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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우주개발

대형우주스테이션을 한발 앞서 개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지 30년. 지금은 대형 우주스테이션을 우주공간에 설치하여 다음 단계 진출을 서둘고 있는 소련의 우주개발을 살펴본다.
 

미르의 내부도

소련은 86년2월19일 본격적인 우주 진출을 위한 새로운 우주 스테이션 ‘미르’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미르’란 러시아어로 ‘평화’와 ‘우주·세계’라는 뜻이 있는데 소련은 ‘평화’라는 뜻을 강조하고 있다.

우주개발 거점을 먼저 확보한 소련

소련에서 10여명이 탈 수 있는 대형 우주스테이션을 개발 중이라는 소문은 수년전 부터 나돌고 있었다. 그러나 ‘미르’는 이런 계획과는 관계 없는 샐류트의 개량형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것은 발사에 사용된 로케트가 샐류트와 같고 무게도 같다는데서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것 같다. 겉 크기도 샐류트와 같으나 텔리비젼 중계를 본 서방분석가의 해설에 의하면 내부는 훨씬 넓은것 같다. 안에 있던 몇가지 장치를 외부로 옮겨 거주공간을 넓게 한것 같다는 것이다.
미르의 최대 특징은 앞쪽에 5개소 뒷쪽에 1개소 합계 6개소의 도킹 장치가 있는 것이다.

유인연락우주기, 무인보급우주기, 실험관측 모듈 등을 결합하여 기능을 확대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태양전지판도 샐류트의 1.8배인 76㎡로 되어있다.

이 미르에는 금년 3월12일 승무원 2명을 태운 소유즈 T-15가 최초로 도킹했다.

그리고 5월5일에는 T-15가 도킹을 풀고 약 3백km 떨어진 샐류트 7과 도킹하여 사상 처음으로 두개의 우주스테이션 사이를 연락하는데 성공했다.

미르에는 창문이 달린 ‘개실’이 마련 되어있다. 그리고 온실은 샐류트의 것 보다 높고 섭씨 28도 까지 올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 무중력상태에서 근력(筋力)이 떨어지는것을 막기위한 트레드 밀(tread mill)은 동료가 일하는 것을 보면서 운동할 수 있게 하는 등 심리면에서도 세밀한 점 까지 배려했다.

소련의 지금 까지의 우주체재 기록 갱신실적을 보면 약 1개월씩 기록을 늘린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2백60~2백70일로 추정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유즈 T-15의 우주인 2명이 11월까지 샐류트7이나 미르에 머무르게 될것이라 예상된다.
이렇게 소련은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추적을 따돌리고 우주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먼저 확보하고 지금 다음 단계 진출을 서둘고 있다.

독자적인 스페이스 셔틀 개발

소련이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을 닮은 대형의 날개가 달린 우주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는 상당히 오래전 부터 흐르고 있었다. 3년 전에는 바이코누르(추라탐)우주기지에 대규모 활주로 건설공사가 추진되고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셔틀용으로 건설되는 것 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미국 국방성의 보고서 ‘소련의 군사력’1984년판에 실린 소련의 스페이스 셔틀 상상도는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 설계도를 소련이 복사한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 일으키기 까지 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설계라는 해석이 내렸다.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 오비터(orbiter·궤도운반선)는 글라이더 처럼 활공하여 착륙할 수 있을 뿐인데 소련판 셔틀오비터는 2기의 제트엔진을 탑재하여 대기권을 비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체의 중량과 날개 면적, 엔진 추진력으로 보면 비행기로서의 성능은 별로 뛰어나지 않은것 같다. 착륙지점을 쉽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과 강하 각이 작아진다는 정도의 이점이 있을 뿐이다. 착륙에 실패하여도 상승하여 다시 시도할 수 있는지 어떤지도 의문스럽다.

소련판 스페이스 셔틀은 이 오비터와 커다란 추진제 탱크, 외부 연결 부스터로 이루어지며 이것도 미국 것과 같은 구성이다. 그러나 부스터는 미국 것이 고체 로케트 2개인데 비해 액체 로케트가 4개다. 또 추진제 탱크 자체에 로케트 엔진이 붙어 있어 미국것과 다른 특징을 보인다.
엔진 1기의 추진력은 6백t이다. 부스터 4기와 추진제 탱크 아래 쪽의 1기를 합친 상승추진력은 3천t이 된다. 이승중량(離昇重量·take-off weight)은 2천t이고 페이로 더는 30t으로 데이타가 미국의 스페이스셔틀과 비슷하다.

오비터의 활공시험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빠르면 올해 안에 첫 비행을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으나 아마 87년 이후가 되는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도 있다.

행성 탐사에도 박차

소련의 무인 우주 탐사기 계획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핼리 혜성 탐사기 ‘베가’의 활약은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베가는 금성과 핼리 탐사를 위해 1984년 12월에 발사되어 85년 6월에 금성에 갔다가 핼리혜성을 향해 접근해갔다.

금성에서는 대기 속에 관측기구를 투하, 그곳의 대기 데이타를 처음으로 보내왔다. 그 데이타는 지금 해석 중에 있으나 금성 대기 속에는 인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 0.1마이크로(${10}^{-6}$)m의 오더 미립자가 많고 0.4마이크로m를 넘는 것이 적다는 것 등 많은 지식을 새로 알아냈다.
베가 탐사기에서 특기 할만한 것은 계획에 서방 여러나라도 포함된 국제협력의 바탕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 관측 데이타도 재빨리 전세계에 공표되는 등 종전의 비밀주의에 비해보면 상당히 개방적이된 것이다. 1985년 3월 미국에서 개최된 심포지엄에 참석한 소련의 우주당국자가 가까운 장래의 행성탐사계획을 공표했을 때도 서방측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욕적인것은 1988년에 발사할 예정인 화성탐사 포보스 계획이다.

이 계획은 같은 형의 2기의 탐사기를 화성 궤도에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화성의 위성 포보스와 다이모스에 각각 50m까지 접근하여 위성 표면에 레이저와 이온 빔을 씌워 증발되는 개스에서 표면의 성분을 조사하려 계획하고 있다. 또 레이더로 지형을 살필 예정도 짜여있다. 소형 착륙체를 위성에 내려 표면의 화상을 송신하고 성분의 자동분석도 시도한다. 물론 화성 자체의 관측 계획도 짜 놓고 있다.

이런 포보스 계획에도 프랑스 서독 스웨덴 등 서방 각국의 참가를 손짓 하고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밖에 프랑스와는 공동으로 소행성을 탐사하는 베스타 계획에 대한 협의가 추진되고 있다. 이 계획도 프랑스제 관측기재를 실은 탐사기를 1991년에 발사하여 금성에 들리게 했다가 소행성 베스타를 향해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베스타는 직경 5백50km의 세번째로 큰 소행성으로 화성과 목성 사이를 돌고 있다. 이 계획에서도 앞서의 베가 계획에서의 경험이 크게 역할을 할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앞서가는 소련의 우주개발 탐사의 역사는 약 30년전에 그 막을 열었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1957년10월4일, 직경 58cm의 금속구가 우주를 향해 발사 되었다. 소련이 발사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였다.

20메가헬츠(MHz)와 40메가헬츠의 전파를 발신하는 2기의 발신장치가 탑재된 스푸트니크 1호가 우주에서 발신하는 전파는 전세계 아마추어 무선가를 흥분시켰다.

세계 각지의 천문대에서는 스푸트니크1호를 포착하려고 철야 관측작업을 강행했다.

이 때 뉴요크 타임즈지는 ‘바다의 시대엔 배를 가지고 있던 대영제국이 세계를 지배했다. 현대에 와서는 하늘의 시대가 되어 비행기를 가진 우리가 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가 대기권 밖에 새로 발판을 구축했다’고 보도했다. 그 후 스푸트니크는 2호, 3호가 계속 발사되었다.
무게 83.6kg의 스푸트니크 1호는 9백41km의 고도를, 5백8kg의 2호는 1천6백60km의고도를, 그리고 1천3백27kg의 3호는 1천8백60km의 고도를 날았다. 이들 인공위성 모두를 운반한것은 R-7 ICBM(대륙간 탄도 로케트)를 기본으로 만든 A-1 로케트였다.

스푸트니크 계획은 1961년3월15일 발사된 스푸트니크 10호 까지 계속 되었다.

초기의 스푸트니크는 모두 우주의 먼지가 되고 말았지만 5호 이후는 거의가 개를 태워 발사했다가 회수하는데 성공했다. 10호 발사에 앞서 60년 1월에는 유인우주선 원형기에 의한 대기권 재돌입실험이 시도 되었다. 그리고 유인 우주비행을 위한 제2단계로 돌입했다.

보스토크 우주선의 원형기 5기가 차례로 발사 되었다. 여기에는 쥐 토끼 모르모트 개 사람의 조직세포 식물 미생물을 실어 무중력 상태에서의 여러가지 실험이 시도 되었다. 이런것은 모두 사람을 우주에 보내기 위한 예비 실험이었다.

그리고 역사적 순간은 1961년 4월12일 09시07분(모스크바 시각) ‘가가린’소령을 태운 보스토크(동방)1호가 A-1 로케트로 발사되면서 막이 열렸다.

보스토크 1호는 근지점 1백81km, 원지점 3백27km의 지구 주위 궤도를 1주하고 1시간48분 만에 지구로 돌아왔다. 그뒤 유인우주선 보스토크 계획은 계속 추진 되었다.

“나는 갈매기. 지평선이 보인다. 하늘색의 푸른 띠가 보인다. 이것이 지구인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렇게 지상과 교신한 것은 첫 여성우주 비행사 ‘바렌티나 브라디밀로브나 테레슈코바’소위(당시 26세)였다. 테레슈코바 소위가 탄 보스토크 6호는 63년 6월16일에 발사되었다. 그 이틀전에는 뷔코프스키 중령이 탄 보스토크 5호가 발사되어 5호와 6호는 동시 비행을 했다.

이 비행은 몇가지 점에서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한가지는 우주에서 도킹하여 랑데부 할것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5호와 6호 사이의 우주선 상호교신을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 날은 여성비행사로 부터의 보고였다. 이런 것은 우주에 나간 인간기술의 발달을 증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타스통신은 ‘비행중에는 인체에 대한 우주비행에서의 여러가지 영향이 연구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남자와 여자에게서의 작용이 비교분석되어 새로운 영역의 의학적 생물학적 조사와 공동비행 조건 아래서의 유인우주선 시스템의 완성과 개량이 이루어 질것이다’라고 보도했다.
67년 11월에는 비밀리에 중요한 실험이 착수되었다. 3명의 인간을 지상의 밀실에 넣어 1년 동안 우주선에서와 같은 조건에서 생활시키는 것이었다. 뽑힌 사람은 기술자와 의사와 생물학자였다.

장기체재 스테이션 샐류트 탄생

여러가지 준비단계를 거쳐 다목적형우주선 소유즈 건조와 병행하여 장기체재 대형스테이션 샐류트가 우주개발사업의 표면에 등장했다. 소련의 우주개발 목표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샐류트 1호기는 1971년 4월 19일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D-1 로케트에 실려 발사 되었다. 73년 4월에는 2호, 74년 6월, 12월, 76년 6월에 각각 3, 4, 5호가 발사되었다.

그때 까지의 유인우주선과 전혀 기능이 다른 샐류트 계획 실현으로 소련은 그들의 우주개발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 해 갔다.

그사이 장기 우주체재 기록을 차례로 갱신했다. 1982년에는 2백11일 동안이나 비행사를 우주에 체재 시키기까지 되었다. 그리고 탑승인원도 늘리게 되자 체코 폴란드 동독 프랑스 등 10개국의 우주비행사도 탄생 시켰다.

가가린의 첫 우주비행으로부터 25년이 지났다. 이동안 1백11회의 유인 우주비행이 있었고 모두 1백 97명의 남녀가 우주를 날았다. 1명이 2~6회나 날은 경우도 있어 연 인원으로는 3백 11명이 된다. 우주를 날은 인원이 1백명에 이른 것은 가가린의 첫 비행으로부터 20년 째인 1981년 3월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년 사이에 그때까지의 20년간에 필적하는 사람들이 우주로 나갔다.

1백 11회의 비행중 소련의 비행 회수는 60회. 우주인은 60명뿐이나 우주체재일수는 단연 앞서 있다.

1984년 10월2일 3명의 우주비행사를 태운 소련의 소유즈 T-11이 귀환했다. 그들은 샐류트 우주 스테이션에서 2백36일 22시간50분 동안의 우주체재를 기록하고 돌아왔다.

미국의 우주체재 기록은 스카이랩에 의한 84일 1시간 16분(1973년 11월~1974년 2월)이었다. 소련은 1978년에 샐류트 6으로 이 기록을 깨고 그 뒤 5회에 걸쳐 기록을 갱신해갔다.

현 시점에서의 연속 우주체재 최장기록은 소유즈 T-11의 3명이며 누계 기록으로는 ‘발레리 류민’이 최장이다. 그의 3회의 우주비행중 2회는 샐류트 6에 의한 장기체재로 누계는 3백 61일 21시간 34분이다. 거의 1년간을 우주에서 지낸 것이다.

희생을 딛고 개척한 우주에의 길

샐류트란 러시아어로 ‘축포’란 뜻이다. 최초의 샐류트 발사가 1971년 4월이었으므로 보스토크 비행 10주년을 기념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축포는 뜻하지 않게 폭발하고 말았다. 샐류트 1에서 약 24일간 체재한 3명의 우주비행사가 탑승하고 귀환하던 소유즈 11의 기압조정밸브가 잘못 열려서 우주인 3명 모두가 질식사 되어버린 것이다. 대기권 재돌입 전, 고도 1백68km에서의 사고였다.

결국 샐류트 1에는 그뒤 새로운 우주비행사가 타지 않은채 약 6개월 뒤 소멸되고 말았다.

그 다음의 샐류트 2는 2년 뒤에 발사 되었으나 고장이 나 계속 사용하지 못하다가 1개월 남짓 뒤에 소멸되었다.

1974년 6월 24일에는 샐류트 3이 발사되고 7월 5일에는 2명의 우주비행사가 옮겨 타 유인비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때의 체재기간은 약 2주간으로 짧았다.

우주장기체재를 포함한 과학실험이나 관측을 주목적으로 하는 샐류트 4가 발사된 것은 1974년 12월24일이었다. 소련의 우주 장기체재기록 수립 첫 발걸음은 여기서 시작된다.

샐류트의 최종형인 샐류트 7은 길이 약 15m, 직경 약 4.2m의 원통형으로 발사 당시의 중량은 약 19t이었다.

초기의 샐류트는 한쪽 가장자리에만 도킹 장치가 있었으나 1977년 9월29일에 발사된 셀류트 6 부터는 앞뒤 양쪽 끝에 도킹장치가 마련되어 동시에 2기의 소유즈 유인우주기 또는 프로그레스 무인 보급우주기를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셀류트 7 안의 용적은 약 1백㎥. 각종의 실험관측 장치가 마련되어 있고 장기체재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쾌적하게 만들었다.

주된 장치로는 서브 밀리미터파(波) 천체망원경, 멀티 스펙톨 자원탐사카메라, 신합금이나 결정생성 실험용 전기로 등을 들수 있다. 또 미니 온실도 있어 우주에서의 식물재배 실험에도 힘을 기울인것 같다.

샐류트 7은 1982년 4월에 발사된 이래 상당히 혹사 당해왔다. 1984년 10월 까지 7개팀, 연 19명의 우주비행사가 합계 약 6백일을 이 우주스테이션에서 지냈다.

그뒤 샐류트 7은 무인(자동) 태세로 바뀌었다. 이 무인 비행기간 중에도 관제센터는 정기적으로 텔리미터리 정보를 수신하고 주요 시스템의 상황을 체크한것은 말할것도 없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않아 지상으로 부터의 무선지령이 연결되지 않게되어 텔리미터리 정보도 들어오지 않았다.

여러가지 간접적인 징후로 미루어 운석이 관통했을 경우와 같은 큰 손상이 생겼다고는 볼수 없고 에너지공급시스템에 별로 복잡하지 않은 이상이 생긴것이라는 판단이 내렸다. 그래서 고장의 원인을 밝혀 내 고치기 위해 2명의 우주비행사가 소유즈 T-13으로 출발했다.

첫째 난관은 전원(電源)고장으로 자세제어가 듣지않는채 공간속을 천천히 회전하고있는 샐류트 7과 도킹하는 것이었다.

소유즈 T-13은 샐류트에 접근하여 이른바 호버링 태세를 취하여 샐류트의 주위를 돌아가며 도킹 유니트를 쫓아가는 복잡한 조작을 거뜬히 성공시켰다. 이런 기술은 앞으로 고장난 우주기 구조나 위성 점검, 수리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1985년 6월 8일, 이렇게 하여 2명의 우주비행사가 샐류트 7에 옮겨 타 보니 열조정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온통 얼어붙어 있었다. 전기계통이 복잡하게 얽힌 샐류트의 내부를 ‘해빙’시킨다는 것은 큰 일이었다. 잘못하여 쇼트라도 되면 순식간에 대사고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고장의 원인은 전기시스템의 센서 하나때문임이 밝혀졌다. 이 센서가 완전히 충전되었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내 태양전지 패널로 부터의 충전이 자동적으로 정지되어 버렸던 것이다.

2명의 우주비행사는 한달 가량 걸려 샐류트 7의 수리 정비를 끝냈다. 그뒤 1명은 9월26일까지, 다른 1명은 11월21일까지의 우주체재를 기록했다.

이렇게 하여 샐류트 7은 정상기능을 회복했다. 이어 86년 2월19일 소련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우주 스테이션 미르를 발사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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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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