스 바데리를 발견한 장소는 어둡고 습한 풀섶도, 먼바다도 아닌 베트남 꾸이년시의 수조 탱크였습니다. 심해등각류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랍스터와 같은 별미 식재료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노이대 직원들이 2022년 3월, 해산물 시장에서 다른 등각류와 조금 다르게 생긴 신종을 발견하고 구입한 것이죠. 이번에 발견된 바티노무스 바데리는 길이 26cm에 무게가 1kg에 이릅니다. 1.5cm 크기의 육지 친척 공벌레와 비교하면 17배 넘게 차이나는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스타워즈에서 다스 베이더는 검은 헬멧으로 항상 얼굴을 가린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전 싸움에서 얻은 상처를 가리기 위함이죠. 연구팀은 논문에서 “다스 베이더의 헬멧은 새로운 바티노무스 종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학명의 어원을 설명했습니다. 다시 한 번 등각류의 얼굴을 들여다봅시다. 둥근 이마와 검은 삼각형 눈매가 다스 베이더의 헬멧과 조금 닮아보이지 않나요?
학명이 이래도 되는 거야?
당신의 머릿속엔 어쩌면 위와 같은 질문이 떠올랐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름이란 무릇 누군가를 꽃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기호이며, ‘학명’이란 무릇 한 생물을 과학적 위치에 고정시키는 유일무이한 이름 아니겠습니까. 학명을 뭐랄까, 좀 더 엄격하고 진지하게 지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기대와는 달리, 놀랍게도 다스 베이더에게서 영감을 얻어 지은 학명은 무려 15개 가량 있습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와 관련된 학명으로 확장하면 무려 50개 가량 되죠. 위키피디아에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이름을 따온 생물의 목록’이라는 항목이 있을 정도입니다(과학자 중에 스타워즈 덕후가 정말 많다는 건 잘 알겠네요).
생물의 이름은 다양합니다. 과학동아 3월호 ‘내가 만난 멸종위기종’ 기사의 주인공인 ‘구상나무’를 예로 들어볼게요. ‘구상나무’라는 한국 이름은 제주도 방언인 ‘쿠살낭(성게나무)’에서 왔다고 알려졌습니다. 서구에는 ‘Korean fir’, 한국 전나무로 부르고 있죠. 이렇게 일상에서 쓰이는 생물 이름은 언어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과학계에서는 하나의 생물을 고유하게 지칭할 이름, 즉 학명이 필요합니다. 이 체계를 만든 사람이 스웨덴의 식물학자였던 칼 폰 린네입니다. 린네가 1758년에 도입한 학명 체계인 ‘이명법’에서 구상나무는 다음처럼 불립니다.
Abies koreana
속명 종명
(아비에스 코레아나)
이명법의 원칙은 단순합니다. 생물의 속명과 종명을 나란히 쓰는 겁니다. 구상나무는 전나무속(Abies)에 속하는 종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뒤에는 종을 더 상세히 구분하는 아종명과 발견자의 이름이 붙습니다(아종명과 발견자의 이름은 많은 문헌에서 생략하곤 합니다).
중요한 점은, 린네는 종명을 정하는 데 별다른 규칙을 두지 않았다는 겁니다. 순서대로 숫자를 붙여야 한다거나, 이름이 발견된 장소나 생김새를 묘사해야 한다거나 하는 언급을 하지 않았죠. 그로 인해 이명법은 매우 간편한 작명법이 됐고(이전 생물명은 생물을 적확히 표현하기 위해 매우 길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생물 묘사를 넘어선 전혀 다른 맥락이 끼어드는 것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다스 베이더 심해등각류’가 나타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린네의 선택으로 인해 좋거나 나쁘거나 이상한 학명의 세계가 열렸습니다.
이상한 학명 | 버섯에 굳이 스펀지밥 이름을?
여러분도 이상한 학명 이야길 농담으로 들어본적 있을지 모릅니다. 고릴라의 학명이 ‘고릴라 고릴라(Gorilla gorilla)’라거나, 고릴라의 아종인 서부저지고릴라의 학명이 ‘고릴라 고릴라 고릴라(Gorilla gorilla gorilla)’라거나요.
또 다른 사례로는 1977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견된 말벌인 ‘아하 하(Aha ha)’가 있습니다. 이 이름이 지어진 계기도 어이가 없습니다. 발견자였던 아놀드 멘케는 서호주 탐사에서 채집한 표본에서 신종 말벌로 보이는 곤충을 발견하고 “아하!”라 외쳤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 곤충학자 에릭 그리셀이 부정적으로 “하”라고 대답했다는 겁니다(부모님이 제 이름을 이런 식으로 지었으면 분명히 화가 났을 것 같은데요…).
이런 사례가 흔치는 않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유명인의 이름을 빌려와 학명을 짓곤 합니다. 소설이나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든, 살아있는 유명인이든 말이죠. 어떨 때는 생김새의 유사성이 작명의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2011년 5월 발표된 버섯 ‘스폰기포르마 스쿠아레판트시(Spongiforma squarepantsii)’는,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 유명한 만화 캐릭터 ‘네모바지 스폰지밥’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doi: 10.3852/10-433 말레이시아의 축축한 우림 구석에서 자라는 버섯의 모습을 보면 그 이름에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버섯의 자실체가 주황색 스펀지와 똑같이 생겼으니까요. 공기 중 수분을 빨아들이고, 물을 짜내면 원래 모양으로 돌아간다는 것까지 스펀지와 비슷합니다(이런 형태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이 학명은 “너무 경박하다”는 이유로 학술지 게재를 거부당했습니다).
단지 팬이라서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블랙핑크의 멤버 리사의 이름을 딴 태국의 꽃 ‘분가 라리사(Bunga lalisa)’, 팝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에게서 이름을 빌려온 노래기 ‘나나리아 스위프타이(Nannaria swiftae)’가 그런 예입니다. 심지어 2024년 12월에는 미 샤오치 중국 통렌대 교수팀이 신종 거미 16종의 이름에 대만의 유명 가수 주걸륜의 히트곡 이름을 붙였습니다. doi: 10.24272/j.issn.2097-3772.2024.023
학자로서 내가 애정하는 ‘덕질 대상’을 신종의 이름 아래 영원히 남겨둘 수 있다는 건 정말 영광스런 일일 겁니다. 리사와 테일러 스위프트의 이름을 신종에 붙인 두 연구원 모두 각각 보도자료에서 “(리사와 테일러 스위프트가) 박사 과정 동안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줬다”고 말했습니다. 미 교수도 주걸륜의 오랜 팬이었고요.
특이한 이름이 가져다주는 실용적인 장점 하나가 더 있습니다. 바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다는 겁니다. 미 교수는 중국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거미에 주걸륜의 노래 이름을 붙이면 과학 연구가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연구에 관심을 갖고 생태 보호를 돕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중국 소셜 미디어인 웨이보에서 미 교수팀의 연구와 관련한 해시태그가 2600만 뷰 이상을 기록하기도 했고요. 주걸륜 거미, 테일러 스위프트 노래기가 아녔다면 우리가 이 작은 동물들에게 신경이나 썼을까요? (그리고 제가 이런 기사를 쓰기나 했겠습니까?)

나쁜 이름 | 최악의 독재자를 떠올리는 딱정벌레
학명에 항상 괜찮은 이름만 붙는 건 아닙니다. 학명의 세계에서 최악의 작명으로 항상 첫 손에 끌려나오는 동물은, 슬로베니아의 동굴에 사는 눈이 없는 딱정벌레입니다. 이 딱정벌레의 학명은 ‘아놉탈무스 히틀러리(Anophthalmus hitleri)’죠. 그렇습니다. 나치 독일의 지도자, 히틀러를 경애하던 오스트리아의 아마추어 곤충학자 오스카어 샤이벨로가 1937년에 붙인 이름입니다.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2년 전의 일이었죠.
공과를 가리기 힘든 살아있는 인물 중에도 비슷한 논란을 일으킨 작명이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이름을 딴 나방 ‘네오팔파 도널드트럼피(Neopalpa donaldtrumpi)’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와 멕시코 바하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신종 나방을 발견한 곤충학자 바즈릭 나자리도 트럼프의 팬이었던 것일까요?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논문은 “나방의 머리에 있는 비늘이 트럼프 대통령의 머리 모양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적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doi: 10.3897/zookeys.646.11411 더불어 논문은 “이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여전히 많은 미상 종이 서식하는 미국의 취약한 서식지를 계속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대중에게 더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고도 설명했습니다.
누군가는 히틀러 딱정벌레 같은 이름을 바꾸고 싶어합니다. 세계 최악의 독재자가 학명으로 남아있는 꼴을 두고보기 힘들다는 겁니다. 그러나 학명은 바꾸기 힘듭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일단 정해지면 바꾸지 않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든 히틀러 딱정벌레와 함께 살아야 할까요? 만약 정말로 누군가를 모욕하고 상처주는 표현이 어떤 연유로 학명에 남아있다면요?

좋은 이름 | 아프리카 명예 회복 위해 266년 만에 바뀐 학명
2024년 7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분류학의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습니다. 이곳에서 열린 제 20차 국제식물학회(IBC)에서 사상 처음으로 모욕적이라는 이유로 학명을 바꾸기로 결정한 겁니다.
변경의 대상이 된 단어는 ‘카프라(caffra)’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아랍어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어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지역에서는 흑인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적 표현 ‘kaffir’로 변형돼 오랫동안 쓰여왔죠. 문제는 아프리카에 사는 수많은 생물의 학명에 카프라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식물학자 기드언 스미스와 에스트렐라 피게레도는 2021년부터 학명을 바꾸자는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단순했습니다. 카프라에서 알파벳 몇 개를 빼서 ‘아프리카’라는 뜻이 담긴 ‘아프라(afra)’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언어학적으로야 단순한 문제였지만, 절차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3년 간 수많은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대부분은 ‘학명 시스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다른 학자들의 우려였죠. 결국 IBC에서 이어진 6일 간의 논의 끝에 학명을 바꾸는 안건은 351대 205로 통과됐습니다. 이로써 카프라라는 단어가 포함된 200종 이상의 식물, 균류, 조류 학명이 변경됐죠. 변화를 이끌어낸 장본인인 스미스는 네이처 아프리카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학생들이 “왜 모욕적인 의미가 내재된 이름을 가르쳐 주시나요?”라고 말하곤 했다”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자랑스럽게 아프리카의 ‘아카시아 아프라(Acacia afra)’나 ‘에리트리나 아프라(Erythrina afra)’에 관해 얘기할 수 있다”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명법이 도입된 이후로 266년 만에 처음으로 ‘모욕적’이라는 이유로 학명을 변경했으니, 이번 사건의 의미는 엄청납니다. 이 결정이 앞으로 더 많은 변화로 이어질까요?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IBC에서는 모욕적인 학명을 수정하는 새로운 규칙도 제안됐지만, 통과된 규칙엔 ‘2026년 이전에 지어진 학명은 변경할 수 없다’는 조항이 들어갔죠. 또 식물 이외의 다른 생물들의 명명 규칙 변경은 또 다른 위원회에서 논의해야 합니다. 현재 과학계의 학명 명명 규약은 동물, 야생식물과 조류와 균류, 재배식물, 세균, 바이러스, 총 다섯 가지로 나눠져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작이 중요한 법입니다. 세상은 바뀝니다. 인간은 깨닫기 힘들지만 종도 조금씩은 바뀝니다.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식물학회는 절대적으로 보이는 세상의 규칙도 조금씩 바뀐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새롭게 바뀐 학명 때문에 한동안 아프리카의 식물학자들은 번잡스럽고 번거로운 적응 과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혼란에 적응하는 만큼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