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1986년 11월 28일 남극조약에 가입함으로써 33번째 남극조약 가입국이 되었다. 또한 금년 2월에 스코티아해에 위치한 킹조지섬의 바튼반도에 세종기지를 건설, 준공함으로써 세계에서 18번재 상설 남극 과학기지 보유국이 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남극연구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고, 국내의 자연과학 발달사에 획기적인 장을 열게 되었다.
|추위와 더위가 뒤바뀌어
제1차 남극 연구단은 우리나라 남극과학기지 주변 자연환경을 조사 연구하기 위하여 1988년 1월 20일 발단식을 가졌다. 이어 23일부터 수개 조로 나누어 뉴욕을 거쳐 남미 칠레의 최남단 도시인 푼타 아레나스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서울을 떠날 때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마치 남극 연구단원들을 훈련시켜 환송하려는 것처럼.
연구단원들은 1년 동안 세종기지에서 월동할 동계대원들과 남극의 여름기간만 연구하고 돌아올 하계 대원들로 구성되었다. 1년간 가족들과 헤어져 남극에 체류할 연구원들은 헤어지는 아쉬움과 남극에 대한 동경의 마음이 혼합되어 착잡한 기분으로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잦은 출장으로 전송하는 것이 익숙해진 가족들에게도, 남극이라는 곳은 너무나도 먼곳이었다. 항공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하자 대다수 연구원들은 항공기에서 제공하는 한잔의 위스키로 마음을 달랜 후 잠시 눈을 붙였다. 비행기로 하는 장거리 여행은 다른 여행에 비해 동료간의 대화가 적게 되고, 비교적 낭만이 적다고 느꼈다.
우리 연구대원들은 그 다음날 뉴욕을 거쳐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하였다. 북반구 기후에 정반대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비행기가 정지하고 탑승구를 여니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밀려왔다. 서울을 떠날 때의 겨울복장은 뉴욕 케네디 공항의 한파에 오히려 부족함을 느꼈으나, 산티아고 공항에서는 무더운 여름날씨 때문에 짐스럽고 짜증이 나게 하였다. 칠레의 자랑거리인 3W중의 하나인 해양성 기후와 유사해서 기온은 높으나 습도가 낮아 불쾌지수가 낮은 편이다. 공항 밖에서 겉옷들을 벗고 나니 짜증스러웠던 기분이 즉시 사라져 버렸다.
산티아고에서 주칠레 한국대사관과 칠레 남극연구소등을 방문하고 서울에서 구입하지 못한 생활필수품과 연구비품들을 사면서 3일간의 산티아고 체류를 끝내고, 남극을 향해 줄항할 남미대륙 최남단의 항구도시인 푼타 아레나스로 향하였다. 이 항구도시는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관문이었으며, 현재는 남극을 향하는 각국 선박들의 기항지로 알려져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카보 데 오르네스'호텔도 남반구 여름기간에는 남극을 왕래하는 학자들의 집합 장소이다. 우리가 체류한 삼일 동안에도 미국 독일 일본등에서 온 남극분야 학자들을 많이 만날수 있었다.
항구에서 미국 과학재단이 운영하는 폴라 듀크'와 콜롬비아대의 유명한 지구물리 탐사선인 '콘라드'를 보았다. 또 브라질과 우루과이 해군 소속의 연구선들이 남극에서 귀국 도중 기항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머지않아 이곳에서 대한민국 남극 조사선이 기항하는 광경을 보게 될 걸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졌다. 푼다 아레나스는 민항기의 최남단 공항인 동시에 남극을 왕래하는 유일한 항공수단인 칠레 공군 C-130기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남극연구에는 스페인어가 필수적
제1차 연구단원들은 푼다 아레나스에 위치한 코마파 해운회사에서 조사선을 빌렸다. 필요한 연구부품과 월동대원들이 사용할 식품류들을 구입하여 세종기지로 운반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우리 단원들 중에는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다만 현지에서 채용한 재칠레 교포인 H씨만이 유일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하였다. 많은 연구원들이 영어와 불어 독일어를 할 수 있었으나 스페인어를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남극에 관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남미를 경유해아 하는데 남미에서는 스페인어 이외는 거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또한 세종기지와 인접한 외국 기지에서도 스페인어가 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에서도 남극에 관한 연구활동을 증대해 나가기 위해서는 스페인어의 학습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칠레에서 임대한 조사선(Cruz De Froward)에 필요한 장비들을 설치하고 동계대의 생활필수품을 선적하여 2월 6일 저녁 9시 45분 대망의 남극해 운항이 시작되었다. 해양연구소에서 물품구매 관계로 온 분들과 해운회사 및 선적작업에 수고한 칠레 현지인들의 환송을 받으며 조사선의 출항신호인 고적소리에 맞추어 우리 연구단들은 맥주를 높이 들고 역사적인 순간을 자축하였다. 푼타 아레나스는 고위도 지방이므로 여름의 낮 길이가 길어서 저녁 10시까지 황혼의 햇볕이 남아 있었다. 서울에서 떠나온 긴 여행이기도 했지만 준비에 심신이 피로해진 연구단원들은 출항 축하파티의 맥주 기운으로 즉시 잠자리에 들어갔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남극까지의 항로는 태평양 연안에 산재한 수 많은 섬 사이로 연결되는 마젤란 해협(현지에서는 마갈란으로 불리움)과 그 남쪽에 위치한 비글수로를 거쳐, 남미대륙최남단 섬인 호온곶(Cabo de Horne)을 지나 드레이크 해협을 횡단해야만 우리나라 세종기지가 있는 남 쉐틀랜드 군도에 도달할 수 있다. 마젤란해협은 16세기 초 저유명한 마젤란에 의해 발견된 곳으로 태평양의 동쪽 끝과 대서양의 서쪽 끝을 연결하는 곳이다. 파나마 운하가 개통하기 이전에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수로는 캐나다 북단의 서북수로(Northwest Passage)와 더불어 마젤란 해협 비글 수로 남단의 드레이크 해협이 유일한 항로였다.
푼타 아레나스를 떠난 조사선은 무풍의 호수를 지나듯 작은 요동도 없이 항해하여 연구단원들은 오랫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새벽 5시경 햇살이 선실의 커튼사이로 강하게 비쳐 들어왔다. 단잠에서 캐어난 연구단원들은 눈을 비비며 조사선의 뱃머리로 모여들었다. 주변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연결되고, 산빙하와 곡빙하에 의해 삭박(削剝)된 높고 낮은 산들이 연속되었다. 조사선이 항해하는 동안은 바람 한점없는 맑은 날씨였으나 산을 덮고 있는 수목들은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비스듬히 누워있어 이 지역의 강풍을 알 수 있게 했다.
마젤란 해협을 벗어나니 비글수로가 연결되었다. 서쪽은 칠레이며 동쪽은 아르헨티나 영토였다. 이 지역은 19세기 이래 두나라 사이에 경계선 문제로 분쟁이 많았던 곳으로 1984년 교황 바오로 6세가 두나라 사이를 중재, 우호조약이 체결되고 평화적으로 경계가 확정되었다.
|악몽의 드레이크해협
마젤란해협과 비글수로를 지날 때는 미국의 오대호에서 배를 타는듯 파도 한점 없는 수면을 조사선은 시속 12~13노트로 쏜살같이 나아갔다. 그사이에 어느덧 낮시간이 지나고 어둠이 찾아왔다. 몇시간 눈을 붙였다고 생각되는 순간 조사선이 서서히 요동을 시작하였다. 비글수로가 끝나고 세계에서 제일 험악하다고 알려진 드레이크해협이 시작되었다. 점차 파도가 높아져 조사선은 항해 속도가 늦어지고 몸부림(pitching)과 요동(rolling)를 심하게 하였다.
연구원들은 심한 파도에 그간 준비해온 접착용 멀미 방지약을 서로 붙여주고 일부 연구원들은 약을 복용하기도 하였다. 항해에 오랜 경험을 가진 연구원들은 일찍 자기 침대에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를 않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4~5m 높이의 파도를 타며 기억가듯 나아가던 연구선이 갑자기 조용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상히 여겨 급히 선장실로 달려가니 해군 대령출신인 선장이 미소를 띠우면서 안심을 시킨 뒤 설명을 하였다. 파도가 너무 심해서 남극을 향해 전진할 수가 없어서 잠시 뒤로 돌아와 피항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선장은 키가 크고 미남형의 독일계 칠레인이었다. 영어를 이용해서 우리들과 의사소통을 하였으며 간혹 나와는 짧은 독일어로 얘기하기도 하였다.
약 5시간의 피항끝에 다시 드레이크해협을 횡단하는 항해가 시작되었다. 날은 밝아왔고 파도는 약간 낮아졌다. 조사선은 드레이크 해협을 횡단하는 것이 처음이었고 칠레 선원들도 대부분 처음이라고 하였다. 다만 선장은 해군에 재직시 남극기지에 근무한 경력이 있엇다. 공해로 나아가기 시작하니 다시 파도가 높아지고 연구단원들은 모두 침대에서 꼼짝 못하였다. 식당에 나타나는 연구원들의 숫자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연구단원중 H박사는 식음을 전폐하고 단식하기 시작하였다. 멀미가 심할 때는 침대에 누워서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일지도 모른다.
해양연구소의 노련한 연구원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식당에 나타나는 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칠레 선원들은 자기 업무에 충실하고 배멀미도 없는듯 하였다. 그중에서 식당의 요리사를 도와주던 키 1백 50cm 정도의 선원은 때가 되면 식탁을 정리하고, 식탁위의 접시들이 밀려다니는 심한 파도에도 자기 직무에 충실하였다. 때로는 파도가 심해져 전혀 식사를 제공받지 못하고 과일과 빵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였다.
드레이크 해협은 남미 최남단의 호온곶과 남극반도 북쪽의 남 쉐틀랜드군도 사이에 위치한 약 1천km 넓이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고 있다.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하기 전에는 무역선의 중요 항로였으며 지금도 대형 유조선과 남빙양을 향하는 어선들의 중요 항로이다. 수심은 평균 3천4백m이며, 일반적으로 초속 10여m의 서풍이 항상 있으며, 때로는 초속 20m의 강풍이 발생한다.
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이 해협의 남부를 자주 통과하여 연중 6~7개월은 구름이 많다. 해협내에서 빙산은 수시로 관찰되며 9월에는 남극대륙에서 남위 60˚까지의 해역 약 4분의 1이 얼음으로 덮인다. 초당 1억9천만㎣의 해수가 남극 순환해류에 의해 서에서 동으로 운반되며 수온은 남극수렴선(대체로 남극의 45˚선)을 경계로 북부에서는 6℃이나 남극에서는 영하의 수온으로 급격히 변한다. 이 해협에는 '크릴새우' 등이 풍부하여 11월~2월 기간중 우리나라의 동방원양회사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어선들이 밀집한다. 혹독한 자연환경으로 아직 수산자원 개발이 본격화되는 못하였으나 앞으로 중요 어획지역으로 각광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연구기기의 잦은 고장으로
2월 10일 오후 4시 30분 우리나라 과학기지 공사가 한창인 바튼반도 입구에 도착하엿다. 약 46시간 동안의 험준한 드레이크해협 항해로 심신이 지쳐 있을 때 선장실 무전기를 타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건설단 본부 조사선 나와라"
건설단장으로 먼저 현지에 와있던 S박사의 음성이었다. 서로 통화를 하고나니 조사선 앞에 현대건설의 선화호가 나타났다. 서울에서 1만8천km 떨어진 킹조지섬 바튼반도에 태극기가 휘날렸고 우리나라 주권이 미치는 해외 과학기지가 단군이래 최초로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미국과 멕시코를 합친 크기, 유럽과 호주를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땅, 우리나라 면적의 약 60배 이상이 되는, 그리고 아직 주인이 확정되지 않은 대륙에 우리의 숨결이 닿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의 대륙이 약 2km 두께의 빙하로 덮혀 있으나 우리날 세종기지가 위치할 바튼반도의 끝(세종곶)은 여름에는 육지가 노출되고, 얼음 녹은 물이 고이고 저수지가 있는 북서향의 명당자리였다. 다분히 행운이었다.
조사선이 도착한 다음날인 2월 11일, 아침부터 운반해간 보급물자를 하역하기 시작하였다. 기지는 아직 건설작업이 한창이었고 조사선에서는 하역과 동시에 조사사업이 시작되었다. 1백여명의 건설요원들은 중공이 6백여명의 인원을 동원, 2개월에 걸쳐 완공한 공사를 같은 기간에 완성하기 위해 남극의 긴 여름날 하루에 15시간씩 일을 하고 있있다.
그 결과 2월 17일 대한민국 남극과학기지, 세종기지가 준공되었다. 준공식에는 서울에서 온 과학기술처장관을 위시하여 10여명의 축하객과 칠레, 소련, 중공, 스페인 등 주변 외국기지 기지장들이 내방하여 축하를 해주었다. 남극조약 정신에 입각하여 남극에서의 과학활동은 공개하게 되어있지만 소련기지의 사진사가 세종기지를 구석구석 촬영하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세종기지 주변 칠레의 마르시 공군기지와 프레이기지가 소련의 벨링하우젠기지와 붙어 있으며, 그것들로부터 약 2km 떨어져 중공의 장성기지가 자리잡고 있다. 세종기지에서 가장 가까운 기지로는 6km '포터 코브'에 아르헨티나의 후바니기지가 3형제봉 아래에 있다. 그 외에 우루과이 아르티가스기지와 폴란드의 아르크토우스키기지, 그리고 브라질 페라츠기지가 킹조지섬에 산재돼 있다.
하계연구단은 바튼반도 일대의 육상환경 연구반과 해양환경 연구반으로 구분 되어 육상지질, 동식물 그리고 해양생물, 지질 및 해수의 여러 특성을 조하하였다. 육상조사는 잦은 비와 초속 30cm의 강풍으로 지연되었으나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조사선을 이용한 해양조사는 강풍과 높은 파도, 또 남극환경에 적응되지 않은 연구기기들의 잦은 고장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일례로 조사선에 설치한 완전방수윈치가 드레이크 해협을 지나는 동안 해수에 침투돼 현장에서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연구원들과 조사선의 칠레선원들이 합심하여 1백여m의 밧줄을 인력으로 끌어당겨 해저 퇴적물의 시료를 채취했다. 또 해양생물 채취용 봉고넷트도 사람들을 동원해 끌어당겨야만했다. 그외에도 전자기기들은 장거리 운반과 습한 기후 등으로 잦은 고장을 일으켰다. 그래도 오랜 경험을 가진 연구원들은 차선책과 차차선책을 세워 계획하였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엇다. 혹독한 기상환경과 지원을 요청할 수 없는 고립된 환경하에서의 일들은 마치 달에 착륙하여 조사 연구사업을 하는 것과 유사하였다.
바쁜 일정속에 드디어 조사선의 귀향 날짜가 되었다. 2월 22일 저녁 잠시 조용해진 날씨를 틈타 다시 그 험한 드레이크 해협을 향하여 귀향길에 올랐다. 바람을 안고 항해하는 조사선은 점차 속도가 감소되고 파도는 공해로 나갈수록 켜져 우리 연구단원들은 귀 밑에 멀미약을 붙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침대를 찾아 누어지낼 수 밖에 없었다.
세종기지를 떠난지 48시간만에 겨우 비글수로가 시작되는 호온곶에 도착하였고 마침내 2월 27일 오전에 푼타 아레나스에 귀항할 수 있었다. 드레이크 해협을 지나 호온곶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을 때의 환희는 잊을 수가 없다. 평화스럽고 안락하게 느꼈던 비글수로와 마젤란 해협의 항해가 끝나고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했을 때 가슴속에 한없는 만족감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