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 울창한 정글 등으로 스리랑카는 지구상에서 아직까지 오염되지 않은 나라로 꼽힌다.
스리랑카는 인도대륙 남동쪽에 있는 섬나라다. 지형은 남북으로 긴 서양배 모양으로 중남부가 고원지대이며 그 주변은 해안선을 향해 낮아지고 넓은 평야가 전개된다. 최고봉은 높이 2천5백24m의 피두루탈라갈라산이며, 중앙 산맥에서 발원한 하천은 수량이 풍부해 관개에 이용되는데, 항행에는 적당하지 않다.
기후는 적도에 가깝기 때문에 열대성이지만 비교적 온화하다. 수도 콜롬보의 평균기온은 27℃이며 지역에 따른 연간 기온의 변화도 적다. 5~9월에는 남서 몬순이 불고, 11~3월에는 북동 몬순이 부는데, 전자는 남서부에 다량의 비를 내리게 해 농작물의 성장을 돕는다.
그러나 산지의 배후인 북동부는 강수량이 적은 건조지대로 불모지가 많다. 전인구(91년 추계 1천7백40만명)의 70%는 국토(6만5천6백10㎢)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남서부의 습윤지대에 밀집해 있다. 콜롬보의 연평균 강수량은 2천3백97mm.
식민지로 각국의 통치를 받아온 나라
스리랑카의 인구 가운데 약 70%는 아리아계의 신할리족으로 서부 및 고지에 살고 신할리어를 사용하며 주로 불교를 믿는다. 타밀어를 사용하고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은 주로 북부와 동부에 살며 인도로부터 플랜테이션 노동자로 이주해 온 인도계 타밀인과 합해 22%를 차지한다. 그밖에 무어족(이슬람 교도) 등의 소수 민족이 있다. 공용어는 신할리어다.
스리랑카는 기원 전 643년 인도 북부 아리아인에 의해 신할리 왕국이 건립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기원 전 3세기경 인도 힌두교인 타밀족의 침입을 받으면서 시작된 신할리왕조와 타밀왕조의 분쟁은 양민족 간에 심각한 대립을 일으켜 왔다.
침략 받기 쉬운 지형적 특성과 아름다운 자연환경, 풍부한 지하자원은 일찍부터 서방국가들의 침략 표적이 됐다. 1505년부터 1602년까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 조상들은 가톨릭 영세를 받고 자기 이름 대신 영세명을 가진 가톨릭교인들로 살았다. 그러나 1602년 네덜란드가 침입해 포르투갈인을 몰아냈으며 1795년에는 영국이 다시 네덜란드를 굴복시키고, 1815년에는 캔디에 근거를 둔 마지막 신할리 왕조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처럼 오랫동안 식민지로 지내온 이 나라는 1948년 마침내 영국 연방 내의 자치령으로서 독립했다. 1972년 국명을 실론에서 스리랑카 공화국으로 개칭해 영국 연방 가맹의 완전 독립국이 됐다가 지난 78년 현재의 국명인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생활철학은 조상들이 전승해준 관습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 관습이란 바로 불교다. 1백97년 전 제정된 스리랑카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인공으로 만든 베이라 호수를 끼고 콜롬보 바닷가를 지나면서 가끔씩 보게 되는 성당과 교회, 모스크는 이 나라에 종교의 자유가 있음을 믿게 한다.
그러나 한가지 의심가는 대목이 있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헌법에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기록된 단서 조항이 그것이다. 타밀족과 신할리족 간의 내분을 일으키는 직접동기가 바로 헌법에 명시돼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외침을 받으며 여러 문명국들을 통치국으로 받들어야 했던 기구한 나라 스리랑카. 이 나라를 지탱해준 것은 불교였다. 스리랑카가 이념적 지주를 불교로 선택한 것은 역사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뿌리 깊은 식민지의 경제구조
신할리족을 지칭하는 '랑카'에 경칭어 '스리'를 앞에 붙여 '위대한 신할리족의 나라' 라고 국명을 바꾼 것은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이었을 것이다.
신할리족의 조상인 비자야가 이 아름다운 섬나라에 도착한 것은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그날이었다고 한다. 신화적 인물인 비자야의 상륙과 부처님의 죽음이 필연적 신화를 만들면서 민족과 불교를 하나로 묶게 하는 힘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로 뭉치려는 '힘'은 심각한 저항을 받게 된다. 타밀족의 증오심이 그것이다. 2천5백년동안 이 나라 국민을 지탱해 준 불교는 타밀족에 의해 끝없는 저항을 받아왔고 지금도 동족간의 싸움은 계속 중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싸움은 순수한 신앙심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라 종교를 빙자한 정치권력의 싸움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스리랑카의 산업경제에는 식민지적 경제구조가 뿌리 깊이 박혀 있다. 그동안 차 코코넛 고무가 수출품의 주류를 이루어 왔으나, 최근 시장경제로의 체제변화를 꾀한 끝에 지난 90년 산업제조품이 수출액의 52%를 기록, 전통 농산품 수출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인구의 75%가 살고 있는 농촌에서는 자본주의적 대경영(플랜테이션)과 소농(小農)경영이 병존하고 있다. 쌀의 자급률은 50~60%다.
광업부문에서는 질 좋은 흑연과 사파이어 루비 등 여러 종류의 보석이 생산된다. 수자원은 풍부하지만 자급능력을 갖추지 못해 수산업이 뒤지고 있다.
금은빛으로 반짝이는 모래밭을 1천5백km나 가지고 있는 스리랑카는 '동양의 진주'라는 말을 들을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바다와 푸른 하늘, 울창한 정글 등으로 스리랑카는 지구상에서 아직까지 오염되지 않은 나라로 꼽힌다.
스리랑카는 일찍부터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불교미술의 유적이 풍부한데, 그 대표적인 것은 스투파(塔婆)와 그 부속조각이다. 그밖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고적과 사원 교회 등도 많다. 민속예술속에도 그 전통이 풍요롭게 남아 있으며 지방마다 전통음악과 무용이 있다.
국민들은 1년에 4대 행사(Hatara Mangalle)로 불리는 축제를 성대하게 치른다. 그만큼 축제를 한없이 즐기는 민족이다. 네 번의 큰 축제중에 캔디에서 열리는 페라헤라(perahera)는 스리랑카를 지켜준다는 네 신에게 복을 비는 가장 규모가 큰 축제다.
캔디의 수호신인 나타신과 스리랑카의 수호신인 비슈누신, 그리고 전쟁과 승리의 신스칸다와 순결의 여신 파티니신에게 봉헌하는 화려한 축제다. 8월에 열리는 장엄한 축제는 밤낮없이 11일동안 거리에서 펼쳐진다.
아프리카만큼 동물종류 많아
신비한 신할리 춤을 배경으로 현란한 북소리의 진동음, 시민들의 함성과 괴성, 기기묘묘하게 치장해서 더욱 웅장해뵈는 코끼리의 행렬, 광기 어린 횃불놀이 속에 펼쳐지는 민속놀이는 전율스럽기까지 하다.
이처럼 나라가 온통 떠들썩하도록 치러지는 축제는 힌두교의 사당과 불교의 불치사(佛齒寺)가 공동으로 개최한다. 주민들은 페라헤라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면 많은 비를 내려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축제의식은 거의가 대승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프랑스 국영 방송국 다큐멘타리 제작팀은 이미 6개월 전부터 스리랑카 전역을 누비며 페라헤라를 찍기 위한 준비작업을 해왔다고 한다. 그만큼 규모가 큰 세계적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스리랑카에서 제일 큰 강 마하웰리강가강을 끼고 있는 캔디는 다양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 산재해 있는 문화유적, 예술의 중심지 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 세계 제일의 사원 불치사가 있고 국립 박물관도 이곳에 있다.
콜롬보에서 북쪽으로 1시간 정도 자동차로 달리면 네곰보(Negombo)가 있다. 코코넛 나무들이 무리지어 서 있는 해변에서 바다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의 모습은 참으로 기묘하다. 긴 장대를 물 속에 박아 놓고 장대 중간에 원숭이처럼 걸터앉아 낚시를 하는데,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불같이 타오르는 듯한 바다의 저녁 노을을 마주하고 고기를 낚아 올리는 낚시꾼들의 모습은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해산물이 풍부해 미식가들의 천국이기도 한 네곰보는 해물 요리로도 유명하다.
스리랑카는 아직도 국민의 80%가 맨발로 지낸다. 근래에 와서 차츰 구두를 신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생긴 병이 무좀이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 무좀은 문화병으로 통한다.
이곳은 과일이 무진장하게 많은 나라여서 어딜 가도 발길에 차이는 게 열대 과일이다. 그 많고 많은 과일중에 스리랑카 망고는 맛이 세계 제일이다. 호들갑스럽지 않고 은근한 맛은 그 여운이 혀끝에서 오래 남는다. 온갖 희귀한 동물들의 낙원이기도 한 스리랑카는 아프리카와 맞먹을 만큼 동물의 종류도 많다.
스리랑카의 하늘과 바다는 파랗다. 파랗다는 느낌에는 '투명하다'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눈이 시려 차마 마주 바라볼 수 없는 푸른 하늘을 가진 축복의 나라가 바로 스리랑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