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현역 시절 현란한 풋워크와 날쌘 잽은 그의 전매특허였다. 그러나 1984년부터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그의 몸은 지금 화석 같이 굳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그의 모습은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파킨슨병에 걸린 초파리?
“알리가 파킨슨병을 극복한다면 아마 ‘초파리’ 같이 다시 날아오를 것입니다.”
파킨슨병 원인유전자의 기능을 밝혀 효과적인 치료제 개발의 길을 연 KAIST 분자유전체학 연구실 정종경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파킨슨병의 원인을 밝히는 유전자 연구에 초파리가 질병모델동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1817년 이 병을 처음 보고한 영국 의사의 이름을 붙인 파킨슨병은 노인에게 치매에 이어 두 번째로 빈번하게 발생하는 퇴행성 뇌질환이다. 이 병에 걸리면 신경세포와 근육에 이상이 생겨 손발을 심하게 떨거나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고, 말을 하거나 음식을 먹기도 어려워진다.
파킨슨병은 환경요인과 유전요인 모두에 의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환경요인은 너무나 다양해 연구가 어렵다. 유전요인도 ‘파킨’(Parkin)과 ‘핑크1’(PINK1) 등이 원인유전자로 지목됐을 뿐 어떤 과정으로 병이 발생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실험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사람 대신 초파리를 연구해 파킨슨병의 원인을 밝히기로 했습니다. 유전자변이를 일으켜 파킨슨병에 걸린 초파리를 만드는 거죠.”
정 교수는 초파리를 두 그룹으로 나눠 각각 파킨과 핑크1을 하나씩 제거해 부화시켰다. 그랬더니 두 그룹 모두 다리와 날개가 굽어 날지 못했다. 정 교수는 파킨과 핑크1 유전자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뇌신경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거나 파괴돼 파킨슨병과 유사한 증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핑크1을 제거한 초파리에서 파킨의 양을 늘리면 파킨슨병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밝혔다. 정 교수는 “파킨이 어떤 경로로 미토콘드리아 기능을 조절하는지 알아내면 파킨슨병 치료제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는 2006년 ‘네이처’ 온라인판 5월 4일자에 실렸다.
정 교수가 초파리와 처음 인연을 맺은 시기는 1999년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초안이 거의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모두들 사람의 유전자지도가 완성된 사실에 들떠 게놈 구조분석에 몰두할 때 정 교수는 유전자 각각의 기능을 밝히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질병 유전자를 70% 공유
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전체 유전자의 기능을 연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정 교수는 인간질병유전자를 보유한 동물을 모델로 이용하면 비교적 쉽게 연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효모, 제브라피시, 개구리, 생쥐, 초파리 같은 후보를 면밀히 검토했다. 그리고 사람과 질병 유전자를 70% 이상 공유하며 한 세대가 2주에 불과한 초파리를 최종 선택했다. 연구비용이 다른 동물에 비해 적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였다.
정 교수의 선택은 탁월했다. 초파리로 사람 질병유전자의 기능을 밝히는 연구를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첫 논문을 낼 정도로 성과가 빨랐던 것. 게다가 세포 수준이 아니라 개체 수준의 연구라 신뢰도가 높았다.
정 교수는 2001년부터 창의적연구진흥사업의 지원을 받아 파킨슨병뿐만 아니라 당뇨나 비만 같은 대사성 질환과 암의 유전적 요인을 밝혀왔다. 그 결과 지난 2년간 네이처 같은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 7편을 발표할 정도의 성과를 거뒀다.
“수만 마리의 초파리를 키우는데 쓰이는 배지의 시큼한 냄새가 이제 달콤한 꿀 냄새 같다”는 정 교수. 오늘도 연구원들과 함께 초파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난치병 치료의 희망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