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어려워요
흔히 인공지능이라고 하면 논리적이고 냉철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감정을 느끼는 인간과 논리적인 인공지능의 대립은 이제 SF에서는 낡은 클리셰가 됐죠.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이라면 인간처럼 복잡한 심리를 지닐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인공지능의 심리에 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요? (※편집자 주. 본문은 해당 작품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다면 먼저 작품을 찾아보기를 권합니다.)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히치하이커)’는 영국의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코믹 SF소설입니다. 소설은 모두 6권이 나왔고, 영화와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죠.
소설의 양이 많아 여기서는 2005년에 나온 영화를 기준으로 소개하겠습니다. 하지만 진면목을 느끼려면 반드시 소설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이야기는 아서 덴트라는 한 영국인이 자신의 집이 철거당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시작합니다.
알고 보니 지구는 곧 철거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초공간 고속도로를 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초공간 고속도로를 건설하러 온 보곤족은 이 계획이 알파 센타우리에 있는 관청에 50년 전부터 걸려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지구를 철거해 버립니다.
다행히 아서는 포드의 도움으로 지구가 파괴되기 직전에 보곤족의 우주선에 히치하이킹을 합니다. 그리고 붙잡혀서 우주로 내동댕이쳐지는데, 다시 ‘순수한 마음호’라는 우주선에 구조됩니다. 여기에는 은하계 대통령 자포드 비블브락스와 아서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지구인 트리샤, 그리고 로봇 마빈이 타고 있습니다.
자포드는 ‘깊은 생각’이라는 컴퓨터를 만나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마빈은 로봇이면서도 우울증에 빠져있습니다. 어떻게 말을 걸어도 우울하고 기운 빠지는 대답만 늘어놔서 상대하는 사람으로서는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험 도중 트리샤는 ‘모든-관점 총’이라는 무기를 얻습니다. 이 총을 맞은 사람은 이 총을 쏜 사람의 관점에서 상황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마침내 일행은 백업 지구 마크2에 있는 아서의 집에 모입니다. 아서는 지구를 주문한 외계인을 만나는데, 바로 생쥐입니다. 아서는 뇌를 빼앗길 위험에 처했다가 간신히 생쥐를 눌러 죽이고 벗어납니다.
그때 보곤족이 은하계 대통령인 자포드를 구하겠다며 쳐들어오죠. 위기의 순간에 우울증 로봇 마빈이 모든-관점 총으로 보곤족을 쏘자 보곤족은 우울증에 걸려서 모든 의욕을 잃고 맙니다. 결국, 지구는 백업을 이용해 원래 상태로 돌아오고 아서 일행은 우주 저편의 레스토랑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황당할만큼 이리저리 튀는 이야기가 특색이기 때문에 줄거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결말로 건너뛰었지만, 직접 보시면 더 재미있습니다.
● 사고
‘사고’는 폴란드의 SF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의 단편 소설입니다. 렘은 영화계 거장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영화로 만든 소설 ‘솔라리스’를 쓴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사고는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에 출간된 책 ‘우주비행사 피륵스’에 실려 있습니다. 피륵스라는 인물이 우주사관학교 생도에서 베테랑 선장이 되기까지 겪는 여러 일을 모아 놓은 연작 단편집입니다. 이 단편에서 피륵스는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다가 실종된 인공지능 로봇, 아니엘을 찾아 나섭니다.
피륵스는 아니엘을 찾아나섭니다. 아니엘은 암벽이 있는 산악 지대를 조사하게 돼있었습니다. 피륵스는 아니엘이 명령을 거부했을 가능성과 사고를 당해 망가졌을 가능성 등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둘 다 가능성이 낮습니다.
피륵스는 아니엘의 가방과 탐사 장비를 발견합니다. 전부 멀쩡합니다. 데이터도 완전한 상태입니다. 묘하게도 아니엘만 어디론가 사라진 것입니다. 피륵스는 로봇이 남긴 흔적을 꼼꼼하게 찾아 아니엘의 행방을 추적합니다.
마침내 피륵스는 암벽에서 아니엘이 남긴 흔적을 발견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암벽을 타고 올라간 것입니다. 피륵스의 동료들은 아니엘이 오작동을 일으켰다고 주장합니다. 동료들은 어차피 데이터는 있으니 그냥 떠나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피륵스는 아니엘을 두고 갈 수 없다며 암벽을 올라가 찾아보기로 마음먹습니다.
굉장히 가파른 암벽에 매달린 피륵스는 출발점에서 수백m 올라간 곳에서 아니엘을 발견합니다. 안타깝게도 아니엘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암벽을 오르다 수백m를 추락했던 겁니다. 웬만한 추락은 버틸 만큼 몸체가 튼튼했지만, 수백m의 추락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피륵스의 동료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아니엘의 긴급 탈출 장비도 발견했습니다. 암벽에 오르기 전에 아니엘이 버리고 간 것입니다. 이들은 정황으로 미뤄볼 때 아니엘이 오작동을 일으킨 게 분명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피륵스는 생각이 다릅니다. 피륵스는 아니엘이 생각보다 창조주인 인간을 더 많이 닮았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아니엘이 암벽을 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겁니다. 진심으로 암벽에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탈출 장비도 버린 것이라고요. 이제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된 아니엘의 마음에 관해 생각하며 피륵스는 떠날 준비를 합니다.
● 인공지능의 충동은 오류일까?
인공지능의 학습과 발달 과정을 연구할 필요
‘산을 오르는 건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을 오르는 데 다른 무슨 이유가 있겠냐는 거죠. 그냥 거기 있으니까 올라가 보고 싶어진다는 겁니다. 사실 목숨을 걸고 높은 절벽이나 산꼭대기를 기어오르는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상에 올라가면 짜릿한 기분을 느끼겠지만, 왜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지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죠.
사람은 때때로 생존과 무관한 욕망을 느낍니다. 그 욕망을 충족하려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기이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은 소소한 취미 생활을 즐깁니다. 뭔가를 수집하기도 하고 괜히 몇 시간씩 달리기도 하죠. 목숨을 내걸고 하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고층 건물을 맨손으로 기어오르거나, 낙하산 하나만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거나, 산소통도 없이 바닷속으로 잠수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기도 합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살다 보면 매사에 의욕이 없는 사람도 보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걱정이 없을 팔자 같은데 정작 본인은 사는 게 재미없다는 사람도 있죠. 혹은 어떤 문제 때문에 우울증이 심하게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뭔가에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요.
이렇게 사람은 살아가면서 다양한 심리 상태를 겪습니다. 만약 인공지능이 사람과 비슷한 수준에 오른다면 그 인공지능도 사람처럼 다양한 기분과 욕망을 느낄까요?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등장하는 로봇 마빈은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있습니다. 늘 신세 한탄이나 하면서 주변 사람까지 복장 터지게 만듭니다. 소설 ‘사고’에서도 피륵스의 추측일 뿐이지만, 아니엘은 임무를 마친 뒤 시간이 남자 눈앞에 있는 암벽을 오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낍니다. 진정한 도전이 되도록 안전장치까지 버리면서요.
정말로 인공지능도 산에 오르거나 공중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까요?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도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인공지능이 있을 때 우리는 인공지능이 느끼는 그 충동을 오류라고 정의해야 할까요? 아니면 충분히 발달한 인공지능의 자연스러운 심리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학습을 하며 발전한다면 그 과정에서 주변 환경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발달하는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를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실제로 발달심리학이나 신경과학 같은 분야에서 나온 이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런 연구 분야를 ‘발달로보틱스’라고 하죠.
미국의 SF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심리학이라는 가상의 학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인공지능 로봇의 성격과 행동을 연구하는 분야로, 수학과 심리학이 융합된 형태입니다. 로봇의 행동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로봇 시리즈’의 주요 소재입니다.
미국의 신경과학자이자 인공지능 연구자인 재커리 메이넨은 2018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린 한 인터뷰에서 인공지능도 우울증에 걸리거나 환상을 볼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doi: 10.1126/science.aat8056 폭넓은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 두뇌의 메커니즘을 인공지능이 차용한다면, 인간과 똑같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아직은 가상의 학문인 로봇심리학이 언젠가는 실제 학문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