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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은 색즉시공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양형진

“양자역학은 ‘색즉시공’과 같습니다.”

울긋불긋 봄꽃이 활짝 핀 고려대 교정에서 만난 양형진(48) 교수가 선문답 같은 말을 던졌다. 혹시 몇 년전 개봉한 영화 이야기를 하는 걸까. 듣기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알 듯 모를 듯한 선문답은 이어졌다. “양자역학에서 진공은 입자로 가득찬 상태 즉 완전히 충만한 상태입니다. 불교에서는 ‘색즉시공’ 즉 모든 존재자가 비어 있다고 합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넘나드는 것이 물리학과 불교가 꼭 닮았죠.”양 교수는 이처럼 불교와 물리학을 넘나드는 독특한 글을 한 중앙 일간지에 2년 동안 연재해 화제를 낳았다. 그 글들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 이번에 나온 ‘과학으로 세상보기’다.

“어렸을 때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절에 다닌 기억이 납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불교에서 관심이 멀어졌죠. 산 속에만 있는 종교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미국 유학시절 과학의 구조와 불교의 사고가 일치하는 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어떤 계기, 불교식으로 말하면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걸까. 그는 “박사 학위를 받을 때쯤 시카고의 한국 사찰에 가서 주지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에게서 불교를 전체적으로 보는 시각을 배웠다. 미국에서 기독교의 세례에 해당하는 계도 받았다. 그래도 독실한 신자는 아니라면서 가끔 절에 가고 집에서 경전을 읽는다고 한다.

흔히 과학과 종교는 갈등 관계로 묘사된다. 그러나 양 교수는 적어도 불교는 아니라고 부인한다. 그는 “불교의 독특한 점은 세상을 정확히 파악해 세상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 점에서 과학과 맥이 닿는다”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예를 들었다. 상대성이론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공간과 시간의 절대성이 붕괴된다. 사람에 따라, 정확히 말하면 속도 등 운동 상태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다르게 보인다. 양 교수는 이 이론을 불교의 ‘일수사견’(一水四見)에 빗댔다. 같은 물이라도 인간이 보면 마시는 물로 보이고, 물고기가 보면 집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불교가 객관적인 과학과 통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냐고 그는 반문했다.

불교와 과학이 맺은 인연

“돌아가신 성철 스님도 과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불교에 무아(無我)란 말이 있어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본성은 없다는 것이지요. 성철 스님은 이 말을 아인슈타인의 공식, 즉 $E=m{c}^{2}$에 빗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질량도 에너지로 바뀌는 것처럼 모든 것은 변할 수 있다고 설법했어요.”

그는 “불교의 핵심인 연기론, 즉 모든 사물은 서로 연관을 맺고 의존하고 있다는 사상이 최근 과학의 흐름과 잘 어울린다”고 강조했다. 예전 과학은 모든 사물을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서로 맺고 있는 관계와 상호작용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구에 생명이 나타난 것도 40억년의 인연, 나아가 우주가 탄생한 뒤 약 150억년의 인연이 쌓인 결과다.

양 교수에게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말장난이 아니냐고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는 오히려 “과학을 연구하면 할수록 모든 사물이 사실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으니 얼마나 놀랍냐”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돈이나 명예 보다는 세상의 구조를 아는 것이 재미있다는 양 교수는 요즘 양자암호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정보이론과 양자역학의 원리를 이용해 만든 암호로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고 한다. 양자컴퓨터는 현재 존재하는 모든 암호를 풀 수 있다. 미국 뿐만 아니라 빈 라덴도 양자암호와 양자컴퓨터를 쓰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래서 세상은 인연으로 가득찬 공진화라며 크게 웃었다.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극락이 아니라 깨달음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깨달음이 바로 불교의 ‘잡화엄식’(雜華嚴飾) 사상입니다. 장미와 백합만이 아니라 온갖 잡스러운 꽃이 세상을 멋있게 장식하죠. 도구를 만들었다고, 달나라에 갔다고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인류는 굶주림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의 공존을 깨달은 유일한 동물이라는 점에서 위대한 겁니다.”
 

양형진^서울대물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와 신시내티대에서 일했다. '산하대지가 참 빛이다' '놀라운 대칭성'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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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김상연 기자
  • 사진

    박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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