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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컴퓨터 최강자는 누구?

이온트랩, 초전도, 반도체의 무림대결


무협영화에 자주 나오는 클리셰가 있다. 이제는 노인이 된 영웅이 과거를 회상하며 수염을 쓰다듬는다. 그리곤 수십 년 전 강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로 옆에서 본 고수의 이야기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듣는 사람은 물론 노인의 가슴까지 두근거리게 만든다. 지금 양자컴퓨터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바라보는 기자가 나중에 그런 심정을 느끼지 않을까. 역사가 바로 그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양자컴퓨터는 양자역학의 성질을 이용해 빠르게 연산할 수 있는 미래형 컴퓨터다. 1980년대부터 노벨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 등이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양자컴퓨터에서 활용할 수 있는 알고리듬(쇼어 알고리듬)도 일부 나오면서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세계 과학자들은 자신이 가장 잘 다루는 ‘무기’를 하나씩 손에 든 채 양자컴퓨터라는 강호에 모여들었다. 핵자기공명(NMR), 레이저, 반도체, 초전도체, 이온트랩(ion trap) 등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전자, 물리 기술이 다 모였다. 이들의 대결은 화려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들이 양자를 다루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연달아 실렸다. 화려한 조명을 받던 양자컴퓨터계는 2000년대 이후 잠시 정체기를 겪었다. 한두 개의 양자를 잠깐 분리한 뒤 스핀 등의 정보를 조절하는 초보적인 실험까지는 여러 팀이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오로지 소수의 ‘문파’만이 끝까지 강호를 지켰는데, 의리의 세 문파가 바로 이온트랩과 초전도, 반도체 양자점이었다.

“2000년대 중반이 되자 몇 가지 돌파구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면서, 연구자들 사이에서 ‘양자컴퓨터가 어쩌면 정말로 실현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미국에서는 국방부나 CIA, 국가안보국(NSA) 등에서 대형 연구과제를 시작했어요. 거듭된 평가를 거치면서 가장 유망하다고 생각되는 분야가 선택됐는데 그게 이온트랩과 초전도였습니다.”

정연욱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양자측정센터 책임연구원이 말했다. 여기에 전통적인 전자 산업의 강자 반도체까지 가세해, 양자컴퓨터계는 3강 체제를 이뤘다.



소꿉놀이를 하려면 손님이 지불할 돈으로 쓸 바둑알이나 조약돌이 있어야 한다. 양자컴퓨터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양자정보의 기본 단위가 되는 ‘양자비트(큐비트)’를 만들 조약돌인 양자가 있어야 한다(INSIDE 참조). 후보에는 광자나 이온, 원자핵, 전자 쿠퍼쌍(뒤에 설명) 등이 있다. 그리고 활용할 수 있는 양자의 ‘상태’로는 스핀, 전하량 존재 여부, 에너지 크기 등이 있다.

현재 양자컴퓨터 연구자들은 이런 양자를 하나씩 분리한 뒤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정보를 조작(일종의 읽고 쓰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컴퓨터를 만들 단계는 아니고, 양자컴퓨터에 이용할 양자정보처리 기술을 연구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일단 개별 양자를 분리해 빠르고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여러 개의 양자를 다루는 일까지 성공하면, 진짜 양자컴퓨터를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세 가지 방법 중 이온트랩은 원자 가장 바깥쪽 궤도에 전자를 하나만 남겨 둔 이온을 이용한다. 레이저를 비춰주면 가장 바깥쪽 전자(가장 에너지가 높은 전자)의 에너지가 변해 들뜨거나 안정한 상태를 오간다. 이 상태들을 각각 큐비트에 대응시킨다. 예를 들면 전자의 들뜬 상태를 1, 안정 상태를 0으로 두는 식이다. 사실 이온트랩 방식은 비전공자가 보기에 그나마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양자컴퓨터 기술이다. 이온을 말 그대로 새장 속의 새처럼 허공(사실은 자기장과 레이저 등으로 만든 정교한 공간)에 가두기 때문이다. 더구나, 믿기 어렵겠지만 큐비트를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다!
 
SK텔레콤 퀀텀랩이 연구 중인 이온트랩 실험실의 모습. 양자정보를 조작하기 위한 복잡한 레이저 장비가 보인다.
 
기자는 큐비트를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경기 분당으로 향했다. SK텔레콤 ICT기술원의 퀀텀랩이었다. 곽승환 팀장이 안내한 실험실 한구석에는 장막으로 둘러싸인 여느 가정집 안방 만한 방이 있었다. 장막을 걷고 안을 들여다 보자 거대한 기판을 닮은 테이블이 보였고, 그 위에 복잡한 레이저 장비가 보였다. 주인공인 이온은 초미세전자장비(멤스)로 만든 칩 모양의 ‘새장’에 갇혀 있다고 했다. 이 이온을 어떻게 본다는 걸까.

곽 팀장이 화면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정말 둥그스름한 이온의 모습이 보였다(동영상 참조). 물론 이온 자체를 확대해 본 건 아니고, 이온이 내는 형광(빛)을 레이저로 측정해 영상으로 바꾼 것이다. 컴퓨터로 레이저 강도를 조절하자, 트랩 안에 두 개 세 개의 이온이 잡히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보였다.

“전하를 지니고 있는 이온이기 때문에 서로 척력이 작용하고, 따라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죠. 그래서 하나하나 구분이 가능합니다. 그걸 레이저로 시각화할 수 있어요.”


SK텔레콤 퀀텀랩 김태현 박사가 조동일 서울대 교수팀과 공동 개발한 이온트랩멤스칩(➊). 그 오른쪽은 칩으로 포획한 이온의 모습.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➋). 그 아래는 중간에 있는 이온이 형광을 내지 않아 검게 보이는 모습(➌).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김태현 박사가 말했다. 미국 MIT에서 양자광학과 입자물리학을 공부한 뒤 듀크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으며 이온트랩을 연구한 전문가다. 그가 공부한 듀크대는 양자컴퓨터계의 ‘고수’중 한 명인 김정상 교수가 있는 곳이었다. 김 박사는 귀국 후 퀀텀랩에 들어왔고, 그 때의 경험을 살려 세계 수준에 뒤지지 않는 이온트랩 양자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조동일 서울대 교수팀과 멤스 기술을 이용해 이온트랩 칩을 개발했고, 여러 개의 이온을 포획하고 그 모습을 시연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이 분야의 최고 고수들은 이온트랩으로 개별 이온을 안정적으로 포획하고 측정하며, 레이저로 정보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단계다. 여러 개의 이온을 포획할 수도 있고, 이들 사이에 얽힘(두 양자의 정보가 서로 관련이 있는 상태로 거리와 상관이 없다) 상태를 걸어주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이온트랩은 양자를 아주 오래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되도록 교란에 잘 견디며 오래 유지하는 양자를 만드는 일은 양자컴퓨터 연구자들의 숙원이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우리 실험실에서도 하나의 이온을 어렵지 않게 하루 이상 유지할 수 있다”며 “일부 연구팀의 경우 몇 달씩 같은 이온으로 실험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이온트랩 방식은 세계적으로 가장 발전한 양자컴퓨터 기술이다. 양자컴퓨터의 핵심인 큐비트를 만들고 측정하는 일에 가장 큰 성과를 내고 있고, 또 높은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이 기술의 선구자인 와인랜드 박사 등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물론 진짜 컴퓨터를 만들기까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거대한 레이저 장비를 작게 만드는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며, 기술 도약으로 해결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이온트랩 방식은 성능 면에서 현재 최고입니다. 앞으로도 발전할 거예요. 하지만 최근에는 후발주자인 초전도 방식의 추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정연욱 박사는 “꼭 제가 초전도를 연구해서 하는 말은 아니고…”라며 미소를 지었다. 초전도 방식은 절대온도 0도(0K) 부근에서 물질의 저항이 사라지는 초전도 현상을 이용한다. 여기에는 ‘조셉슨 접합’이라는 전자소자를 이용한다. 조셉슨 접합은 두 개의 초전도체 사이에 얇은 절연체를 끼운 소자다. 원래는 절연체 때문에 안에 전류가 흐르지 않아야 하지만, 초전도체에서는 터널링이라는 양자역학적 현상 때문에 전류가 흐른다. 전류는 두 개의 전자가 쌍을 이루는 ‘쿠퍼쌍’이라는 형태로 흐르는데, 이 쿠퍼쌍이 양자정보를 유지하고 전달할 수 있다. 이 정보를 마이크로파로 조작하면 큐비트로 활용할 수 있다.
 

초전도 큐비트의 세계 최고수 중 한 명인 미국 UC산타바바라의 존 마르티니스 교수가 개발한 장치들.
이온트랩과 달리 큐비트는 눈으로 볼 수 없다.

현재 양자컴퓨터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보처리 기술의 조건은 두 가지다. ‘처리한 양자정보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느냐(양자의 수명)’와, ‘양자의 정보를 얼마나 신속하게 바꿀 수 있느냐(양자의 조작 속도)’다. 여기에 이 둘을 조합한 수치 즉 ‘양자 하나로 최대 몇 번의 조작을 할 수 있는가(양자 수명 당 큐비트 조작 횟수)’ 역시 중요한 지표가 된다. 초전도 방식은 최근 이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십수 년 전만 해도 하나의 큐비트로 10번 정도밖에 연산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초전도 큐비트는 이후 3년마다 결맞음시간(양자정보를 유지하는 시간)이 10배씩 늘어났지요. ‘무어의 법칙’을 능가하는 폭발적인 속도예요. 지금은 수천~1만 번까지 양자 연산을 하는 단계가 됐습니다. 이 정도면 기초적인 양자 알고리듬을 시연할 수 있는 수준이에요.”

정 박사는 또 “양자정보를 읽고 조작하는 신뢰도 면에서 최근 초전도 큐비트가 이온트랩을 능가했다는 UC산타바바라 연구팀의 발표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정 박사의 안내에 따라 새로 만든 극저온 실험실에 내려갔다. 수 년째 정 박사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 박정환 박사가 한창 실험 기기를 조율하고 있었다. 큐비트는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여기 있다”며 칩을 가리켰지만, 눈에 뭐가 보일 리는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극저온 장비였다. 초전도 현상은 0K(절대영도) 부근의 극저온(0.007K)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저온 상태에서 주파수가 높은 마이크로파를 이용해 큐비트를 조작한다. 과거에는 어려운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극저온 기술이 발전해 큰 어려움 없이 해나가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다양한 방식의 초전도 양자컴퓨터 회로를 개발하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성능은 놀라운 속도로 개선되고 있다.
 

 

안도열 서울시립대 우리석좌교수(전자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는 초창기부터 국내 양자컴퓨터 분야를 이끌어온, 이 분야의 개척자다. 1998년부터 연구단을 꾸려 반도체를 이용한 양자 연산을 시도하고 있다. 반도체 안에는 자유전자가 있는데, 특수한 방법을 이용하면(반도체 자체를 작게 만들거나, 음전하를 띠게 한 수십 nm 크기의 초미세 금속 구조를 만든다) 자유전자를 가둘 수 있다. 이 자유전자는 마치 원자 속에 사로잡혀 있는 전자처럼 스핀 등의 특성을 자유롭게 보여줄 수 있다. 일종의 인공원자인 셈이다. 이 인공원자의 스핀을 전기신호(전압)를 이용해 제어하면 큐비트를 만들 수 있다. 이런 큐비트를 여러 개 만들어 얽으면 반도체 양자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

반도체 양자컴퓨터의 장점은 양자의 스핀 제어가 쉽고 집적화가 쉽다는 점이다. 양자 정보를 조작하는 속도 또한 빠르다. 하지만 조작하는 양자의 수는 2개(2큐비트) 정도로, 아직 이온트랩이나 초전도 방식에 비해서는 떨어진다. 이온트랩이나 초전도 방식에 비해 반도체 방식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반도체 분야는 혁신으로 단련된 분야다. 새로운 기술이 나와 판도를 바꿀 가능성을 무시하기 힘들다. 서울시립대 정보기술관 지하에 마련된 안 교수의 실험실에서는, 지금도 이런 혁신을 바라는 연구자들이 초미시 세계의 꿈을 꾸고 있다.
 
상용 양자컴퓨터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캐나다 ‘D-WAVE’사의 컴퓨터. 그러나 진짜 양자컴퓨터가 아니라 일부 특성을 활용한 시뮬레이터라는 게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최근 관련한 논란이 ‘사이언스’에서 제기됐다 (과학뉴스 참조).
 
반도체에는 여러 방식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방식은 반도체 안의 전자를 고립시켜 스핀을 이용하는 방식. 사진은 ‘사이언스’에 실린 예로, 흰 원이나 원화살표 부분에 전자 스핀 정보가 담긴다.


‘내가 양자컴퓨터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작년 3월, 미국 학술지 ‘사이언스’는 양자정보처리 특집을 마련했다. 양자컴퓨터의 기초 기술 중 가장 ‘핫’한 세 분야를 나란히 소개한 기사였다. 바로 이온트랩, 초전도, 반도체(정확히는 반도체 기반의 스핀트로닉스)였다. 모두 한국이 기초 연구를 하고 있는 분야다.

강호에 모인 세 고수는 자신의 장기를 펼칠 준비가 돼 있다. 하지만 아직은 맞대결보다는 각자의 무공을 더 닦을 때인 것 같다. 세 분야는 각기 장점과 단점이 있고, 어느 한 분야도 다른 분야를 압도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무협 영화라고 단 한 명의 영웅만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영웅들이 서로 무공을 가르쳐주며 같이 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힘을 합해 공통의 적을 물리치기도 한다.

양자컴퓨터의 고수들은 어떨까. 적일까, 혹은 같은 편일까.

2014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윤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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