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
김소월의 시 ‘산유화’의 첫 구절이다. 바쁜 일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계절의 변화를 종종 산과 들에 핀 꽃을 보고 깨닫게 된다. 봄에 피는 개나리와 진달래,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와 국화 등은 계절의 전령으로서 손색이 없다. 식물이 어떻게 정확한 계절을 인식해서 꽃을 피우게 될까.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가져봤음직한 의문이다.
식물은 연중 규칙적으로 변화하는 두가지 자연현상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인식하는데, 하나는 기온변화이며 또다른 하나는 하루 중 낮과 밤의 길이(광주기) 변화이다. 사계절에 따른 규칙적인 환경변화를 인식해 식물은 저마다 일정한 계절에 꽃을 피운다.
식물은 왜 특정한 계절에 꽃을 피울까. 그 이유에 대해 한번 추론해보자. 이는 진화적으로 봤을 때 좀더 많은 자손을 남기기 위한 식물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식물은 항상 햇빛, 물, 토양 내 영양분 등의 자원을 얻기 위해 다른 식물과 경쟁한다. 또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옮겨주는 곤충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도 경쟁한다. 이때 경쟁에 가장 유리한 계절에 꽃을 피우면 좀더 많은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같은 종의 식물이 동일한 시기에 꽃을 피우면 타가수분(다른 그루의 꽃으로부터 암술이 꽃가루를 받는 일)이 좀더 원활히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종내 유전적 다양성이 증가할 것이다. 유전적 다양성은 오랜 진화과정에서 생물종이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따라서 진화과정을 통해 계절에 따른 환경변화를 정확히 인지하고 개화시기를 정확히 조절하는 유전메커니즘이 식물에 확립됐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식물은 구체적으로 어떤 물리·화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계절을 인식하는 것일까. 개화시기를 조절하는 유전자 네트워크는 어떤 모습일까.
낮 길이 아는 돌연변이 담배
식물이 광주기를 인식해 꽃피는 시기를 결정한다는 사실은 1920년 미국 메릴랜드 소재 농무성연구소의 가너 박사와 앨러드 박사에 의해 밝혀졌다. 이들은 담배를 연구하던 중 온실 안에서 꽃을 피우지 못하고 무한정 자라는 담배 돌연변이체를 우연히 발견했다. 씨도 맺지 못하는 불량 담배종이라고 판단한 두 연구자는 이 담배를 들판에 내다버렸다. 그런데 며칠 후 그 근처를 지나다가 놀라운 현상을 목격했다. 이 담배가 마침내 꽃을 피웠던 것이다.
온실 안과 밖의 어떤 차이가 이 담배로 하여금 꽃을 피우게 했을까. 두 연구자는 온실 안에서 인공적인 빛이 밤늦게까지 제공되는 반면, 늦가을이었던 온실 밖에서는 상대적으로 빛을 받는 시간이 짧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결국 이 담배의 개화시기가 낮의 길이, 즉 광주기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후에 이 담배의 이름은 메릴랜드 맘모스 담배라 명명됐다. 원래 담배는 낮 길이에 상관없이 꽃을 피우는데, 메릴랜드 맘모스는 돌연변이 때문에 낮이 짧은 조건에서 꽃이 피게끔 바뀐 것이다.
가너 박사와 앨러드 박사의 연구 결과는 금새 유명해져 전세계의 많은 연구실에서 다른 식물들은 어떤 광주기 조건에서 꽃을 피우는지 조사했다. 결국 식물은 광주기 조건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낮이 긴 조건에서 꽃을 피우는 장일식물, 짧은 조건에서 꽃을 피우는 단일식물, 광주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중일식물로 말이다. 장일식물의 대표적인 예는 시금치, 사탕수수, 홍당무 등이며 주로 봄에 꽃이 피는 식물이 이에 해당한다. 단일식물의 대표적인 예는 나팔꽃, 도꼬마리, 코스모스, 들깨 등이며 이들은 주로 가을에 꽃을 피운다. 또한 원예용으로 이용되는 거의 대부분의 식물종은 광주기와 상관없이 꽃이 피는 중일식물이다.
식물이 가진 세가지 눈
식물이 광주기를 인식해 꽃피는 시기를 결정한다는 사실은 식물도 빛을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과 달리 눈이 없는 식물이 어떻게 빛을 볼 수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의 눈이 어떻게 빛을 인식하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람의 눈에는 원추세포와 간상세포가 있어서 각각 색깔과 명암을 인식할 수 있다.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자면 각 시각세포 내에 있는 광수용체인 로돕신이 빛을 받아 일으키는 화학적 변화가 시신경을 자극하고, 결과적으로 뇌에 전기신호의 형태로 전달됨으로써 빛을 인식할 수 있다. 로돕신은 옵신이라는 단백질과 레티날(비타민 A의 한 형태)이라는 발색단(특정한 빛을 받아 해당 색깔을 띨 수 있는 색소물질)으로 이뤄지는데, 파장이 4백-6백nm(나노미터, 1nm=${10}^{-9}$m)인 빛, 즉 가시광선을 받았을 때 레티날의 화학구조가 시스(cis) 형태에서 트랜스(trans) 형태로 전환된다. 이러한 화학구조의 변화가 광수용체 로돕신의 작용을 활성화시켜 사람의 시신경을 자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빛을 볼 수 있는 이유는 결국 분자수준에서 볼 때 광수용체 로돕신 때문이며, 특히 로돕신 내 발색단의 화학구조가 빛에 의해 시스에서 트랜스 형태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식물에도 빛을 받았을 때 화학구조가 바뀌어 빛을 인식하게 만드는 광수용체가 존재한다. 식물에는 세 종류의 광수용체, 즉 청색광 수용체(크립토크롬), 자외선 광수용체, 적색광 수용체(피토크롬)가 존재한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식물은 세 종류의 눈이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광주기 인식에 주로 사용되는 광수용체가 바로 피토크롬이다. 피토크롬도 인간의 광수용체인 로돕신처럼 단백질에 발색단이 결합된 형태의 광수용체다.
피토크롬이 빛을 받으면 발색단의 화학구조가 시스에서 트랜스로 변화하고, 피토크롬의 활성이 바뀌는 것도 로돕신과 유사하다. 피토크롬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광전환성이다. 피토크롬이 6백60nm의 적색광을 흡수하면 활성화된 형태인 Pfr(원적색광 흡수형)이 되고, 다시 7백30nm 파장의 원적색광을 흡수하면 불활성화된 형태인 Pr(적색광 흡수형)이 된다. 즉 흡수하는 빛의 파장에 따라 피토크롬은 Pr이나 Pfr 형태로 바뀐다. 이러한 광전환성 때문에 광주기 인식에 피토크롬이 사용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구체적으로 단일식물의 경우를 살펴보자. 단일식물은 하루 중 밤의 길이가 일정 시간(임계 밤길이)보다 길어야 꽃이 피는 식물이다. 하지만 단일식물에 임계 밤길이 이상의 어두운 기간을 제공했더라도, 밤 시간 가운데 5분 정도 빛을 쬐어주면 개화가 억제된다. 이때 개화억제에 가장 효과적인 빛이 바로 6백60nm 파장의 빛이다. 이런 사실은 피토크롬이 광주기 인식에 관여함을 시사하는 결과다. 또한 5분 간 6백60nm 빛을 쬐어준 후, 곧이어 7백30nm 빛을 쬐어주면 개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6백60nm와 7백30nm의 빛을 교대로 쬐어주는 실험을 해보면 어떨까. 흥미롭게도 가장 마지막에 쬐어준 빛에 의해 개화 여부가 결정된다. 즉 마지막에 쬐어준 빛이 6백60nm 빛이면 개화가 억제되고, 7백30nm 빛이면 개화가 일어난다. 이같이 개화반응에 광전환성을 보이는 현상은 광주기 인식에 피토크롬이 관여한다는 명쾌한 증거다. 광전환성은 피토크롬의 고유한 분자적 성질이기 때문이다.
나팔꽃잎 접었다 펴는 생물시계
‘광주기’에는 빛(광)과 시간(주기)이라는 두가지 물리적 개념이 혼재돼 있다. 광을 인식하는 광수용체가 피토크롬이라면 하루 중 낮의 길이가 짧은지, 긴지의 주기를 인식하게끔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시계가 있어서 정확하게 하루 중 낮의 길이를 측정할 수 있다. 식물도 시계를 갖고 있다면 낮의 길이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식물에는 생물시계라는 것이 체내에 있다. 실은 식물뿐만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동물, 미생물이 모두 체내에 생물시계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처럼 멀리 떨어진 나라로 여행하면 밤잠을 못자는 이유도 우리 몸에 있는 생물시계가 물리적인 시간과 괴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행히 생물시계는 항상 물리적인 시간에 맞춰서 재조정되기 때문에 며칠만 고생하면 시차가 저절로 극복된다.
식물에 생물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예가 잎운동이다(그림).
초본류 식물의 잎은 24시간의 주기를 갖고 위 아래로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데, 이는 잎운동이 생물시계의 조절을 받기 때문이다. 나팔꽃잎이 하루를 주기로 접혔다, 펴졌다 하는 현상도 생물시계에 의해 조절되는 예다.
생물시계는 식물의 여러가지 생리적 반응을 조절할 뿐만 아니라 유전자의 발현 또한 조절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식물이 가진 전체 유전자 가운데 약 5% 정도가 생물시계의 조절을 받음으로써 24시간을 주기로 발현량이 늘었다, 줄었다를 되풀이한다고 한다. 광을 인식하는 피토크롬과 주기를 인식하는 생물시계가 결국 식물로 하여금 계절을 인지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단순명료한 이진법 작전명령
그렇다면 광주기에 따른 개화조절은 어떻게 이뤄질까. 이에 대해 최근 국내외에서 이뤄진 놀라운 발견을 살펴보자.
계절에 따른 식물의 개화조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복잡하지만 유전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생명현상은 본질적으로 유전자에 의해 조절되며 개화 또한 유전자에 의해 조절되기 때문이다. 개화를 조절하는 유전자를 설명하기에 앞서 유전자들의 명령체계를 잠깐 알아보자.
유전자는 근본적으로 군대식 명령체계를 갖고 있다. 마치 군대에서 병사를 움직이기 위해 사단장이 병사들에게 직접 일일이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연대장, 중대장, 소대장의 명령체계를 따르듯이, 유전자도 상위 유전자, 하위 유전자가 있어서 일정한 명령체계를 따라 최상위 유전자의 작전명령이 최하위 유전자군들에 전달된다.
이때 유전자의 명령은 극히 기계적이어서 하위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시키거나 증가시킨다는 이진법적인 언어로 이뤄져 있다. 유전자는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진법 언어는 바로 컴퓨터 언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전자의 명령체계도를 그려놓으면 마치 순서도나 전자회로도처럼 보인다(뒷페이지 기사 참조).
개나리 아무 때나 불쑥 피는 이유
식물이 일정한 계절에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광주기뿐만 아니라 온도 또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개화시기를 결정하기 위한 온도인식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눠진다.
첫째는 밀, 보리 등의 겨울종 식물이 꽃을 피우기 위해 필요한 장기간의 저온(4℃ 이하) 인식이다. 겨울종 식물은 겨울 한철 동안의 저온 기간을 거쳐야 꽃을 피우는데, 이것을 춘화현상이라 하고 이렇게 처리하는 방법을 춘화처리라 부른다. 개나리, 진달래 등이 초봄에 꽃을 피우는 이유도 춘화처리 효과 때문이며, 가을철 이상 저온 현상이 며칠 지속되면 개나리, 진달래가 불쑥 꽃을 피워 버리는 것도 춘화처리 효과에 의해 개화가 유도됐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일반적인 주변 온도 인식이다. 일반적으로 식물은 따뜻한 온도에서 개화가 빨리 일어나는 반면, 저온(15℃ 이상의 저온, 춘화처리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서늘한 온도)에서 개화가 천천히 일어난다.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 현상이 진행되면서 전세계적으로 봄이 일찍 찾아오는 추세다. 우리나라에서도 봄이 오는 시기가 점차 앞당겨지고 있다.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40년 간 겨울철 평균온도가 약 3℃ 증가했고, 봄의 전령이라 할 수 있는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의 개화시기는 무려 10여일이나 빨라졌다고 한다. 이는 식물이 따뜻해진 한반도의 기후를 인식해 개화시기를 앞당겼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8년 걸리는 개화 6개월로 단축 가능
식물이 광주기와 온도를 인식해 항상 일정한 계절에 꽃을 피우는 목적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면 자손을 최대한 많이 퍼뜨리기 위함이다.
식물이 이러한 생식적 전략을 성공시키기 위해 갖고 있는 또다른 개화유도 메커니즘이 있다. 바로 발달상태의 모니터링이다. 인간의 경우도 생식이 가능한 일정 연령이 있듯이 식물도 일정 연령이 지나기 전까지는 어떠한 환경요인에서도 꽃이 피지 않는 유년기를 거친다. 너무 어린 나이에 생식하면 그 자손이 불량해지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목본류는 일정한 햇수가 지나기 전에는 꽃을 피우지 않으며, 초본류의 경우도 일정한 시기 동안에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가로수로 많이 이용되는 포플러의 경우 8년 이상의 수령에 도달하기 전에는 결코 꽃을 피우지 않는다.
이렇게 일정기간 동안 꽃이 피지 않는 이유는 유년기 동안의 발달상태를 모니터링해 다른 환경요인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개화를 억제하는 유전적 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발달상태를 모니터링하는 유전자와 주변 온도를 인식해 개화시기를 결정하는 유전자가 일부 동일하다는 사실이 최근 확인되기도 했다.
결국 광주기, 온도 등의 환경 신호뿐만 아니라 식물의 내적·생리적 신호도 동일한 개화 유전자 네트워크를 조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개화 유전자 네트워크의 미세한 조절을 통해 특정 식물은 1년 중 특별한 하루에 동시에 꽃을 피우는 것이다.
꽃은 자연과학의 중요한 대상으로 오랫동안 연구돼 왔다. 우리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원예의 목적으로 활용돼 왔을 뿐만 아니라 꽃 발달의 최종 산물인 열매, 곡식 등이 인류의 식량자원으로 이용돼 왔기 때문이다.
특히 개화조절 유전자는 임의적으로 농작물의 개화를 조절해 생산성을 증대시키는데 응용될 수 있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 가운데는 개화조절 유전자를 이용해 개화시기를 획기적으로 단축시킨 실험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LFY 유전자를 과발현시켜 얻은 포플러, 오렌지 등이다.
개화에 8년 걸리는 포플러를 6개월만에 개화시켜 수목형질개선에 소요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고, 개화에 4년 걸리는 오렌지나무를 4개월만에 개화시켜 초기 투자기간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뿐만 아니라 오렌지나무의 경우 빠른 개화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정상적으로 맺힘을 보여줬다.
이 분야는 우리나라에서도 향후 성과가 기대되는 분야다. 이 분야에 세계적 명성을 얻는 연구자들이 여럿 있고, 과학기술부 21세기 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단 중 자생식물사업단이 개화조절 유전자의 발굴과 응용에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