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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동키즈] “과학자의 현장은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과학고와 KAIST를 거치는 동안 주위의 과학자들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그렇게 만난 우리 세대 과학자의 삶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전자는 주로 하나의 연구 주제를 가지고 대학이나 연구소 같은 안정된 직장을 잡는다. 그 직장에서 남은 생 동안 자신의 연구 주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문제에 매진한다. 이들의 삶은 전통적 의미의 과학자에 가깝다. 후자는 주로 기업에서 실생활에 필요한 기술과 제품을 개발한다. 최근 과학의 연구 성과가 기술로 응용되는 주기가 짧아지면서, 과학과 기술의 구별이 희미해졌다. 나는 이들 역시 과학자라고 생각한다.

 

직업의 안정성도 이 두 그룹의 차이점이다. 전자에 속한 이들에 비해 후자에 속한 이들은 더 다양한 경험을 자의로, 혹은 타의로 하게 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정을 바라기에 많은 이들이 전자의 삶을 목표로 삼지만, 후자의 삶은 다양한 경험과 보상으로 이런 과학자들을 끌어당긴다. 나는 후자에 속했다.

 

 

핵융합과 양자컴퓨터의 유년기를 함께하다

 

초등학생 때는 수학을 잘했다. 지역의 수학경시대회에서도 곧잘 입상하곤 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과학고의 존재를 몰랐다. 그러다 그 3학년 여름방학 때 성적이 좋은 친구들이 모여 과학고 입시를 준비했고 덩달아 함께했다. 친했던 선생님 한 분은 당시만 해도 신생 교육기관이었던 과학고보다 내가 살던 지역의 명문고를 권하시기도 했다. 과학고에 진학했던 1991년만 해도 아직 그 선택의 결과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진학은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과학고에 수학을 잘하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물리는 모두에게 새로웠다. 1학년 3월의 물리 시험에서 괜찮은 성적을 받은 후로 물리는 내 정체성이 됐다. 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학문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 첫 만남은 대학 전공으로 이어졌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로 물리와 거리가 있는 분야들에서 일해왔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내 지적 능력과 업무 능력의 토대는 물리학의 논리와 통찰력이라고 생각한다. 

 

1997년에 KAIST의 석사과정에 입학해 핵융합을 연구하는 실험실에 들어갔다. 이때 과학동아와 가장 가까운 인연을 맺었다. 1998년 10월 과학동아에서 우리 실험실을 취재해 당시 실험실 막내였던 내 독사진이 실험실 소개 사진으로 실렸던 기억은 지금도 각별하다. 학부 때부터 도서관에서 과학동아를 읽는 것이 하나의 낙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매년 학교 도서관에선 신청을 받아 잡지 과월호를 나눠줬는데 책 좋아하는 학생들이 모여 마음에 든 과학동아 등을 점찍곤 했다. 

 

석사과정을 마칠 즈음 방황의 시간이 돌아왔다. 취업을 고민하며 몇 달을 흘려보내다 양자컴퓨터를 연구하는 실험실로 옮겨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이때를 생각하면 석사 시절 지도교수님께 아직도 죄송스럽다. 

 

공교롭게도 20여 년 전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핵융합과 양자컴퓨터는 요즘 많은 사람의 관심이 집중된 기술들이다. 그런데 이 두 기술의 이론적 기반은 20여 년 전의 시점에서 봐도 이미 오래전에 갖춰진 상태였다. 다만 내가 이 기술들을 배우던 당시에는 실험실에서 이론적인 가능성만 모색하는 단계였다. 그때만 해도 핵융합, 양자컴퓨터가 언제 실현되는지 질문이 나오면 “적어도 20년은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답하곤 했다. 학계에서 말하는 20년이란 자신들이 은퇴한 후를 뜻하므로, 결국 ‘언제 가능해질지 알 수 없다’는 의미였다.

 

 

LTE 기술 개발 현장에서 충격을 받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친구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다수가 삼성에 취업했고 해외로 박사후연구원을 나가기도 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이동통신이라는 전자공학의 한 분야를 연구하게 됐다. 마침 내가 양자컴퓨터 연구 중에서 양자통신이라는 관련 분야를 전공했고, KAIST 물리학과의 한 선배가 전자통신연구원에서 일하며 이동통신 분야를 접하고선 나 같은 양자통신 전공자를 찾고 있던 덕분이다. 

 

전자통신연구원에서 참여한 프로젝트는 바로 LTE 기술 개발이었다. LTE는 많은 이에게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좀 더 상세히 설명해보면, 통신 기술은 전 세계 통신 장비 회사·기관이 모여 공동 개발하고, 이것을 통신 표준을 개발한다는 뜻에서 표준화라고 부른다. 내가 속한 팀은 LTE 표준화에 참여했다. 

 

LTE 표준화 과정에 참여한 우리 팀은 6주마다 다른 나라의 표준화 팀들과 유럽의 한 도시에 모여서 월요일 아침 7시부터 금요일 오후 4시까지 하루에 14시간 이상 토론했다. 지난 5주 동안 서로 준비해온 기술을 발표하고 다른 이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경쟁 기술의 단점을 찾고, 다른 팀의 사람들을 설득하며 표결에 임했다. 이렇게 표결이 이뤄지는 곳에서는 물밑 작업이 빠지지 않는다. 한 기술이 LTE 표준에 포함되면 해당 기술을 가진 기업이 받을 수 있는 기술료가 엄청나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는 책략과 거래가 교차하며 다양한 국가의 팀들 간에 합종연횡이 일어났다. 다시 생각해도 흥미진진한 시간들이었다.

 

이런 생생한 현장을 경험하자 이들의 두뇌 싸움에 참여하고, 영어로 나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보다 영향력 있는 조직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보다 글로벌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회는 곧 찾아왔다. 당시 공동연구를 하던 미국 하버드대의 바히드 타록 교수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게 됐다. 한국 학술진흥재단의 지원금을 받아 30대 초반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미국으로 향했다.

 

새로운 분야를 탐험하는 물리학자의 삶

 

하버드대에서는 크게 세 가지 경험을 했다. 첫째는 강의. 가르치는 일은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고, 영어를 익히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둘째는 연구. 무선통신 이론과 당시 갓 부상한 사물인터넷(loT) 기술을 연구했다. 마지막으로 취업. 몇몇 회사의 면접을 봤고 잠깐씩 일하기도 했다. 또한 외국 언론의 기사를 한국어로 번역, 소개하는 ‘뉴스페퍼민트’라는 사이트를 창업해 현재도 운영 중이다. 미국에 오고 몇 년 후 영주권을 받아 이대로 미국에 살아야 할지 생각할 무렵, 한국에서 한 친구가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제안해 2015년에 귀국했다.

 

한국에 돌아온 2015년부터 6년 동안 내가 세운 회사를 포함해 네 곳의 회사에서 일했다. 산업 현장의 치열한 경쟁은 가장 첨단 영역의 기술을 시도하게끔 하는 원동력이다. 지금까지 헬스케어에 인공지능(AI)을 적용했고, 로봇, 블록체인, 가상현실(VR), 사물인터넷 기술 등을 연구했다. 그리고 2021년 말 투자업계에서 일하는 친구의 제의를 받아 지금은 투자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투자는 금융 분야이니 과학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하지만 이 업계에서 내가 하는 일은 예전과 비슷하다. 매일 첨단 기술의 동향을 파악하고, 우리가 투자한 회사에 도움이 될 기술을 찾으며, 새로운 회사에 관한 자료를 검토한다. 투자회사는 세상의 변화를 앞서가야 하며 21세기는 기술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로 이어지는 시기인 만큼, 이 변화를 신속히 따라가야 할 필요성은 투자회사도 다른 회사들 못지않게 매우 크다.

 

함께 박사학위를 받은 친구들 중에 여전히 물리학을 연구하는 소수의 친구가 있다. 20대를 좀 더 성실히 보냈다면 나도 그 세계에 참여했을지 모른다. 때로는 그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첨단 산업의 영역에서 일하는 기분은 학계에서 한 분야의 대가가 되는 것만큼이나 뿌듯하다. 늘 새로운 내용을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필요에 의한 선택이 예상치 못한 기쁨으로 돌아오는 것 역시 인생의 큰 재미라고 여긴다. 그 덕분에 이제야 눈앞의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됐다.

 

최근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가장 관심을 두고 있다.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얼마 전에는 ‘과학자가 말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 내용을 뼈대로 책도 쓰는 중이며, 유튜브도 시작해 볼 생각이다. 지금 생각하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품위있게 살자’이다. 품위있게 살기 위해서는 현재에 충실해야 하고,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물론 어떤 일을 해야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안의 판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과학적 관점의 자기계발 원칙들을 제안할 생각이다. 

 

2023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글 및 사진

    이효석 소리애셋 최고기술책임자(CTO) 
  • 에디터

    라헌
  • 디자인

    이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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