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지갑을 어디다 뒀는지 통 생각이 안 나네~?

아, 잘 좀 생각해 봐요. 시간 없다니까요.

기다려 봐. 늙으면 다 이렇지 뭐~.



얼른 나가야 하니 빨리 찾아보라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직장인 김길수 씨는 요즘 들어 어머니가 자꾸 뭔가를 깜빡 잊어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탓이려니 했지만 김 씨는 혹시 몰라 하루 날을 잡아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다. 혈액 검사 결과 나온 병명은 알츠하이머병. 뇌간이라는 부위에서 알츠하이머병이 시작될 때 생기는 단백질 변화가 발견됐다고 의사가 설명했다. 김 씨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극초기인데다가 약으로 간단히 진행을 막을 수 있다는 말에 안도했다. 처방을 받아들고 병원을 나서던 김 씨는 알츠하이머병이 생각과 달리 어느새 그렇게 위험하지 않은 병이 됐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김길수 씨의 사례는 가상으로 꾸며 본 미래의 모습이다. 간단한 혈액검사만으로 아주 초기의 알츠하이머병을 진단하고 약으로 진행을 늦출 수 있는 미래가 정말 올까.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들 연구가 ‘인간 뇌단백질체 지도(Human Brain Proteome Atlas)’다. 국제프로테옴기구의 분과 모임인 ‘인간 뇌 프로테옴 프로젝트(HBPP)’ 주도로 진행하고 있는 연구로, 사람의 뇌에 들어 있는 단백질의 종류와 위치, 양, 기능, 질병의 진행 단계에 따른 변형과 같은 정보를 담은 뇌 지도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단백질이 주목받는 이유는 질병과 관련이 있는 단백질의 변화를 연구하면 질병의 발생이나 진행 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일찍 질병을 발견하고, 진행을 억제하거나 완전히 치료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약은 질병을 일으키는 단백질을 표적으로 삼기 때문에 단백질 연구는 신약 개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뇌단백질체 지도의 주요 목적은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처럼 고령화 시대에 큰 문제가 되고 있는 퇴행성 뇌질환을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이와 부위, 질병의 진행 정도에 따른 단백질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지도를 만들어 퇴행성 뇌질환과 노화의 진행 과정에 대해 연구할 예정이다. 여기서 나온 정보는 질병을 진단하는 데 쓰이는 ‘생물지표(바이오마커)’를 찾아내고, 표적으로 삼을 단백질을 확인해 치료용 단백질을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된다.



뇌단백질체 지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뇌조직 샘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구에 쓰려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채취한 뇌 조직과 그 사람의 병력 기록을 다수 확보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던 2007년 희소식이 전해졌다. 레아 그린버그 박사 이끄는 브라질의 뇌조직 은행이 50~70세의 브라질 백인 남녀의 뇌조직 1600여 개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인간 뇌 프로테옴 프로젝트의 공동위원장인 박영목 한국기초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그린버그 박사를 공동위원장으로 영입하고 뇌단백질체 지도 제작에 참가해 달라고 제안했다. 마침내 지난 3월 충북 오창에서 열린 워크샵에서 공식적으로 뇌조직을 공급받기로 하고 연구 방향의 기본틀을 마련했다.







9월 19~24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국제프로테옴기구 연례 학회에 참석한 박 박사와 헬무트 마이어 독일 보쿰대 교수, 미셸 살제 프랑스 릴대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워크샵을 열고 그 동안의 진행 상황과 향후 계획을 놓고 의견을 나눴다. 그 결과 뇌간(brain stem)과 해마(hippocampus)부터 분석을 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또한 말디-토프(MALDI-TOF) 질량분석기로 단백질의 위치 정보를 영상으로 나타내기로 정했다. 말디-토프 질량분석기는 현재 수 ㎛(1㎛=100만분의 1m)의 해상도로 단백질 분포 영상을 만들 수 있다. 질량분석기법의 대가인 리차드 카프리올리 미국 반데어빌트대 교수가 참석해 관련 내용을 발표했다. 본격적인 작업은 이르면 내년 초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가장 먼저 분석할 대상인 뇌간과 해마는 뇌에서 알츠하이머병이 시작되는 곳이다. 2년 전까지는 알츠하이머병이 해마에서 처음 시작된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2009년 그보다 더 이른 단계에서 뇌간에 단백질의 변형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이어 교수는 “현재는 퇴행성뇌질환을 아무리 빨리 진단해도 이미 병이 몇 년 이상 진행된 경우가 많다”며 “관련된 단백질을 모두 찾아내면 아주 초기 단계에서 병을 진단할 수 있는 생물지표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단백질의 분자량으로 종류를 알아내



뇌의 단백질체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뇌를 일정한 간격으로 나눈 뒤 그 안에 들어 있는 단백질의 종류를

파악해야 한다. 뇌 조직에 있는 단백질을 알아내는 데는 질량분석기가 쓰인다. 측정한 단백질의 질량을 화학 구조와 아미노산 서열을 바탕으로 계산한 분자량과 비교해 종류를 알아내는 원리다. 뇌단백질체 지도 계획에서는 주로 말디-토프 질량분석기와 푸리에전환 이온사이클로트론 공명(FT-ICR) 질량분석기를 사용할 계획이다.











질량분석기는 단백질을 이온화했을 때 질량과 전하의 비율을 이용해 단백질의 분자량을 계산한다. 그러나 전자를 쏘거나 화학 반응을 일으켜 이온을 얻는 기존의 방법은 기체에만 적용할 수 있어 고분자 물질인 단백질에 쓸 수 없다. 게다가 단백질은 열에 약하기 때문에 이온화 과정에서 분자가 파괴되기 쉽다. 1980년대 후반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이온화 기술이 등장했다.



1987년 일본 시마즈 제작소의 직원이었던 다나카 고이치는 레이저 광선을 흡수하는 유기화합물인 ‘매트릭스’를 이용해 단백질을 이온화하는 데 성공했다. 먼저 매트릭스와 단백질을 혼합해 평평한 금속판에 놓은 뒤 액체가 증발해 결정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 뒤 레이저를 쏘면 매트릭스가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단백질이 이온화된다. 한편 1989년에는 미국의 존 펜 버지니아커먼웰스대 교수가 전자분무이온화(ESI) 기술을 개발했다. 단백질을 용매와 섞어 높은 전압이 걸린 모세관을 통해 분무하면 전하를 띤 작은 방울이 된다. 이 방울이 분석기로 가는 동안 용매가 증발하면서 방울 내의 같은 극성끼리 반발해 더욱 미세한 방울로 나뉘는 원리다. 다나카와 펜 교수는 이 공로로 함께 2002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다나카의 경우 당시 대학만 졸업한 학사 출신의 회사원이 노벨상을 받았다고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나카가 개발한 방법이 바로 ‘말디’다. 말디는 매트릭스상 레이저 탈리 이온화(Matrix-Assisted Laser

Desorption Ionization)의 약어다. 얇게 뜬 조직 샘플에 일정한 간격으로 레이저를 쏘면 그 곳에 있는 단백질 종류를 알 수 있어 뇌의 한 단면을 영상 이미지로 만들어 낸다. ‘말디 질량분석 이미징’이라고 불리는 이 방법은 조직의 해부학적인 구조를 망가뜨리지 않은 채 단백질을 조사할 수 있다. 카프리올리 교수는 “눈으로 단백질의 분포를 볼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며 “말디를 이용한 영상 기술이 뇌단백질체 지도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기술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토프(TOF)는 ‘이온 비행 시간차(Time of Flight)’의 약자로 이온이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해 분자량을 계산하는 기술이다. 말디-토프 질량분석기는 이온화 기술로 말디를, 분자량 측정 방법으로 이온 비행 시간차 질량분석방법을 썼다는 뜻이다. 이온은 전기장 안에서 힘을 받아 움직이는데, 질량이 무거울수록 움직이는 속도가 느리다는 원리를 이용한다.



FT-ICR 질량분석기는 분자량 측정에 쓰는 장비로 현존하는 질량분석기 중에서 가장 정밀하게 질량을 측정할 수 있다. 말디이온화로 만든 이온을 강한자기장을 만드는 원통 모양의 장치에 넣으면 이온은 자기장 안에서 힘을 받아 회전한다. 이때 무거운 이온일수록 회전하는 속도가 느리므로 이를 이용해 분자량을 계산한다. 이온이 한 번 움직여 검출기에 도착하면 끝나는 이온 비행 시간차 방법과 달리 초전자 자석 통 안에서 계속 회전하게 만들 수 있어 오랫동안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자기장의 세기가 강해질수록 질량분석의 해상도는 더욱 높아진다.







첨단 장비 개발로 주도권 잡아



현재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FT-ICR 질량분석기가 있다. 만들어 내는 자기장의 세기가 15T(테슬라,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단백질의 분자량을 소수점 아래 넷째자리까지 정확하게 구할 수 있다. 기초연의 질량분석 연구부와 미국 국립 고자기장 연구소가 4년 동안 공동으로 연구해 2007년 개발에 성공한 이 장비는 한국이 뇌단백질체 지도를 만드는 국제 프로젝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기초연은 이 외에도 7T짜리 FT-ICR과 말디-토프 질량분석기도 보유하고 있어 뇌단백질체 지도를 만드는 데 다른 선진국보다도 유리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기초연의 박영목 박사와 유종신 박사는 2006년 11개국 20개 연구팀과 함께 인간 뇌 조직을 질량분석기법으로 분석해 세계적인 단백질체 학술지 ‘프로테오믹스’ 9월호에 발표한 바 있다. 당시 과학기술부의 국제공동연구사업비로 3년간 매년 8000만 원을 지원받은 이 연구에서 박 박사와 유 박사는 1500여 개의 단백질을 찾아냈다. 참여한 20개의 연구팀 가운데 가장 많은 수였다. 박영목 박사는 “처음에는 다른 나라의 연구팀이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가공하기 전의 순수 데이터를 우리가 제시한 방법으로 독일 연구팀이 직접 분석해 본 뒤에는 깜짝 놀라며 우리 분석의 신뢰성을 인정했다”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 연구 결과로 인해 박 박사는 인간 뇌 프로테옴 프로젝트의 공동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세계적으로도 뇌단백질체 지도에 거는 기대는 크다. 뇌단백질의 기능을 모두 밝히면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병, 다발성경화증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은 물론 다른 질병 연구에도 획기적인 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 학회에서도 다양한 질병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워크샵에서 만난 카프리올리 교수는 기자에게 “뇌종양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고, 뇌졸중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 미국국립보건원(NIH)의 다닐로 태글 박사는 “뇌단백질체 지도를 이용해 뇌졸중의 발병을 알려 주는 생물지표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로서는 뇌단백질체 지도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향후 뇌 프로테옴 연구에서 앞서 나갈 수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난치병을 진단하거나 치료하는 단백질의 특허를 획득해 바이오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있는 의·약학 분야의 격차를 줄일 수 있다.



뇌단백질체 지도는 만드는 데 최소 5년 이상이 걸릴 예정이다. 뇌는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유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체에서 가장 복잡한 기관이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릴 가능성도 많다. 쉽지 않은 작업인 만큼 완료한 뒤 얻을 수 있는 효과는 크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젊은이가 노인이 됐을 때는 치매란 천연두처럼 먼 옛날에나 있었던 병에 불과하며, 인류는 인체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기관인 뇌의 비밀을 꿰뚫고 있을지도 모른다. 1                                 

2010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고호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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