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태안군 앞바다에서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과 해상 크레인선이 충돌해 원유 1만 2547㎘가 유출된 사고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났다.
온 국민의 관심 속에 빠르게 제 모습을 찾아가는 듯 보였던 태안은, 아직 마르지 않은 검은 눈물을 닦고 있다.
“만리포 4km”
이정표를 지나치는 순간 하늘에서 눈이 나풀나풀 내리기 시작했다. 좁다란 국도 저 끝 너머 수평선이 살짝 보였다. 그동안 태안은 어떻게 변했을까.
만리포해수욕장에 도착하자 ‘누가 검은 바다를 손잡고 마주 서서 생명을 살렸는가’라는 제목의 거대한 시비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 뒤로 보이는 바다는 눈보라를 맞으며 온몸으로 일렁이고 있다. 검은 기름이 푸른 바다를 유린했던 그날의 기억을 새하얀 눈으로 완전히 지워버리려는 듯….
대부분 지역 오염에서 완전히 벗어나
“많이 깨끗해졌죠. 끝없이 퍼내고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제 모습을 다시 찾은 걸 보면 ‘태안의 기적’이라는 말이 실감나죠.
”
지난 12월 5일 만리포해수욕장에서 만난 한국해양연구원 임운혁 박사는 눈 내리는 바다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해양오염영향조사로 지난 1년을 태안에서 살다시피 했다.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자원봉사자 123만 명의 노력과 자연의 자정력에 기름때가 조금씩 씻겨가는 모습을 연구보고서에 담기 위해서였다.
태안 앞 바다는 얼마나 깨끗해진 걸까. 임 박사는 “유류 사고는 해양 특성에 따라 환경 피해 규모나 피해복구 기간이 달라진다”며 몇 가지 사례를 들었다.
해양 유류오염사고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1989년 미국 알래스카 엑슨 발데즈호 사고의 경우 사고 지역이 해수 유동이 적은 만인데다가 수온이 낮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고 해역에 기름찌꺼기가 남아 있다. 또 2006년 유조선 솔라1호가 좌초된 필리핀 중부 기마라스 인근 해역은 기름이 갯벌 지역에 유출돼 복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서해안은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해수의 흐름이 빠르며, 수온도 높은 편이라 자연복구가 빠른 편이었다. 임 박사는 “해수의 드나듦이 적은 천수만이나 가로림만 안쪽으로 기름이 들어갔으면 문제가 더 커졌을 텐데, 이를 사고 초기에 막은 일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국토해양부는 2008년 10월 ‘해양오염영향조사 2차 중간결과’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해안수질은 사고 9개월 이후 대부분 정상치를 회복했다. 기름량을 측정하는 기준 성분인 TPH(총석유계탄화수소) 농도가 사고 초기 720ppb(parts per billion, 10억분의 1)에서 2008년 9월 평균 3ppb로 240배 감소한 것. 태안 일대 해수욕장 15곳 중 구름포를 제외한 14곳은 지난여름 정상 개장했다.
임 박사는 “2008년 9월 이후 기상과 해류에 따라 기름 농도가 소폭으로 오르락내리락 했지만 해수 환경기준인 10ppb에는 한참 못 미쳤다”며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는 지역은 오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봐도 된다”고 말했다.
그럼 서해에서 잡힌 해산물은 먹어도 될까. 기름 유출 사고 직후 47ppb였던 어류체내 16종 PAHs(다환방향족탄화수소)는 사고 2~3개월 만에 평균 10ppb로 뚝 떨어졌다. 2008년 7월 오염이 심했던 신두리 굴양식장을 철거하면서 흘러나왔던 기름의 영향으로 잠시 19ppb로 높아졌지만, 이후 기름 피해가 없었던 보령 지역(16ppb)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신진대사가 활발한 어류뿐만 아니라 대사 능력이 떨어져 체내독성물질 배출이 늦은 굴도 2008년 7월 이미 사고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임 박사는 “인체위해성을 따지는 벤조피렌 등가치(BaP) 역시 어류와 굴 모두 위해성 기준인 3.35ng/g보다 30배 이상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며 “현재 서해안에서 나는 대부분 해산물은 먹어도 안전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생태계 영향,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게 문제


해수욕도 괜찮고 해산물도 괜찮다면 태안은 오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닐까. 임 박사는 “기름 오염이 사람에 미치는 영향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며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조사하고, 사고가 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데는 많은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기름 유출 사고가 나면 기름을 뒤집어 쓴 불가사리나 새의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며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급성오염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기름’을 제거하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나타나는 생태계 교란이다.
기름 성분이 먹이사슬을 통해 체내에 축적돼 나타나는 피해나 미량의 독성물질이 생명체의 유전자에 미친 영향은 수년에서 수십 년 뒤에 나타난다. 1989년 엑슨 발데즈호 사고의 경우 지역 어민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청어의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복이 안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일이 태안에서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해양오염영향조사 2차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4월 태안반도 해안 일대의 생물 평균서식밀도는 사고 전의 13~25%로 줄었다.
그 뒤 대부분 생물이 서서히 개체수가 늘고 있는 추세지만,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오염피해가 특히 심각했던 의항 신노루 지역에서 다년생 생물인 쏙이 대량 폐사했는데, 2008년 4월 개체수가 다소 늘었다가 2008년 7월 다시 절반 수준으로 줄어드는 일이 발생했다.
태안 일대 쏙의 오염영향 조사를 담당한 한국해양연구원 해양생물자원연구부 유옥환 박사는 “사고 초기에는 쏙의 성체들이 많았지만, 여름철에 성체들은 사라지고 쏙의 새끼들만 보였다”며 “이 현상이 기름에 의한 영향인지, 복잡하게 얽혀있는 생태계의 일면인지는 꾸준히 모니터링 해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박사는 “기름 유출 사고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피해 정도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아직도 땅 파면 기름 나와

태안 반도의 소근리, 구름포, 의항, 신두리 일대는 기름이 갯벌 속으로 스며들어 방제작업이 쉽지 않은데다가, 바닷물도 잘 드나들지 않아 자연복구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무인도 바위 틈 곳곳에도 아직 기름이 고여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일은 갯벌에 얼만큼 기름이 스몄는지 조차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장 연구원은 “외국의 경우 바다에 기름이 유출되는 사고가 나면 오염영향조사 기간을 최소 6년으로 잡는다”며 “총 연구기간이 5년 밖에 되지 않아 실질적인 연구 성과가 부족했던 1995년 여수 앞바다 시프린스호 사고를 교훈 삼아, 장기적인 생태계 모니터링 연구와 복원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처가 다 아물려면 아직 멀었다는 만리포해수욕장 앞바다의 뜻이었을까. 이날 열리기로 예정된 ‘자원봉사자 감사행사’는 결국 눈보라 때문에 취소됐다.
16종 PAHs
유류에 함유된 발암물질로서 유류오염에 의한 인체위해성 평가에 사용된다.
벤조피렌 등가치 3.35ng/g
체중이 60kg인 성인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하루 평균 어패류 섭취량인 86g을 2년간 먹었을 경우, 평균수명 70세 이내에 발암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