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내세관에 의해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어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이집트인이 처음이다.
미이라는 포르투갈어로 사전적인 표현에 의하면, 약품 따위를 넣어 썩지 않도록 한 시체나 묘의 자연적 조건에 의해 본모양 그대로 남아있는 송장을 의미한다. 영어권에서는 미이라 대신 머미(mummy)를 쓴다. 그러나 이 단어 자체도 영어가 아니라 아랍이나 페르시아의 'mumiya'란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의 뜻은 역청(瀝靑)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이를 기술해 놓은 그리스의 역사가들은 이집트에서 시체에 입힌 밀랍이나 역청이 수지나 공기주의 산소 반응에 의해 미이라가 검게 된 것으로 추축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만의 독특한 내세관
우리는 주위에서 묻힌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썩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미이라 형태를 많이 보게 된다. 이런 경우는 대개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이런 지대는 약알카리성의 토양, 건조한 모래사막, 동토지대, 늪지대(이탄지대도 포함)와 탄산칼슘(CaCO3)이 않이 포함된 석회암지대가 해당된다. 그리고 인위적인 것이긴 하지만 관 안에 숯을 많이 넣거나, 시체가 들어 있는 관 주위에 모래, 자갈과 회로 다진 삼물회(三物灰, 이는 조선시대에 현대판 콘크리트와 같은 원리로 만들어졌다)로 곽을 만든 경우에도 시체가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조의 무덤인 회곽묘에서 시체나 수의가 썩지 않고 그대로 발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강력한 종교적 내세관에 의해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어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이집트인이 처음이다. 고대의 이집트인들은 사후의 세계를 믿었다. 그들의 내세관은 그 자체로 완벽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생각이 나타나 서로 모순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집트인은, 사자(死者)는 비록 무덤안에 있지만 멀리 떨어진 축복받은 내세에서 여러 신들과 교류하면서 산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어떤 문명권에도 없었던 이집트인만의 독특한 사자의 내세관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 복잡하게 표현했다. 자신의 육체, 이름과 초상 이외에도 자신의 본질을 대표하는 보이지 않는 쌍둥이 육신인 카(ka) 인간머리를 가진 새 영혼을 나타내는 바(ba), 그리고 죽어서 얻어지는 영적인 상태의 아크(akh)의 세가지 추상적인 것들이 합쳐져야 자신을 입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사후 자신의 시신은 땅 위에서 휴식처가 필요했고, 시신을 썩지 않은 상태로 보존하고자 했다. 그래서 미이라를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겼다.
이집트인들은 초기부터 그들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한 조처를 취했다. 처음에는 모래속에 그들의 시신을 매장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덤은 점점 정교해지고, 시체는 가죽이나 수의로 싸서 보존하게 됐다. 나무나 돌로 짜 만든 무덤도 나오게 되고, 가끔 동굴도 무덤으로 이용하게 됐다. 그리고 시신을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점차 인위적인 방법으로 보존하려고 했다. 그래서 방부제를 넣어 시체를 보존하는 방법이 고안됐는데, 이것이 처음 미이라를 만들게 된 시초다.
엄격한 종교의식 따라 만들어
미이라를 만드는 과정은 엄격한 종교적 의식에 따라 행해진다. 준비기간만도 70일이 걸리며, 또 과정의 각 단계마다 관계된 제식이 따른다. 미이라를 만드는 곳은 사원에 부속된 건물로 한정된다. 그러나 사자의 집 근처에 마련된 간이 장소에서 미이라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시체를 미이라로 만드는 첫 과정은 썩기 쉬운 부분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어서 미이라사(師)는 탁자와 같은 긴 상위에 시체를 뉘어놓고 콧구멍 속으로 금속 탐침이나 갈고리를 넣어 뇌를 제거한다. 그리고 빠져나온 뇌는 버린다. 그런 다음 몸의 옆구리 부분을 절개해 내장을 꺼낸다. 그러나 심장만은 몸속에 그대로 놔둔다. 간 폐 위와 창자들은 별도의 용기에 담는다. 뚜껑이 있는 각각의 용기들은 호루스란 신의 네아들에 의해 보호받는다. 간은 임테스티, 폐는 하피, 위는 두아무테프, 그리고 창자는 케베세누에프 신에 의해서 보호받는다.
몸 자체는 말린 생선과 유사한 방법으로 처리된다. 소금 대신 이집트에서 몇 군데 밖에 안나오는 귀한 천연탄산소다(natron)가 이용된다. 용해된 천연탄산소다를 몸 안에 넣는다. 그리고 몸 바깥쪽은 포장하지 않은 천연탄산 소다나 아마포로 싸인 뭉치로 감싼다. 몸의 수분이 천연탄산소다에 의해 흡수되면 이들 뭉치는 제거된다. 그리고 시체는 물을 묻힌 스펀지로 씻겨진다. 피부는 침엽수의 수지로 씻겨지고, 몸의 움푹 들어간 부분은 수지가 묻힌 아마포뭉치로 메꾸어진다. 그런 다음에야 시체는 아마포로 싸여져 우리가 잘 아는 미이라의 형태가 된다.
몸의 본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미이라사는 건조과정에서 생긴 움푹 들어간 부분에 아마포 뭉치를 메꾸어 넣는다. 팔 다리 손가락과 발가락도 따로따로 붕대로 싸맨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20겹의 붕대나 수의가 한시체의 몸에 싸여지게 된다. 그리고 한겹 한겹 쌀때마다 수지를 발라 접착이 용이하도록 한다. 또 장례용 보석이 간간이 그 사이 사이에 넣어지기도 한다. 미이라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백 제곱미터의 아마포가 필요하다. 수의는 1.8~2.7㎡이고, 붕대와 끈은 5~20cm 폭과 0.9~6m 길이가 된다. 붕대를 풀어보면 그 속에서 잉크로 쓰여진 짧은 종교서적이나 사자의 이름이 발견된다. 대부분의 경우 사자의 얼굴을 표현한 마분지형태의 도금 가면이 얼굴 위에 놓여지고, 그런 다음 이것을 포함해 시신 전체가 다시 아마포로 한겹 싸여진다.
아마포로 미이라를 싸는 것이 끝나면, 미이라를 만들때 사용된 모든 관련 재료들은 한꺼번에 항아리에 담겨 무덤 주위에 묻혀진다. 여기에는 미이라사가 실수해서 떼어놓은 귀나 발가락들이 소금이나 남은 아마포에 싸여 항아리 속에 한꺼번에 보존된다. 어떤 경우 팔이나 다리와 같은 신체의 큰 부분이 미이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잃어버려 나무로 대신해 넣거나, 또 관이 미이라에 비해 적으면 고의로 빼기도 한다.
영원한 생을 즐기기 위해서
미이라를 만드는 과정은 장례 절차의 하나다. 무덤의 축조나 장식은 사자(고인)의 생전에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목제관이나 석제관, 그리고 이를 장식하고 조각하는 기술자들이 필요하게 되고 또 거기에 드는 비용도 엄청나다. 칠도 관에 직접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입힌 석고나 나무에 접착시킨 아마포 위에 하게 된다. 사자의 상은 가족의 것들과 함께 무덤속에 같이 놓여진다. 장례행렬은 사제 친척 친구 하인과 직업적인 애도꾼들로 이루어진다. 큰 관은 소가 끄는 마차에 실려 무덤에 이르게 된다, 무덤속까지 관의 운반은 짐꾼들이 맡게 된다. 내세의 행복을 위한 부장품은 가구 무기 보석 음식 아마포 등 이승에서 살 때 편안하게 해주었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집트의 미이라에 관한 지식은 그리스의 역사가이며 여행가인 헤로도투스(B.C.450)와 B.C.60~57년 이집트를 여행했던 디오도루스 시큐루스의 기록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당시 가장 비싸게 먹히는 미이라의 제작비는 66파운드나 되고, 중간치는 20파운드가 된다는 식의 세세한 점까지도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다.
미이라가 관에 넣어지기 전 제사장의 집전으로 의식이 행해지며, 또 매장된 후에도 무덤에서 매일같이 의식이 이루어진다. 장례에 관한 기록은, 사자는 이승에서의 지위와 종교적 생활을 증명하기 위해 지하의 신들이 모인 법정에 서야함을 알려준다. 지하세계 최고의 신 오시리스가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며, 따오기머리를 한 토트신이 그 결과를 기록한다. 사자의 심장이 저울의 한쪽 접시 위에 놓여지며 질서 균형과 진리의 신 마트의 상징인 깃이 반대편 접시 위에 놓여진다. 균형이 맞으면 사자는 내세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그의 영혼은 사자 악어 그리고 하마의 모습을 합한 고블러라 불리는 동물에 먹혀버린다. 그래서 사자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부적을 갖고 가는데, 시대에 따른 묘제의 변천과 함께 부적도 달라진다. 처음에는 피라미드 내의 석벽에 그려진 부적이나, 그 다음에는 관에 넣어지는 부적으로 바뀐다.
이집트의 묘제는 B.C.3500년경에 처음 나타나는 낮은 계단상의 마스타바에서, 그 다음 고왕조 초기인 4왕조(B.C.2630~2524)에는 피라미드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왕조(B.C.1567~1085) 때에는 테베의 왕묘 골짜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암벽을 파고 들어간 암굴묘로 변천돼 왔다. 암굴묘의 대표적인 예는 9년을 통치하고 18세에 요절한 18왕조의 투탄카멘(B.C.1358~1349)왕묘가 될 것이다. 이들 묘의 건립은 내세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려는 사자의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바람 때문이었다. 라메시드의 파피루스에서는 당시의 도굴범과 잡힌 도굴범에 대한 처벌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도굴범에 대한 피해가 매우 극심해 무덤을 만들 때마다 이들을 속이기 위한 교묘한 수단이 강구되곤 한다. 도굴범에 의해 자신의 영원한 휴식처가 짓밟히고 유린당할 것을 뻔히 알고도 무덤을 계속 만든다. 이는 그들의 종교적 내세관대로 영원한 생을 즐기기 위함이다. 그래서 죽어서도 영원히 살 수 있는 미이라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