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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만에 깨진 원자

원자를 구성하는 양성자 발견


1897년 전자를 발견한 J.J. 톰슨.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370)는 자연의 모든 물질을 쪼개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알갱이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톰(atom : 그리스어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뜻)이라고 불렀다. 아톰은 우리말로 하면 ‘원자’(原子)다. 아톰이 다른 물질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은 데모크리토스 이후 20세기 초까지 2천4백여년 동안 과학자들이 믿어왔던 진리였다.


더욱이 19세기 초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돌턴(1766-1844)이 원소들을 정리하면서 “물질을 세분하면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미립자인 원자가 나오고, 동일한 원소의 원자는 질량이나 성질이 같고 다시 부수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그 믿음을 굳게 다졌다.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X선, 베크렐선과 같은 방사선을 내는 특이한 방사성 원소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원자 내부에 있는 어떤 입자들의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원자 속에 뭐가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처음으로 풀어준 사람은 영국의 물리학자 J. J. 톰슨(1856-1940)이었다. 그는 1897년 전자를 발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04년 건포도 푸딩 모형(plum pudding model)이라는 원자모델을 만들었다. 푸딩 같은 원자 내부에 건포도 같은 전자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가설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제자인 러더퍼드(1871-1937)가 원자 내부에 핵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러더퍼드는 1910년 방사성원소인 라듐으로부터 나오는 알파입자를 아주 얇은 금박에 때려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살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알파입자들이 금박을 그대로 통과했지만 일부 입자들은 커다란 각도로 산란됐다. 이것은 원자 내부에 원자 크기에 비해 매우 작은 핵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원자핵이 양성자로만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전자와 양성자의 수를 맞춰 원자 자체를 중성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그는 전자가 양성자로 이뤄진 원자 핵 주위를 도는 새로운 원자모델을 만들어 1911년 5월 7일 맨체스터 철학협회에 발표했다.

 

그런데 러더퍼드의 모델은 결정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맥스웰 전자기이론에 따르면 원운동하는 전자는 가속되기 때문에 반드시 전자기파를 내보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전자는 에너지를 잃고 점차 핵으로 빨려 들어가야 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원자의 무게가 양성자의 무게를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무겁다는 사실이다.


첫번째 문제는 1913년 러더퍼드의 제자인 덴마크 출신의 닐스 보어(1885-1962)에 의해 해결됐다. 보어는 원자의 전자궤도에는 안정된 궤도가 존재해 전자가 이를 도는 한 에너지를 잃지 않고 운동할 수 있으며, 다른 궤도로 옮길 때만 전자기파를 방출하고 에너지를 잃는다고 설명했다. 보어는 양자론을 도입함으로써 러더퍼드의 고민을 해결한 것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전자는 플랑크 상수의 정수배가 되는 안정된 궤도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원자핵으로 빨려들어가는 일이 없다. 또한 원소들이 왜 저마다 독특한 분광 스펙트럼을 가지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결국 러더퍼드의 원자모델은 러더퍼드-보어의 원자모델로 학자들 사이에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또한 이 이론을 제기했던 보어는 1920년대에 화려하게 꽃피웠던 양자역학의 구심점이 되어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 논쟁을 벌였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아인슈타인에게, “아인슈타인, 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하지 마시오”라고 핀잔을 줄만한 과학자는 보어밖에 없었다.


그러나 러더퍼드-보어모델은 여전히 원자량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것은 1930년 러더퍼드의 지도를 받은 영국의 물리학자 채드윅(1891-1974)이 중성자를 발견함으로써 해결해냈다. 원자의 질량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무게를 합한 것이었다.


러더퍼드는 가이거(왼쪽)가 만든 알파입자 계수기를 이용해 원자핵을 발견했다.


영국의 자존심 캐번디시연구소 - 실험물리의 메카

캐번디시연구소(www.phy.cam.ac.uk/cavendish/)는 1873년 케임브리지대학 부설로 설립됐다. 이름을 빌려준 헨리 캐번디시(1731-1810)는 영국의 전설적인 과학자로, 정전기, 비열, 열팽창 등에 관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지구의 무게를 재는데 필요한 중력상수 G를 처음으로 측정하기도 했다.


캐번디시연구소는 초대소장인 물리학자 맥스웰(1831-1879)을 비롯해, 제2대 레일리(1904년 노벨물리학상), 제3대 J.J. 톰슨(1906년 노벨물리학상) 제4대 러더퍼드(1908년 노벨화학상), 5대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1915년 노벨물리학상), 제6대 네빌 모트(1977년 노벨물리학상) 등 쟁쟁한 과학자들이 이끌어왔다. 그 전성기는 톰슨과 러더퍼드 시대였다.


그동안 캐번디시 출신으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30여명. 러더퍼드가 소장이었던 시절 근무했거나 그의 지도를 받은 사람으로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존재를 밝힌 소디(1921년 노벨화학상), 질량분석기를 개발한 애스턴(1922년 노벨화학상), 원자구조를 밝힌 보어(1922년 노벨물리학상), 중성자를 발견한 채드윅(1935년 노벨물리학상), J.J. 톰슨의 아들 조지 톰슨(1937년 노벨물리학상), 전리층을 발견한 애플턴(1947년 노벨물리학상), 양성자 가속기를 만든 코크로프트와 월턴(1951년 노벨물리학상) 등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이 당시 캐번디시연구소를 거치면 노벨상은 거의 떼논 당상이었다.


캐번디시연구소 출신으로 생리의학 부문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힌 왓슨과 크릭으로, 1962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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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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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조사연구팀
  • 홍대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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