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름이 없소. 누군가의 꽃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 존재마저 없는 건 아니오.”
도시의 전광판이 모두 ‘그 남자’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전광판을 무단으로 차지한 ‘그 남자’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공개적으로 욕보였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남자의 뒤에는 일주일 전군이 잃어버린 최신식 폭탄이 줄지어 쌓여 있었다. 금속 탐지기에 걸리지 않고, 특수한 파장의 빛을 받으면 폭발하는 폭탄이다. 전광판 속 그 남자가 말했다.
“빛이 있으라(fiat lux).”
잠시 후 새하얀 섬광과 함께 전광판이 어둠으로 가득 찼다.
“신형폭탄이 아직 시제품이라 불량률이 높다는 데 희망을 걸어봅시다.”
이 말과 함께 팀장은 브리핑을 마쳤다. 하지만 대테러지원팀 남은욱* 요원의 머릿속에는 불길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테러범은 더 강력하고 확실한 폭탄 대신 왜 불안정한 시제품을 대량으로 훔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효율이 떨어진다.
‘그 남자는 혹시 폭탄을 터뜨리지 않고도 올바르게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걸까?’
은욱은 대학교 양자역학 시간에 배운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비밀무기 : 간섭계
신제품 폭탄이 불량품인지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직접 광자(빛)를 쪼여보는 것이다. 만약 폭탄이 불량품이라면 폭발하지 않을 것이고, 정상이라면 폭발할 것이다. 하지만 정상 폭탄을 검사 도중에 다 폭발시켜서는 곤란하다.
‘간섭계를 쓴다면 폭탄을 터뜨리지 않고도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은욱은 대학생 시절 자신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던 간섭계(왼쪽 그림)를 떠올렸다. 간섭계란, 하나의 광원에서 나온 빛을 두 갈래 이상 나눈 뒤 다시 만났을 때 일어나는 간섭현상을 관찰하는 기구다. 간섭계 속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늘 일어났다. 예를 들어 광원에서 나온 하나의 광자는 위로 이동하거나 수평으로 이동하는 2개의 경로(두 경로의 길이는 같다)를 동시에 지날 수 있다. 이런 이상한 상황을 양자역학에서는 ‘중첩상태’라고 한다.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가 중첩상태의 유명한 예다.
간섭계의 끝에 있는 2개의 검출기(A와 B)에서는 다시 한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마지막 분광거울을 지난 광자가 각각 50%의 확률로 A와 B에 도착해야할 것 같다. 하지만 광자는 검출기B에만 100% 도착했다. 중첩상태에서 생기는 간섭현상 때문이다. 아무것도 검출되지 않은 쪽에서는 파동의 마루와 골이 서로 만나 빛과 빛이 만났음에도 어두워지는 상쇄간섭이 일어난 것이다. “이중슬릿 실험으로 유명한 영국 물리학자 토머스 영도 상쇄간섭을 동료학자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간섭현상은 광자(빛)의 중첩상태가 깨지는 순간 사라진다. 중첩상태가 깨질 때는 광자의 위치 정보를 알아냈을 때다. 토머스 영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볼 수 있는 간섭무늬도 빛이 2개의 슬릿 중 어느 쪽을 통과했는지 알 수 있는 센서를 달아 정보를 얻는 순간 사라진다. 그런데 이 실험으로 어떻게 정상 폭탄을 가려낸다는 걸까.
정상 폭탄 확인 - 보았으나 본 것이 아니다
먼저 간섭계의 2개의 경로 중 한 군데에 폭탄을 놓는다(아래 그림 참고). 만약 폭탄이 불량이면 광자는 자유롭게 폭탄을 지날 수 있다. 이 경우, 폭탄을 놓지 않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광자는 2개의 경로 중 어느 쪽으로 이동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는 ‘중첩상태’가 되고 간섭현상 때문에 검출기B에서만 광자가 검출된다.
정상 폭탄을 놓는다면 어떨까. 광자가 만약 아래 경로로 흐른다면 폭탄이 터진다. 아까운 폭탄 하나를 잃은 것이다. 눈물이 나지만 어쩔 수 없다. 반대로 광자가 위쪽 경로로 이동한다면 폭탄은 터지지 않는다. 그리고 ‘광자가 아래 경로로 이동하지 않았다’는 전에 없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 결과, 광자가 두 경로를 모두 지날 가능성을 가지는중첩상태가 깨지고 간섭효과 역시 사라진다. 정보를 얻는 것(관측)이 커다란 의미를 갖는 양자역학의 독특한 성질 덕분이다.
간섭효과가 사라졌기 때문에 두 번째 분광거울에 도착한 광자는 검출기 A와 B에서 각각 50%의 확률로 검출된다. 이중 A에서 광자가 검출되면 폭탄이 반드시 정상이란 뜻이다. 폭탄이 정상이 아닐 때엔 앞서 말한 중첩에 의한 상쇄간섭 때문에 절대로 광자가 검출기A에 도착할 수 없다. 광자가 첫 분광거울에서 위쪽 경로를 택해 폭탄을 피할 확률이 50%, 두 번째 분광거울에서 검출기A로 향할 확률이 50%이므로, 정상 폭탄을 터뜨리지 않고 정상인지 확인할 수 있는 확률은 두 확률을 곱한 25%다.
만약 검출기 B에서 광자가 검출될 경우에는 폭탄이 불량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앞서 말한 불량일 때와 결과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광자가 검출기 B에서만 검출된 폭탄을 모아 무한히 검정하면 전체 폭탄 중 33%의 정상 폭탄을 골라낼 수 있다.
죽음의 바코드
‘그렇게 힘들게 폭탄을 골라내서 뭘 하려는 거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오늘은 9월 10일 토요일(지금은 바야흐로 2022년). 잠실에서 야구경기가 있다. 잠실 경기장은 3만 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은욱은 치밀한 작전 끝에 잠실 경기장에서 폭탄을 터뜨리려는 테러리스트 일당을 붙잡았다. 하지만 일당은 그 남자의 정체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날 밤 비상본부를 뜬 눈으로 지키던 은욱은 ‘그 남자’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바로 텔레비전이었다.
“낮에 있었던 일은 그저 예고편이었지. 내 그대들의 도시에 ‘죽음의 바코드’를 남기리라.”
그 순간이었다. 서울 상공을 날아가던 정체불명의 비행기가 신형 폭탄을 빌딩 숲 위로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이 많은 폭탄을 어떻게 원격으로 폭파시키려는 것일까. 신형 폭탄은 오로지 특수 파장의 빛을 받아야 폭발한다. 설상가상으로 지금은 밤이다.
“따르르릉.”
때마침 팀장 자리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팀장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인공위성의 태양 전지판을… 보라는군.”
상황실의 모니터에 인공위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태양 전지판이 클로즈업 되자 면도날 자국처럼 보이는 틈새가 반짝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욱이 중얼거렸다.
“토머스 영의 이중슬릿…”
중첩상태를 깨뜨리려면
그 남자는 해킹한 다른 위성을 이용해 현재 낮인 곳의 햇빛을 끌어왔다. 빛의 파장을 폭탄을 터뜨릴 수 있도록 변조하고, 마지막으로 위성의 태양전지판에 낸 이중슬릿을 통과시켜 도시 위로 간섭무늬를 비추려 하고 있었다. 그리하면 무작위로 살포된 폭탄들이 빛의 간섭무늬를 받아 폭발하고, 마침내 ‘죽음의 바코드’가 완성되리라.
위성은 이미 지상과 연결이 끊겨 조종이 불가능했다. 지면에 퍼져있는 폭탄은 너무 많아 전량 회수가 불가능하다.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중첩상태를 깨트려야 합니다. 빛이 두 개의 슬릿 중 어느 쪽으로 나오는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면 간섭무늬를 최소화할 수 있어요. 아주 조금은 늦어도 좋습니다. 빛이 이중슬릿을 지나 도시로 날아오고 있는 도중이라도 가능합니다.”
은욱은 고배율의 망원경으로 위성을 관찰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아무 곳에서 관찰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광원과 슬릿이 일직선이 되는 곳에서 관찰해야만 슬릿을 통과하는 광자의 위치 정보를 최대한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
정보를 알아내면 양자역학의 특성상 중첩상태가 깨지고 간섭현상도 줄어든다. 이중슬릿을 통과한 빛은 간섭무늬 형태로 넓게 퍼지는 대신 망원경이 있는 곳으로 집중되기때문에 그곳의 폭탄만 제거한다면 피해를 막을 수 있다. 차에 올라 탄 은욱은 망원경을 설치하라고 명령한 곳으로 급히 향했다. 과연 은욱은 위기에 처한 도시를 구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