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6일부터 31일까지 한국과학사학회와 한국과학저술인협회 주관으로 제8회 국제동아시아과학사회의가 서울대학교에서 개최됐다. 동아시아 지역의 과학기술사를 연구하는 세계적인 석학들이 모인 이 회의의 개막 연설에서 박성래 교수(외국어대학교 사학과)는 중국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왜곡한 점을 정확하게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세종 때 조선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져 18세기까지 조선에서만 제작되고 사용된 측우기를 중국에서 먼저 만들어 한국에 보낸 것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해서였다.
이 사실을 언제 어떻게 발견했나
1986년경 어느날 서울대학교 대기과학과 김성삼 교수가 찾아와 “중국인이 쓴 어떤 글을 보니 측우기가 중국에서 먼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근거가 있느냐”고 물은 것이 관심을 가진 계기였다. 이후 중국을 여러번 방문하면서 중국과학사책을 수집하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모든 책에 중국이 측우기의 원조국이라고 기술돼 있었던 것이다. 국제 학술회의에서 이 사실을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떤 부분이 잘못됐나
현재 기상대에 보관된 측우기와 그 받침대인 측우대가 세상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측우대는 1770년에 만들어졌고 측우기의 제작 연도는 사실 정확히 알 수 없다. 물론 측우기를 처음 만들어 배포한 것은 세종24년(1442년)의 일이다.
그런데 중국학자들은 명(明) 초기인 1424년 측우기가 중국에서 전국적으로 배포됐고, 기상대에 있는 우리나라 측우기도 중국에서 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국학자들이 그렇게 믿는 이유는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정확한 검증 없이 그렇게 믿어버린 것 같다.
중국책을 보면 1424년에 먼저 만들었다는 주장을,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나라 책이 아닌 우리나라 ‘문헌비고’에 근거해 설명했다. 그러나 ‘문헌비고’에는 그런 말이 없다. 단지 우리나라 측우기가 세종24년에 만들어졌다는 점과 크기가 표시돼 있을 뿐 중국에서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추측하건대 ‘세종24’란 말을 착각해 ‘1424’라고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자기들이 만들어서 우리나라에 보냈다고 자의적인 해석을 내린 듯하다.
또 기상대 측우기에 대한 오해는 측우기 받침대에 세워진 ‘건륭경인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는 글자 때문이다. 건륭은 청나라 고종(1736-1795)의 연호이며, 경인년이면 1770년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물건에 중국연호가 새겨 있는 것을 보고 그런 착각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조선 왕조는 중국 연호를 그대로 썼다. 중국학자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고 연호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중국학자들의 반응은 어땠나
재미있게도 공식적, 비공식적 자리 모두에서 중국학자 중 아무도 내게 코멘트하지 않았다. 혹시 영어 발표에 익숙하지 않은 학자들이 있을까 해서 일부러 발표문에 중국책 원본을 실었기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남겨진 과제는
측우기의 원조국이 우리나라라는 사실은 1910년 한 일본 기상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서양에 알려졌다. 그의 논문은 같은 해 가을 영국 ‘기상학회지’에 영문으로 번역됐으며 다음해에는‘네이처’에 기사 형식으로 보도됐다. 그런데 불과 반세기를 거치면서 이번에는 중국인들이 측우기가 중국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국기상사’라는 책에는 측우기가 아예 표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너무 무관심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나라 학자들이 우리의 과학사를 왜곡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다른 예로 1966년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8세기 초) 목판인쇄물인 ‘다라니경’을 들 수 있다. 중국학자들은 당(唐)에 유학간 학생과 승려가 이것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학자들도 ‘다라니경’이 우리의 것이라는 근거를 좀더 명확히 밝혀야 하겠지만 중국학자들이 일방적으로 단정짓는 것은 큰 문제다.
선조들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업적을 잘 보존하고 응용하기 위해 무엇보다 모든 전통과학기술을 ‘문화재’로 인식하고 연구하는 일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