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코앞에 둔 시점이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SF는 척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독특한 분야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유치한 싸구려 대중문학이라는 선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일부는 복잡한 과학기술의 계몽수단 정도로만 이해한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SF 작가지망생들조차 상당수가 그런 생각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휴고 건즈백이 ‘랄프 124C41+’를 발표해 대중적인 SF문학의 선구자로 떠오른 것이 1911년의 일이다. 물론 그 이전 19세기에 발표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H.G.웰즈의 ‘우주전쟁’ ‘타임머신’ 등이 있지만, 이들은 주류문학에서도 인정받는 고전문학이므로 일단 건즈백의 작품을 오늘날 대중문학으로 간주되는 SF의 시조로 삼아보자. 이렇게 본다면 현대 SF문학은 90년이 채 못되는 역사를 지닌 셈이다.
이해조의 ‘철세계’가 원조
그런데 우리나라 또한 SF 문학에서는 결코 늦지않은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른바 ‘신소설’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이해조(1869-1927)가 ‘철세계’라는 번안소설을 1908년에 내놓았다. 번안이란 외국작품을 그나라의 상황에 맞게 각색한 것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을 발표한 프랑스 작가 주울 베르느의 소설을 번안한 것으로, 원작은 1879년에 나온 ‘500만의 왕비’(Les Cinq Cents Millions de la Begum)였다. 이해조는 이 작품의 일역판인 ‘철세계’(1887)를 다시 번역하고 조금 고쳐서 같은 제목으로 냈다. 1908년 회동서관에서 발행된 이 한글판의 표지에는 한자로 ‘과학소설 철세계’라고 쓰여 있다.
‘철세계’에는 ‘좌선’과 ‘인비’라는 두 부호가 등장한다. 이들은 엄청난 재산으로 인류를 위해 뭔가 커다란 일을 하고 싶어한다. 좌선은 장수촌을 건설해 의학 발전에 힘쓰고, 인비는 거대한 철공장을 만들어 신무기를 대량 생산해 인류를 정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비가 완성한 대포는 거리 측정을 잘못해 포격에 실패하고 그는 패망하기에 이른다. 이 소설은 과학의 놀라운 위력을 나타냄과 동시에 무력에 의한 인간지배는 성공할 수 없음을 표현한 계몽소설이었다.
일제시대에 로봇 소개
일제 치하에 접어든 뒤 1920년대에 또 하나의 기억할 만한 작업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가장 선구적인 극작가 중 한 사람이었던 김우진(1897-1926)이 1925년에 체코 작가 카렐 차펙의 ‘R.U.R.’을 번역해냈던 것이다. ‘R.U.R.’은 ‘로섬의 만능 로봇’을 줄여 쓴 제목이며 연극 공연을 위한 희곡이었다. 이는 세계 최초로 ‘로봇’이라는 말을 쓴 문학작품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차펙은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여러차례 오른 위대한 작가였다. 희곡 ‘R.U.R.’은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인조인간(로봇)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내용의 작품이었다. 김우진은 동경 쓰키지소극장에서 ‘인조인간’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된 이 작품을 보고 돌아와 연극평을 써서 발표한 뒤 원작도 우리말로 번역해냈다. 그는 이듬해인 1926년에 여가수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자살한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이 밖에 주울 베르느나 H.G. 웰즈의 소설 몇 작품이 일제시대에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또 SF는 아니지만 웰즈의 방대한 문명비평서인 ‘세계사 대계’(1920)도 일어판이 완역돼 나와 세상과 우주를 보는 거시적 안목을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 청년들에게 소개했다. 당시 이 책을 읽은 학생이 불온문서를 봤다고 해서 학교에서 퇴학당하는 일도 있었다(웰즈는 사회주의자였다). 원로작가 박경리도 당시 이 책을 완독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 책은 우리말로는 완역된 적이 없고 다만 축약본만 나왔다.
본격 SF ‘여인공화국’
아직 연구가 미진해서 단언하기 힘들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해방공간까지 SF 소설사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는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침체는 1970년대까지 이어져 서구 SF의 번역소개도, 국내 작가의 창작 활동도 다 같이 저조했다. 다만 1965년에 ‘주간한국’에서 주최한 제1회 추리소설 공모에 문윤성의 장편SF ‘완전사회’가 당선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무척이나 파격적인 발상을 채택했다. 미래의 지구가 여인들만의 공화국으로 탈바꿈한다는 과감한 설정을 펼치고 있다. 동면에 들어갔다가 깨어난 주인공 청년은 미래의 세계가 여인공화국일 뿐만 아니라 한글 자모가 세계공용어의 알파벳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문체나 어투 등에서 어색한 점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우리나라 SF문학사에서 사실상 최초의 본격 SF장편으로 기록될 만 하다. ‘완전사회’는 1980년대 중반에 ‘여인공화국’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
한편 국내 최초의 과학 전문기자 중 하나인 서광운은 당시 발간되던 ‘학생과학’(1965년 창간)지에 스스로 집필한 SF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더불어 몇몇 청소년소설 작가와 함께 60년대 말에 ‘한국SF작가클럽’을 결성한다. 한국 SF작가클럽은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청소년 대상의 작품집을 출간하는 등 70년대 중후반까지 국내의 SF저변 확대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밖에도 한낙원 등의 작가가 청소년 대상의 SF소설을 다수 발표했다.
한국 SF작가클럽이 1970년대 후반들어 유명무실해진 뒤 국내 창작 SF의 가능성은 좀처럼 움트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몇몇 주류문학 작가들이 SF 소설을 쓰는 시도도 있었지만, SF 독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러가지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들이었다.
번역물로는 1970년대 말에 출간된 동서추리문고가 돋보인다. 아서 클라크의 ‘지구유년기 끝날 때’나 래이 브래드베리의 ‘화성연대기’, 알프레드 베스터의 ‘타이거!타이거!’, 반 보그트의 ‘우주선 비이글호’ 등 서구 SF 걸작들이 다수 포함돼 성인용 완역판 SF에 목말라하던 SF 독자들의 갈증을 다소 해결해주었다. 이 책들은 일본의 가도카와문고나 하야카와문고의 일역판 SF들을 다시 번역한 것. 이 밖에 유명한 아서 클라크의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도 이 시기에 번역돼 나왔다.
신기원 ‘비명을 찾아서’
1987년에 복거일은 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발표해 우리나라 주류문학계에서 커다란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토오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했으나 죽지않고 살아났다는 가정아래, 한반도가 계속 일제의 식민지로 남은 채 1987년(쇼오와 62년)의 시점에 이르렀다는 가상의 역사를 주욱 펼쳐낸 이 작품은, 그 신선한 발상과 치밀한 세부 묘사로 비평가들로부터의 찬사와 함께 상업적 성공을 모두 거두면서 한국 현대문학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복거일은 한국 최초의 컴퓨터통신 연재 SF소설인 ‘파란 달 아래’를 발표해 미래의 달 기지에서 벌어지는 남북통일 문제를 다루었고, 또 대하 장편 ‘역사속의 나그네’를 출간하면서 조선시대와 미래의 통일 한국을 넘나드는 야심찬 시간여행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우리나라 주류문단의 평론가들은 SF문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거의 없었기에 복거일의 작품도 그러한 입장에서는 평가하지 못했고, 그 결과 복거일의 성공은 우리나라 창작 SF 문학의 발전에는 그다지 뚜렷한 기여를 못했다. SF라는 틀 안에서 보자면 복거일 개인의 문학적 역량이 워낙 발군인 까닭에 비슷한 작가가 또 쉽사리 나오기 어려웠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그는 서구의 SF소설들을 방대하게 섭렵한 전형적인 ‘SF 마니아’ 출신이었고, 자신의 작품 역시 어느 정도 서구 SF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SF라는 장르를 인정하고 키워나갈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
신세대 작가들 출현
한편 1980년대 중반에 창간된 ‘스포츠서울’에서는 국내 최초로 신춘문예 공모에 SF부문을 신설해 계속 신진 작가들을 배출해오고 있으나, 이를 통해 등단한 작가들은 현재까지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혀 새로운 작가군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다. 컴퓨터통신 이용자들 중에 자신이 창작한 소설을 온라인으로 연재하는 아마추어 작가들이 생겨났는데, 이들 중 몇몇이 호응을 얻자 상업적인 출간을 시도했다. 이른바 ‘통신 작가’들은 SF, 환타지 등 여러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고 그들 중 일부는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이런 ‘선 통신, 후 출판’의 패턴은 그후 출판 기획의 한 방식으로 굳어져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90년대 들어서는 주류문단의 작가들도 SF적 설정에 관심을 가져 적잖은 수의 신예 및 기성 작가들이 SF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예를 들면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윤명제의 ‘개마고원’은 미래의 우리 사회를 배경으로 등장시킨 소설이다.
1990년대는 가히 우리나라 SF계의 발흥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90년대 초반에 해외의 고전 걸작 SF들이 다수 번역돼 나왔고 또한 국내의 주요 컴퓨터통신망마다 젊은 연령층으로 구성된 SF 동호회들이 다수 생겨나 적극적인 독자층을 형성했다. 이들은 2000년 초에 국내 최초의 ‘SF 컨벤션’을 열기 위해 공동으로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또 상업적 활동을 하는 SF작가 및 번역자, 편집자의 모임도 생겨났으며, 창작 SF들의 출간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내창작 SF들은 대부분 독자들에게서 이내 잊혀지고 말았는데, 그 중에 SF독자들로부터 일정한 평가를 받은 작가는 일명 ‘듀나’라는 통신아이디로 잘 알려진 이영수와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SF부문 출신인 김호진 등이 있다.
주류문단 출신으로 SF나 환타지 장르에 관심을 갖는 작가들도 꾸준히 나왔다. 경향신문 출신의 이한음은 자연과학을 전공한 배경으로 SF단편을 꾸준히 발표하다가 단행본 작품집 ‘신이 되고 싶은 컴퓨터’(밀레니엄북스 시리즈 제8권)로 묶어냈고, 조선일보 출신의 박은철은 환타지 대하소설의 공동집필 작업을 시작했다. 90년대 후반의 두드러진 특징은 환타지문학의 유행이기도 하다. 환타지 문학이란 현실세계가 아닌 환상(환타지)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한 문학이다. 마법이나 전설 등이 주요 소재로 쓰이며, ‘드래곤 라자’(이영도 작) ‘용의 신전’(김예리 작) 등이 이에 해당한다.
주류문학과 경계 흐려져
21세기를 앞둔 현재 우리나라의 SF문학은 좀 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서구나 일본과는 달리 활자매체로 출판된 SF의 기초가 매우 부실한 상태인데다가, SF의 주독자층인 젊은 연령대의 사람들은 활자보다 영상매체에 더 익숙해 있다. 수적인 비중은 작지만 상대적으로 잘 조직돼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또다른 SF독자들은 사이버 공간이라는 제3의 매체에서 SF를 즐기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급변하는 사회와 과학기술의 발달이 점점 SF와 주류문학의 경계를 모호하게 허물어가고 있다.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일찌기 70년대에 SF의 미래가 비관적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사회가 점점 복잡하게 발전해나감녀서 SF만의 고유한 독자성은 갈수록 색이 바랠 것이라고 했다.
아무튼 우리나라 SF문학의 미래는 이제까지 서구에서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그게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명백할 것이다. 21세기라는 새 천년의 희망과 기대, 또는 절망과 회의 등 온갖 입장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서 하나의 거대한 만화경을 이룰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