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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천문학 스파이

돈버는 통역, 오해투성이 번역


조선시대 천문학 스파이


얼마 전 한국과학사의 개척자 전상운 선생의 책을 영어로 번역한 내용을 점검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미국인의 번역문에는 오역이 여럿 눈에 띄었다. 전상운 선생은 앙부일구라는 해시계를 모양대로 ‘오목해시계’라고 불렀는데, 번역자는 절기선과 시간선이 그려진 면이 바둑판 같다고 여겨 ‘Gobang Sundial’이라고 옮겼다.

바둑알을 5개 연이어 놓으면 이기는 게임인 ‘오목’(gobang)으로 오해한 것이다. 전문용어나 개념에 익숙지 않으면 원전을 본래의 뜻이 통하도록 번역하기 어렵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조선이 서양과학 지식을 받아들인 과정을 특징지어 ‘간접적 수용’이라고 말한다. 중국이나 일본은 서양인들과 직접 접촉해 서양과학 지식을 습득한 반면, 조선은 한번도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책을 공부했다.

북경에서 서양인이나 중국인을 만나 전문지식을 습득한 경우가 있었지만, 횟수도 많지 않았고 과학에 문외한인 통역관을 매개로 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됐다. 이 때문에 과학지식을 흡수하는 속도도 느리고 개념이나 원리에 대한 오해가 많았다.

19세기 영국의 저명한 천문학자 존 허셜이 쓴 ‘천문학개론’(Outlines of Astronomy)이란 책은 중국에서 ‘담천’(談天)이란 책으로 번역됐다. 중국인 이선란(李善蘭)은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 알렉산더 와일리와 함께 허셜의 책을 옮겼다. 와일리는 근대천문학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이선란에게 전수해준 덕분에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는 본고장의 서양과학을 가르쳐줄 외국인이 한사람도 없었고 다만 중국에서 번역된 책을 읽는 일만 가능했기에 서양과학의 개념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조선에서 가장 폭넓은 서양과학 지식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최한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담천’에는 우주공간에 성간물질이 퍼져 있다가 중력에 따라 물질이 모여 별을 이루고 성단을 만든다는 이론이 소개됐다.

여기서 성간물질(sidereal matter)은 ‘성기’(星氣)라고 번역됐는데, 최한기는 이를 ‘별을 만드는 기(氣)’라고 생각했다. 번역자들은 ‘성기’라는 말로 ‘별의 재료가 되는 물질’을 나타내고자 했지만 최한기는 이를 물질이 아닌 기(氣)라고 오해했다. ‘성기’라는 말에 쓰인 ‘기’가 유학자들이 생각해왔던 기와 다른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책으로만 지식을 접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발생한 것이다.

17세기 초부터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와 중국인 학자가 협력해 번역한 서양과학서들이 조선으로 들어왔다. 특히 천문학에 관련된 책이 많았는데, 시헌력이라는 달력을 만들기 위해 서양천문학서를 번역한 책이 대부분이었다.

1645년부터 청나라가 시헌력을 사용하자 조선에서도 서양천문학 지식을 배워 달력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번역서로 배울 수밖에 없어 습득하는 속도가 느렸다. 청나라에서 시헌력을 사용한지 10년이 지나서야 조선은 겨우 자체적으로 간단한 달력을 만들 수 있었다.


한문으로 번역된 케플러의 면적속도법칙. 1742년 중국에서 발행된‘역상고성 후편’에는 타원궤도를 도는 천체의 면적속도를 계산하는 장면이 나온다.


통역관이 최대 갑부?


18세기 말‘입연정도도’에 나오는 의주-북경 간 육로. 편도 1200km의 거리를 가는데 50일 정도 걸렸다. 200여명의 전체 일 행에 통역관과 천문관도 동행했다.


청나라가 조선이 서양천문학을 배우는 일을 금지한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킨 원인이었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굴복해 속국이 됐기 때문에 청나라가 내려주는 달력을 받아써야지 독자적으로 천문학을 연구해 달력을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나름대로 독립국이라 자부했으므로 서양천문학을 배워 자기 손으로 달력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 때문에 조선은 청나라에서 서양천문학 지식을 몰래 빼내오는 ‘천문학 스파이’가 필요했다.

조선에서는 관상감의 천문관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동지 때마다 북경에 가는 사신단의 일원으로 신분을 위장해 파견했다. 또한 뇌물을 주며 청나라 감시원을 매수하고 서양인 신부나 중국인 중에서 천문학을 잘 아는 사람에게서 지식을 전수해왔다. 이런 제약 속에서 비밀리에 천문학을 배워오는 방법으로 지식이 쉽게 깊어질리 없었다.

그런데 한술 더 떠 청나라는 조선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은 채 달력을 만드는데 필요한 기본수치나 행성운동계산법을 여러 차례 바꿔버렸다. 정확한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겨우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했을 때 갑자기 바꿔버리니 난감할 노릇이었다. 어쨌든 계속 비밀리에 천문학 지식을 배워오는 수밖에 없었다.

1711년 청나라가 조선과의 국경을 개방한다는 조칙을 내린 뒤부터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는 해빙 무드로 진입했다. 이때부터 조선 사신들은 자유롭게 서양 신부들을 방문할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을 만나는 것은 허락됐지만 천문학을 배우는 것은 여전히 금지사항이라 천문관들의 활동에는 제약이 많았다.

조선 천문관들과 접촉했던 한 예수회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천문학에 관한 매우 깊이 있는 질문을 하곤 했다. 자세히 답해줄 테니 질문을 글로 써놓고 가라고 말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쓴 질문 내용 중 한 글자라도 남겨놓길 싫어했고, 대신 몇 번이고 다시 찾아오겠노라고 말하곤 했다.” 조선의 천문관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얼마나 조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북경에 파견되는 일은 조선의 천문관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사신단의 일원에게는 여행 경비를 마련하도록 각자 일정량의 인삼을 갖고 가 팔게 허락됐으니 여기에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특히 통역관은 중국어에 능통해 인삼거래를 쉽게 할 수 있었고, 정부의 각 부서나 개인에게 부탁받은 물건을 사다주면서 수고비를 받거나 높은 가격을 받고 되파는 식으로 부를 쌓았다. 조선시대 최대 갑부는 역관(통역관)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통역관만큼은 아니지만 천문관도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준비해간 인삼을 파는 것은 물론, 천문학 지식을 빼내기 위해 나라에서 받은 공작금도 일부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고관대작에게 중국에서 나온 신간서적을 구해다 주면서 수고비를 받거나 가격을 높이 쳐서 받을 수 있었다. 북경에 파견된 천문관 중에서 부자가 된 사람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천문관이 실력도 없이 돈만 밝힌다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천학초함’(1626년)을 비롯해 서양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여러 책을 공동 번역한 서양 선교사 마테오 리치(왼쪽)와 중국인 학자 이지조.


한자 필담 vs. 영어 낙서

조선 천문관들은 언어 장벽 때문에 서양천문학의 습득 속도가 매우 더뎠다. 홍대용은 1765년 겨울 동지사절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작은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3개월간 세 차례에 걸쳐 남천주당이라 불린 성당에서 예수회 신부들을 만났다.

예수회 신부들은 청나라의 천문관서인 흠천감에서 서양천문학에 기초해 역서를 제작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때 만났던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 폰 할러슈타인과 안토니우스 고가이슬이었다. 당시 조선 사신단 중에는 관상감에서 파견된 이덕성이라는 천문관이 있었다. 이덕성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중국에 파견돼 천문학 지식을 습득한 베테랑이었다.

홍대용과 이덕성이 서양인 신부들을 만날 때 조선통역관 홍명복이 배석했다. 홍대용은 북경을 방문하기 전 중국어 회화를 조금 공부해 인사말이나 값을 흥정하는 정도의 간단한 회화는 가능했다. 하지만 이덕성은 중국어를 전혀 몰랐던 것 같다. 또한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은 중국어 회화와 한문 독해는 조금 했지만, 한자는 전혀 쓸 줄 몰랐다.

먼저 이덕성이 우리말로 물으면 조선통역관 홍명복이 중국어로 통역한다. 홍명복이 중국어를 잘 한다고는 하지만 천문학을 잘 모르니 의사소통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생각해낸 방법이 필담이었다. 종이에 전문용어를 써가며 질문하고 대답할 수 있어 천문학을 아는 사람끼리는 훨씬 효율적인 의사소통법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예수회 신부들이 한자를 쓸 줄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홍대용이 질문을 종이에 써 보여주면 중국통역관이 이를 중국어로 통역해준다. 신부들은 한자를 쓰지 못해 중국어로 대답하면 중국통역관은 이를 다시 한자로 받아 적어 홍대용에게 보여준다. 얼마나 답답하고 더딘 의사소통인가. 홍대용은 종일 대화를 나눠도 시원하게 의사가 통한 것이 별로 없다고 한탄했다.

1992년 8월 한국 최초의 과학위성 우리별 1호가 성공리에 발사됐다. 이 위성은 한국의 젊은 연구원들과 영국 서리대가 공동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 우리 위성기술은 걸음마 수준이었기에 우리 연구원들은 서리대와 공동연구를 하는 3년 동안 가능한 한 많은 기술을 습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영국 연구원들이 위성기술을 쉽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한국 연구원들은 위성기술을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영국인들이 쓰레기통에 버린 낙서나 이면지에 쓰인 내용까지 몰래 살펴봤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이렇게 습득한 기술을 토대로 한국이 독자 제작한 우리별 2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한국의 인공위성 연구원들과 조선시대 천문관들의 노력이 묘하게 겹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선진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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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전용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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