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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 안전하게 수송하는 분자 곶감타래

초분자화학

생명공학과 신소재 개발 연구가 화학분야에서 이뤄지고 있다. 세포 속에 존재하는 초분자를 모방해 생명의 신비와 기존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초분자화학. 초분자화학이란 무엇이며 그 응용가능성은 어떠한지 알아보자.

시골 할아버지 댁 처마에 주렁주렁 매달려 어린시절 입맛을 유혹했던 곶감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기다란 꼬챙이에 끼어 찬바람과 아침저녁 서리를 맞으며 탐스럽게 익어가던 검붉은 곶감.

그런데 화학분야에서도 곶감타래가 실현됐다. 초분자를 이용한‘쿠커비투릴 분자 곶감타래’다. ‘쿠커비투릴’(cucurbituril)은 분자 곶감타래에서 곶감의 역할을 하는 물질이다. 20세기 초 독일 과학자들에 의해 처음 합성된 쿠커비투릴은 산소, 질소, 탄소, 수소의 네가지 원소로 구성돼 있다. 이 물질의 구조는 한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 80년대 초, X선 결정법에 의해 규명됐다. 쿠커비투릴은 빈 술통 모양을 하고 있는데, 술통 내부의 지름은 0.5 나노미터(1nm=${10}^{-9}$m)다.

분자 곶감타래는 속이 뻥 뚫려 있는 쿠커비투릴을 긴 막대모양의 분자로 꿰면 완성된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이 모두가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나노미터 차원에서 이뤄지는 작업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초분자화학이 주목받는 이유다.

레고 블록 끼우듯 분자

초분자화학(supramolecular chemistry)은 말 그대로 초분자를 다루는 학문이다. 초분자는 일반적인 분자가 2개 이상 모여 있는 거대(초)분자다. 일반분자는 원자간의 공유결합으로 형태를 유지하지만 초분자는 기본단위가 되는 분자간의 비공유 결합을 특징으로 한다. 초분자를 이루는 비공유 결합에는 수소결합, 정전기적 상호작용, 반데르발스 인력(van der Waals interaction)등이 있다. 레고 블록 조각 하나하나는 일반분자로, 레고블록을 조립한 형태는 초분자로 생각하면 된다.

초분자화학은 일반분자가 갖지 못하는 다양한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분자 곶감타래처럼 원하는 모양을 단위분자의 특성을 이용해 임의적으로 조립할 수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분자의 구조를 밝히기에 급급했던 예전 화학과는 달리, 초분자화학은 원하는 모양을 마음대로 조립할 수 있기 때문에 최근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초분자화학의 기본은 비공유 결합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비공유 결합은 공유결합에 비해 매우 약하다. 따라서 초분자 물질은 주변의 조그만 변화에도 모양이 쉽게 바뀐다. 또한 초분자를 이루는 복합체의 형성과 구조 결정에는 한가지 종류의 비공류 결합력이 단독으로 작용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여러가지 비공유 결합력이 상호보완적으로 동시에 존재한다. 이 때문에 초분자를 원하는 대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초분자들이 갖는 특성을 이용하면 이 같은 어려움은 어느 정도 해결된다. 초분자화학에서 핵심이라고도 불리는 초분자의 특성은 ‘분자인식’(molecular recognition)과‘자기조립’(self assembly)이다. 분자인식은 분자들이 자기‘짝’을 알아 본다는 것이다. 자연계에는 효소와 기질, 항원과 항체 간의 상호작용에서 볼 수 있듯이 반드시 정해진 상대하고만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무수히 많은 사례가 있다.

또한 자기조립은 특정 모양과 작용기를 포함하고 있는 단위분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초분자를 형성한다는 말이다. 특정 모양과 작용기를 가진 단위분자는, 레고 블록의 조각처럼 서로 끼워질 수 있는 모양의 분자끼리 모인다. 결합 가능한 단위분자를 서로 섞으면 이 분자들은 마치‘지능’이 있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자신의 짝을 찾아 초분자체를 이룬다. 분자 곶감타래의 경우, 곶감인 쿠커비투릴과 꼬챙이인 긴 분자막대를 서로 섞어 놓으면 자동으로 곶감타래를 이룬다.

이처럼 초분자의 모양과 기능은 단위분자에 좌우된다 (그림1). 구조적으로 간단한 단위분자의 의도적 변형은 공유결합의 분자보다 훨씬 용이하다. 따라서 공유결합 합성법으로 접근 불가능했던 다양한 화합물의 합성이 가능하다. 이런 분자인식과 자기조립의 원리를 이용해 우리가 원하는 구조와 성질을 가진 인공 초분자체를 만드는 학문이 초분자화학이다.
 

(그림 1) 초분자의 기초가 되는 단위분자들^분자를 이루는 원자들의 구조적 특징을 이용하면 다양한 모양의 분자를 만들 수 있다. 이런 단위분자는 초분자(오른쪽 3D 그림)를 설계하는 기초가 된다.


하드웨어는 화학, 소프트웨어는 분자생물학

초분자화학의 하드웨어를 화학이라고 한다면, 소프트웨어는 분자생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서 초분자체를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초분자화학의 시작은 생명체의 매우 정교하고 선택적인 화학 작용을 모방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됐다. 생명체에는 호르몬, 신경전달물질, 아미노산, 비타민 등 분자량이 작은 분자에서부터 DNA, RNA, 단백질 등 분자량이 큰 분자까지 무수히 많은 초분자체가 존재한다. 이들 생체분자는 분자 내 또는 분자간 비공유 결합에 의해 독특한 3차원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생명현상은 정교하게 조절되는 이들 분자간의 상호 인식과 교신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초분자화학의 이런 태생적 특징 때문에 이 분야의 연구자는 화학은 물론이고 생물학의 지식에 대해서도 전문가 못지 않은 실력을 갖춰야 한다. 더욱이 실험실 내에서 초분자 물질을 합성하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다. 생체 내 존재하는 초분자 물질을 아무리 모방하려 해도, 이들을 합성하는 시험관 내의 상황이 세포 안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포항공대 지능초분자 연구단의 김기문 교수는“초분자화학이야말로 인내와 끈기의 학문이다. 수많은 밤을 지새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해야 원하는 초분자 물질을 합성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의 신비를 이해하며 이를 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이 모든 수고가 단번에 날아간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초분자화학 연구가 지적 호기심만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초분자체의 응용범위는 무궁무진하다. 그 중 초분자체를 이용한 약물전달 시스템은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다. 대표적 예가 쿠커비투릴이다. 빈 술통 모양의 쿠커비투릴에 산을 가하면 뚜껑 역할을 하고 있던 나트륨 이온이 떨어져 나가 빈 내부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쿠커비투릴을‘분자용기’로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분자용기에 약을 넣어 투약하면 필요한 곳에서 뚜껑이 열리면서 부작용 없이 약물이 흡수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리형 분자 막대에 꿰면‘분자 곶감타래’를 만들 수 있으며, 이런 곶감타래를 옆으로 이으면 육각형 모양의 벌집 구조를 갖는 초분자체를 만들 수 있다.

기존 칩 한계 극복하는 나노크기 초분자

초분자화학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나노미터 크기의 이른바‘분자기계’를 제조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현재의 반도체 기술을 이용해 기존의 마이크로칩을 작게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면, 기존의 실리콘 칩은 빛을 이용해 칩 위에 필요한 회로를 새겨 넣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빛으로 회로의 선폭을 가늘게 만드는데는 한계가 있다. 빛보다 가는 회로는 이론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에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칩제작 방식이 대두되고 있다. 크기를 줄여나가는 기존의 제작 방식인‘하향방식’(top-down)이 아니라 분자로부터 출발해 기능을 가진 장치를 제작하려는 ‘상향방식’(bottom-up)이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분자를 이용한 상향방식의 반도체칩 연구 중심에 초분자화학이 있다. 초분자 물질을 이용한 분자기계의 대표적 예는‘분자스위치’다. LA소재의 캘리포니아 주립대(UCLA) 히스 교수 팀은 지난해 두개의 고리 형태 분자를 이용해 전기신호에 따라 열기와 닫기가 가능한‘분자스위치’를 개발했다. 초분자체 두개가 고리 형태로 서로 연결된 이 분자스위치는 전자를 넣을 때와 뺄 때의 형태가 달라진다(그림2).

외부의 조건에 따라 초분자의 모양이 달라지므로 이를 이용하면‘분자기억장치’를 만들 수 있다. 각기 다른 모양의 초분자를 각각‘0’과‘1’로 기억시켜 기존의 반도체 역할을 대신 하는 것이다.

더욱이 분자스위치는 기존의 칩보다 수십억배나 작고 스위칭되는 속도도 수백억배나 빠르다. 이를 이용하면 속도와 크기면에서 기존 컴퓨터에 비교할 수 없는‘나노슈퍼컴퓨터’가 가능해진다. 세계의 많은 과학자는 초분자를 이용한‘화학적으로 조립된 전자나노컴퓨터’를 실현시키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기존기술의 벽을 깨부수며 재료공학과 컴퓨터공학의 신세계를 개척하는 선두에 바로 초분자화학이 있는 것이다.
 

(그림 2) 분자 스위치^두개의 고리분자 중 왼쪽에 있는 것의 초록색 부분에서 전자 하나를 빼면, 이 중결합이 단일결합으로 되면서 (+) 전하를 띤다.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분야

20세기의 처음 반세기는 물리의 시대였으며 나중 반세기는 화학의 시대였고, 21세기는 생물의 시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화학은 이미‘끝난’학문이 아닌가.

김 교수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아니다”라며“우리는 요즘에 와서야 간단한 화학현상을 조금씩 이해하게 됐으며, 현재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무수한 화학현상에 비하면 현재의 지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전통화학의 연구 주제를 뛰어넘어 화학의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분야가 초분자화학이라는 말이다.

또한 김 교수는 초분자화학에 대해“나노테크놀러지를 이용한 신소재 개발의 선두”라고 말한다. 초분자가 갖는 자기조립의 특성을 이용하면 지금까지 미처 상상할 수 없었던 복잡하고 정교한 나노크기의 물질을 손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초분자화학의 또다른 관심은 생명의 신비다.“ 태초의 생명은 어떻게 탄생됐고, 어떻게 자기와 같은 분신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됐는가. 생체내의 여러가지 대사는 분자수준에서 어떻게 조절되는가. 이런 것들은 비단 생물학자뿐 아니라 화학자들이 대답을 찾고자 하는 질문의 몇가지 예일 뿐이다”라고 김교수는 말한다.

또한 김 교수는“초분자화학 연구는 노벨상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경쟁력 있는 분야 중 하나다. 하지만 노벨상은 그렇게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며“초분자화학 같은 학제간 학문의 경우에는 기초가 되는 기본지식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가 꼽는 초분자화학의 기초는 생물학과 재료공학이다. 초분자화학의 연구 주제가 생명현상의 이해와 나노크기의 신소재 개발 분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구자의 마음가짐이다. 항상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는 도전정신과 자신의 연구주제에 대해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생체 내 분자 모방해 초분자 설계

지금까지는 작은 분자를 이용해 원하는 구조와 기능을 가진 초분자 물질을 만들기에 관련 지식이 충분하지 않았다. 특히 상대적으로 약한 분자들 사이의 인력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해서 원하는 초분자체를 형성하기 쉽지 않았다. 다행히 생체 내에 존재하는 진보된 형태의 초분자들로부터 많은 힌트를 얻고 있다. 효소, 항체, 수용체, 운반체, 채널, 생체막 등 생체 내의 초분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비공유결합에 대한 이해는 초거대 분자를 설계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러한 초분자화학에 대한 연구는 반대로 자연현상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기초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원하는 구조와 기능을 가지는 초분자를 설계하고 합성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으로 과학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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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김대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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