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에게 실험을 개방한 '리비히'는 독일화학을 세계 선두에 서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독일 지도를 펼쳐 놓고 중서부쪽을 보면 우선 '프랑크푸르트'가 눈에 띄고, 그 바로 위에 '기센'이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구 3만 정도의 작은 도시인 기센의 역 구내에는 역무원들이 외국의 관광객을 맞기 위해 언제나 나와 있다. 그만큼 한적한 도시이다. 시가지를 달리는 전차의 운전수가 차장을 겸하고 있는 것도 한가로운 기센의 한 정경이다.
한가로운 옛 도시 기센
기센은 독일에서 대학이 소재하고 있는 19개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 이 고장 사람들은 이를 대단한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오래된 시가지에는 고성(古城)을 비롯하여 교회 시의 사당 시청 극장 등이 들어서 있고 특히 좁으면서 길다란 녹지대의 산책길이 둥글게 이어지면서 시가지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기센대학은 그 시가지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1888년에 새로이 세워진 것으로 '헤센·다람슈테트'의 영주 '루드비히'5세가 지었다. 원래는 고등학교였는데 1607년 대학으로 승격하였다. 한 동안 '바브루그'대학에 병합되었지만 1650년 복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3백년의 역사가운데 디센대학의 이름을 가장 높이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 다시 말해서 J. 폰. 리비히(1803-1873)가 이 대학의 화학교실에서 활동한 때 부터였다. 이 대학은 독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높이 떨치고 있었다. 따라서 세계 각처의 뜻있는 젊은 화학도들이 이 대학으로 몰려들어와 연구하였다.
1967년의 한 통계에 따르면, 1829년부터 1850년사이에 영국(59명) 프랑스(22명) 스위스(36명) 미국(13명) 오스트리아(10명) 러시아(12명) 기타(17명) 지역에서 유학생이 몰려와 이곳을 거쳐 갔는데 모두 1백 69명에 이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멕시코 사람 1명, 인도 사람도 2명이나 끼어 있다. 실로 기센대학은 리비히 때문에 존속되고 있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기센대학의 주인공, 리비히
리비히는 1803년 5월 8일 독일 중서부의 헤센·다람슈테트 대공국(大公國)의 수도 다람슈테트에서 태어났다. 리비히의 아버지는 의약품 염료 등의 제조와 판매를 주로 하는 상인이었다. 그리고 제품이나 제조의 개량을 위해서 여러 실험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 아래 리비히는 어릴 때부터 화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화학 도서관에서 많은 화학서적이나 잡지를 통해서 화학의 지식을 얻는 한편, 책에 기술되어 있는 실험을 자기 집에서 가능한 한 많이 해 보았다. 이처럼 리비히는 소년시절에 이미 화학의 이론과 실험 두 방면에 숙달한 의젓한 화학자로 성장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 리비히는 과학연구에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당시 독일에 있어서 화학자라면 약제사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리비히도 15세 때 화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약종상의 상점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약품의 조제와 학문적인 화학이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게 되자 10개월 조금 지난 뒤, 일을 집어 치우고 집으로 돌아 왔다. 리비히는 참다운 의미의 학문적인 화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한 끝에 1819년 17세로 '본'대학에 입학하였고, 후에 '에란겐'대학에 전학하여 학업에 몰두하였다.
1822년 에란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리비히는 에란겐대학을 떠났다. 그리고 대공(大公) 루드비히 1세의 후원을 받아 파리의 '소르본'대학에 입학하였다. 소르본 대학에서 화학자 'J.L. 게이뤼삭'(1778-1850)을 비롯하여 역시 화학자인 'L.J. 데나드'(1777-1857) 등 유명한 과학자들이 강의를 들었다.
특히 그 당시 파리에 있었던 독일의 지질학자 'A. 훔볼트'(1769-1859)의 호의로 리비히는 게이뤼삭의 연구실에서 특별 지도를 받게 되었다.
1824년 리비히는 21세의 젊은 나이로 훔볼트의 추천으로 기센대학의 원외교수로 임명되었다가, 2년 후에는 정교수로 승진하여 이후 25년 동안 이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러가지 빛나는 업적을 남겨 놓았다.
리비히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유기화학의 새로운 분야의 연구에 정열을 쏟았다. 특히 유기정량분석법을 개발하여 화합물의 구조를 알아내는 길을 열어 놓았다. 또 그는 농예화학에도 손을 댔다. 토양이 척박해지는 것은 식물에 의해서 함유광물이 소비되기 때문이며, 특히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Na, K, Ca, P등을 포함한 화합물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최초로 화학비료에대한 실험을 함으로써 과학적 영농이 실현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실험실을 학생에 개방
리비히에 의한 독일 화학교육의 개혁을 말하기 전에, 우선 당시의 주변사정을 살펴 보자. 프랑스와 프러시아의 전쟁인 소위 보불전쟁 이전의 독일은 여러 작은 봉건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강력한 프러시아도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비참하게 짓밟혀졌다. 그런데 이 굴욕적인 패배는 독일민족의 민족성 각성을 부추겼다. 독일의 여러 작은 봉건국가는 독일어를 매개로 하여 문화적 일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다행히 문학과 철학에 있어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의 지도적인 지식인들은 광범한 문화운동을 통하여 독일민족에게 긍지를 심어주었다.
특히 교육에는 커다란 관심이 모아졌다. 1809년 프러시아의 수도 베를린에 대학이 설립되었다. 베를린대학을 창설하는데는 프러시아의 문교장관이자 언어학자이고 철학자인 W.훔볼트(1767-1835)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동생이자 지리학자인 A. 훔볼트를 파리에 오래동안 머물게 하면서 새로운 학문의 동향을 빠르게 입수하였다.
마침 이 무렵 파리에 유학중이던 청년 리비히는 A. 훔볼트와 알게 되었는데 그는 프랑스화학을 독일에 이식하기 위해서 리비히를 기센대학에 소개하였다.
당시의 화학교육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부엌이나 조그마한 방을 개조하여 실험실을 만들었고, 그 곳에 겨우 한 사람 정도의 학생을 받아들여 실험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따라서 장래성이 있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해도 한 사람씩 교대로 실험하는데 불과하였다.
영국의 '글래스고'대학에는 작기는 하지만 시설이 제법 갖추어진 실험실이 있어서 학생이 실험할 기회가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한두사람 정도가 간신히 실험할 수 있었고, 별도의 조직적인 교수법에 따라서 교육하는 일도 없었다.
독일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학생에게 실험을 허락한다는 기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험다운 실험이라든가, 많은 학생들이 실험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러한 화학교육의 전통에 과감히 도전한 화학자가 바로 리비히였다. 인생경험이 짧은 그가 젊음과 용기를 바탕으로 학생을 위한 과학 실험실을 준비하고 이를 개방했다는 사실을 볼 때, 리비히의 신념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리비히의 뒤에서는 훔볼트 형제가 후원하고 있었다.
어쨌든 학생 실험실을 창설한 사실은 리비히의 일생의 사업중에서 가장 독창적이었고, 또한 효과를 가장 많이 거두었다. 그의 착상이 얼마나 커다란 효과를 거두었는가에 대한 증거는 많이 있다. 기센대학의 화학실험이 개방되자 독일은 물론 다른 나라의 많은 화학도들이 줄을 이어 찾아 왔다. 이들은 장차 화학발전의 기틀을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독일의 다른 대학에서도 기센의 교육방식을 따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학생들은 자유로이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정성분석(定性分析) 실험을 함으로써 물질의 여러 성질을 알아냈으며, 화학변화에 정통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은 비교적 간단한 실험으로부터 출발하여 점점 복잡한 혼합물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 다음 단계로 정량분석(定量分析) 실험으로 옮겨갔다. 분석이 끝나면 여러 화학약품을 만드는 실습을 하고, 물질의 화학변화에 관한 한층 상세한 지식을 터득하였다. 아울러 화학문헌의 취급요령을 몸에 익혔다.
이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은 참되게 화학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졌다. 그리고 화학조작법에 충분히 숙련된 힘을 몸에 붙이게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교수가 부여한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학생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써 점차 주입식 교육이 교단에서 추방되었다.
이런 방식의 화학교육이 보급됨으로써 오늘날 각 대학에서는 수 만명의 유능한 화학자가 배출되고, 학계나 공업계에 진출해 활동하고 있다. 이는 실로 1825년 그 옛날 기센대학에서 최초로 시도한 교육방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기센대학에 있어서 학생실험실의 창설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화학의 역사에 있어서 이 보다 앞서 어느 과학자도 이를 시도한 적이 없었고, 또 어느 대학에서도 이런 예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화학교육 분야에서 뿐 아니라, 일반 자연과학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최초의 모델이 되었다.
독일의 과학사가이자 과학교육가인 'F. 단네망'(1859~1936)은 "A. 훔볼트의 노력으로 리비히가 기센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기센대학에서 그의 계획대로 독일 최초의 화학실험실이 설립되어 화학교육이 실시되었다. 그후 독일의 유기화학은 처음으로 화학의 모든 영역에서 지도적인 우위는 점유했는데 이것은 바로 이 기센대학의 화학실험실 덕분이다"고 말하였다.
기센이 배출한 화학자들
기센대학의 화학교실에서 리비히의 강의를 받거나 이 교실에서 연구한 학생수는 실로 많다. 1839년부터의 기록에 의하면, 그 해의 여름 학기부터 리비히가 기센대학을 떠난 1852년 여름 학기가지의 37학기간의 학생 연인원수는 1천2백46명이다. 그중 화학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1백명이 넘는다(이 중에는 리비히의 스승인 프랑스 화학자 게이뤼삭의 아들도 끼어 있다).
기센대학의 실험실을 거쳐간 화학자중에는 새로운 염료를 개발한 사람으로 A.W. 폰·호프만(1818-1892)이 있다. 그는 처음에 법률을 공부했지만 리비히의 매력적인 강의에 탄복한 나머지 화학연구로 전향하였다(그후 그는 리비히의 조카와 결혼하였다). 그는 졸업후 리비히의 연구실에 눌러 앉아 계속 연구하였지만 리비히와 호프만은 함께 활동하지 못하였다. 1844년 여름 27세인 호프만은 정들었던 모교의 거리 기센대학을 떠나 본 대학의 원외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영국의 런던에 신설된 제국화학학교(Royal College of Chemistry)교수로 초빙되어 갔다.
이것은 호프만으로서는 뜻밖의 일이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영국의 과학사에 독일사람 호프만이 기록되었고, 또한 유기화학의 역사에 금자탑을 쌓게 되었다. 그는 바로 '호프만 바이오렛'이라는 새로운 염료를 합성했다. 조국으로 귀국한 호프만은 자신의 유기화학의 연구를 기초로 영국과 프랑스를 능가하는 거대한 염료공업을 독일에서 발전시켰다. 이로써 독일은 그가 귀국한 뒤 반 세기동안 전세계 유기화학계를 지배하였다.
독일사람으로 벤젠(${C}_{6}$${H}_{6}$)의 구조를 밝혀 유기화학의 기초를 수립한 '케클레'(1829-96)가 있다. 또 영국 사람으로 독일에서 의학공부를 하다가 화학에 흥미를 갖고 화학과 학생으로서 리비히에게 강의를 받은 A.W 윌리엄슨(1824~1904)은 알콜과 에텔을 근본부터 연구한 결과 에텔을 처음으로 합성하였다(영국에서는 1836년부터 1850년 사이에 59명의 화학자가 기센대학의 리비히의 실험실을 거쳤다).
또 러시아 사람 G.H. 헤스(1802-1850)는 리비히의 지도는 직접 받지 않았지만 1837년 여름 동안 잠시 기센대학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는 열역학 법칙을 수립하여 화학계에 공헌하였을 뿐 아니라, 화학용어를 러시아어로 제정하기도 했다. 또 미국의 물리화학자인 J.W. 깁스(1839-1903)도 기센대학에서 잠시 연구하였다.
이 도시 사람들은 리비히가 화학계에 이룩한 공헌 뿐 아니라, 기센대학을 독일은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으로 발전시킨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리비히의 대리석상을 세웠다. 이 대리석상은 이곳의 유일한 기념물이다. 지금도 그 동상이 세워진 언덕을 '리비히 동산'이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