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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만에 돌아온 고려 시대 보물선

바다에 잠들었던 유물이 깨어난다

바다에 나갔던 어민이 그물에서 항아리 조각을 하나 발견했다. 은은하고 신비스러운 푸른빛과 섬세한 문양이 심상치 않아 신고해 보니 고려청자란다.전문가가 수중장비를 동원해 현장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보물선이 깊은 잠에서 깨려는 듯꿈틀대고 있었다. 800년 전 이 바다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바다에 나갔던 어민이 그물에서 항아리 조각을 하나 발견했다. 은은하고 신비스러운 푸른빛과 섬세한 문양이 심상치 않아 신고해 보니 고려청자란다. 전문가가 수중장비를 동원해 현장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보물선이 깊은 잠에서 깨려는 듯 꿈틀대고 있었다. 800년 전 이 바다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11월 3일, 해저에서 유물을 발굴하고 있는 현장을 찾았다. 충남 태안군 안흥항에서 다리를 건너 신진도로 넘어가면, 섬 끝자락에 다리가 하나 더 나타난다. 그 다리와 이어져 있는 자그마한 섬, 마도로 들어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예상외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도, 아무 것도 없었다. 해변에 깔린 주먹만 한 소라 껍데기들과 연두색, 분홍색을 띠는 둥근 조약돌만이 이곳이 마도의 끝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곳에서 ‘달달달’ 소리를 내는 고무 모터보트에 올라탔다. 보트가 너무 빠른 탓인지 파도가 심한 탓인지, 간당간당하게 앉아 몸을 들썩이기를 10여 분, 드디어 수중 발굴 현장인 바지선(동력 없이 떠 있는 평평한 배)에 도착했다.



아슬아슬 목숨 건 바다 위의 작업실



올해 발굴하는 보물선은 마도 2호선(수심 약 15m)이다. 지난 해 발굴 작업을 끝낸 배는 마도 1호선(수심3~8m), 내년에 작업을 시작할 배는 마도 3호선(수심 3~8m)이다. 바다에서 발견된 오래된 선박(고선박)은 대개 출토된 지역의 이름을 붙인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 연구원들은 배가 잠겨 있는 바다로 열흘 동안 출퇴근을 했다. 그들 중에는 잠수복을 입고 직접 바다로 뛰어들어 유물을 발굴하는 사람도 있었고, 바지선 위에서 잠수부에게 발굴 작업을 지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은 수백 년 된 배에서 어떤 ‘보물’이 올라올지 기대에 부푼 기자도 있었다. 바지선에 임시로 꾸며놓은 연구실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설치돼 있다. 화면에는 깊은 바닷속 진흙이 보인다. 화면 하단으로 잠수부의 손이 보인다. 길쭉한 장비를 들고 진흙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옆쪽에 돌출돼 있는 진흙도 제거해 주세요.” 양순석 학예연구사가 마이크를 잡고 지시했다. 화면이 갑자기 옆으로 이동하더니 다시 진흙이 장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화면에서는 물방울이 솟아나고 뽀글뽀글 소리도 들린다. 후우후우~, 누군가의 숨소리도 들린다.







































바다 위에서도 해저 발굴 현장을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보고 들을 수 있다. 바지선에 있는 수중영상 통신장비와 잠수부가 머리에 쓴 잠수 마스크(풀페이스)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풀페이스의 이마 부분에는 카메라, 턱 부분에는 조명이 달려 있고, 안쪽으로는 마이크와 스피커가 붙어 있다. 심해에서 일어나는 모습과 소리를 바지선에 실시간으로 전달한다. 발굴 작업은 잠수부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작업이다. 바지선에 있는 사람은 사고를 막기 위해 모니터에 집중해야 한다.



잠수부들은 진공청소기와 비슷한 에어리프트를 사용해 물과 함께 진흙을 빨아들인다. 진흙 바닥에 묻힌 유물을 바깥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다. 빨아들인 진흙은 파이프를 타고 바지선으로 올라와 배 반대쪽 바다로 다시 떨어진다. 유물의 모습이 드러나면 잠수부가 인양 백에 넣어 가져온다. 대개 도자기나 그 파편, 숟가락, 솥 같은 물건이라 손으로 안고 올라오기도 한다.



유물을 모두 건져내면 선박을 수면으로 끌어낸다. 배를 인양할 때는 대형 크레인을 이용한다. 선체가 깨지지 않게 배를 떠받들 수 있는 구조물을 만들어 한 번에 끌어올릴 수도 있지만, 고대 보물선은 대개 바닷속에서 선박을 해체해 인양한 다음 땅위에서 복원한다.



화려한 무역선 드나들던 서해의 ‘로렐라이’



짠물과 해양생물만 존재할 것 같은 검푸른 바다에서 유물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얼마나 흥분했을까. “몇 년 전 어민이 주꾸미를 낚다가 도자기 조각을 발견했다던 뉴스 기억나세요? 그때 과학자들이 해저에 묻혀 있던 도자기 2만 4000점을 발굴했습니다. 거기가 태안 안흥항에서 3~4km 떨어진 바다였지요. 마도에서도 처음 보물선을 발견한 건 어민이었습니다.” 양 연구사는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보물선이 처음 드러났던 때를 이야기했다. 마도 1호선은 2007년, 마도 2호선은 2008년에 발견됐다.







유물이 발견된 바다 근처를 조사하면 ‘대어’를 낚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커다란 배 한 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연구원들은 바다 위에 바지선을 띄워 놓고 임시 작업실을 차린다. 이런 고선박 안에는 당시 싣고 가던 온갖 유물들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말 그대로 보물선이다. 지금까지 서해에서만 10여 척이 발견됐다. 전문가들은 아직도 수십 척이 더 묻혀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각종 특산품을 실은 무역선이 많이 다녔기 때문에 쇠로 만든 솥이나 청동 그릇, 수저, 해무리굽청자(11세기)와 상감청자(14세기) 같은 진귀한 보물들이 많이 나온다. 양 연구사는 “이곳이 남부지방에서 한양(조선의 수도, 지금의 서울)이나 개경(고려의 수도, 지금의 개성)으로 이동하는 항로에 속해 배들이 많이 다녔다”며 “안개가 자주 끼고 암초가 많은데다 해류 흐름이 험한 곳이라 배들이 자주 침몰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중국과 일본의 사신이나 상품을 나르던 배들은 남해에서 안면도, 태안 안흥항, 마도 앞바다를 지나 북쪽으로 이동했다. 마도 앞바다는 진도의 울돌목처럼 손꼽히는 난항 지역이다.









고선박이 항해했던 시대는 어떻게 추정할까. 배에서 나온 유물과 육지에서 발견된 것을 비교하거나 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측정하면 된다. 마도 1, 2호선은 도자기를 빚은 방식이나 선박 밑이 납작한 특징을 보아 고려 시대 선박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구체적으로 밝혀 준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다. 국내 수중 발굴 역사상 처음으로 죽간이 발견된 것이다. 죽간은 종이가 발명되기 전 글자를 기록하던 대나무 조각을 말한다. 마도의 고선박에서 나온 죽간에는 당시의 ‘택배 목록’이 적혀 있었다. 마도 1호선에서 발견된 한 죽간에는 ‘무신정권 대장군인 김순영에게 1208년 3월까지 배달해야 하는 상품을 1207년 12월에 싣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수백 년 곡물 보존한 진흙더미



바다는 발굴 작업을 하는 연구원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마도 선박에서 맨눈으로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보존이 잘 된 곡물류가 발견된 것이다. 벼와 메밀, 조, 피, 콩깍지 등이 나왔다. 오래된 침몰선에서 곡물이 발굴된 것은 국내에서 처음이다.



곡물의 모양과 크기는 현재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벼 줄기에 달린 낟알의 크기는 지금의 것보다 무척 작다. 양 연구사는 “육종 기술이 발달하면서 쌀알이 통통해졌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마도 선박에서 찾아낸 곡물의 DNA를 분석해 현재 곡물과 같은 품종인지, 곡물이 어떤 방향으로 개량됐는지 등을 분석할 예정이다.



지난해 발굴했던 마도 1호선에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원통형 나무토막이 발견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불을 지피려는 용도였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했지만, 발굴되는 갯수가 너무 많아 확실하지 않았다. 이 궁금증은 올해 마도 2호선을 발굴하면서 풀렸다. 선박 안에 놓인 화물 아래로 원통형 나무토막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양 연구사는 “나무로 배를 만들었던 그때 기술로는 바닷물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완벽하게 막지 못했다”며 “화물이 물에 닿아 썩지 않도록 받침대를 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나무토막에 짚을 깔아 도자기처럼 깨지기 쉬운 화물을 고정시켰다고도 주장한다.

 

나무로 만든 유물들이 어떻게 물속에서 800년 넘게 보존될 수 있었을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 차미영 전문위원은 “서해에는 갯벌이 많아 유물들이 진흙에 묻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식물성 유물이 바다에 가라앉으면 썩거나 물살에 휩쓸리면서 분해된다. 또 바다나무좀 같은 해양천공충류와 미생물들이 셀룰로오스 성분을 갉아 먹어 유물 표면에 구멍을 송송 낸다. 결국 마도 선박의 유물들은 진흙에 묻힌 덕분에 바닷물과 산소, 바다생물로부터 지켜질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쯤, 해저에서 작업하던 잠수부들이 바지선으로 올라왔다. 웬만한 작업들이 이미 끝나서인지 인양 백에는 도자기 파편 같은 돌 조각과 나무 조각만 들어 있다. 약 800년 전 이곳에서는 예기치 못한 험한 풍랑에 방향을 잃었거나 뿌리 굵은 암초에 부딪친 선박이 가라앉고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울음과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가득했을 이 자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하기만 하다. 이제 막, 호기심 많은 후손들에게 보물을 보여주기 시작한 바다에는 보물선 만큼이나 화려하고 진귀한 과거의 이야기가 용솟음칠 날만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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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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