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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도는 현장을 익혀야 한다

항공공학의 선구자 장극박사

국내 최초의 항공공학자로서 소련을 포함 12개국에서 50여년간 연구와 강의를 해 온 공기역학의 세계적 권위자. 그는 장면 전(前) 총리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한국과학기술원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목적지를 찾는데 조금은 당황하게 된다. 온갖 기자재로 가득찬 실험실들과 서로 다른 층을 연결하는 육교들…. 사전에 설명을 들었건만 기계공학부의 장극(張勀) 박사(73) 연구실을 찾아낸 것은 약속시간이 15분 지난 후였다. 미안스러웠으나 활짝 웃는 장박사의 영접을 받으니 안심이 되었고 곧 다시한번 당혹함을 느꼈다. 약력에는 분명 73세로 되어 있는데 아무리 해도 50대 후반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먼저 항공공학을 전공한 과학자. 지난 50년간 미국과 서구를 포함해 동구, 소련 등 12개국에서 연구와 강의를 해온 공기역학의 세계적 권위자. 그리고 공학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에게는 5·16때의 총리 장면(張勉)박사의 친동생이라면 대번 알만할 것이다. 그는 현재 한국과학기술원 기계공학부에서 초빙교수로서 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적 주목 끈 '유동의 박리'

-유체역학(流體力学)이 전공이라고 들었읍니다만 주로 연구하시는 분야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공기를 뚫고 나가는 것과 관련된 학문으로 기술적으로는 '유동의 박리'(流動의 剝離, Separation of Flow)라는 문제이지요. 유체의 흐름이 물체표면을 따라 흐르느냐 아니냐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가지 현상이 주요 관심사이고 더불어 그로 인해 생기는 기술적인 손실, 예컨대 비행기의 경우 속력을 잃고 추락하는 현상과 이득이 연구대상입니다.

이 분야와 처음으로 부딪치게 된 것은 60년대에 미국 카톨릭 대학의 교수로 재직할 때였읍니다.그때만 해도 이 분야는 종합적인 계몽조차 되어 있지 않았고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과 미국 각지를 방문해 연구실태를 살폈고 이름난 학자와 연구원들을 만났읍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논문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검토해 독자적인 학문으로서의 계통을 세우고자 했지요. 20여년 간 무진 애를 썼어요. 그 결과 마침내는 세계 최초로 미국 카톨릭 대학에서 대학원의 정식강좌로 채택되어 62년부터는 박사과정에게 강의를 했읍니다."

전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간의 고생과 보람이 한꺼번에 되살아오는듯 장박사의 목소리에 열기가 더해졌다. 과학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천진한 자랑스러움이라고나 할까.

-최근에 출판된 장박사님의 자서전적인 저서 '세계 과학기행-한 이공학도의 발자취'에서도 언급되어 있고 또 기계공학부의 학생으로부터도 들었읍니다만 유체역학에 관한 장박사님의 3권의 저서가 세계 공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과분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첫저서인 'Separation of Flow'(유동의 박리)가 20여년 동안의 연구의 결실인 것은 틀림없읍니다. 유럽에서의 연구여행을 마친 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간을 내 수집된 문헌을 보고 공부하면서 원고를 작성했읍니다. 만4년 동안 초고를 마련해 1년간 정서한 다음 1965년 영국 옥스포드의 퍼가몬 출판사에 출판을 위탁했지요. 분량은 8백여페이지인데 참고문헌이 1천여종이고 그림만 해도 5백60개에 달해 인쇄하는데 만도5년이란 세월이 걸렸어요.

스페인어판은 65년 마드리드 항공대학에서 출판되었고 76년에는 모스크바의 MIR출판사에서 러시아어판을 냈읍니다. 79년 영어판이 매진되자 KAIST에서 판권을 인수해 재출판했지요.

이 책은 항공역학 분야에서는 세계 최초로 나온 것으로 학자들이 출판을 바라던 때여서 평도 좋았어요. 영국의 '스폴딩'교수는 '기념비적'이란 수식어를 붙여 서평을 써주었지요."

장박사의 저서로는 그밖에 표면에서 분리된 유체흐름을 없애거나 이용하는 기술적 문제를 다룬 'Control of Flow Separation'(유체흐름 분리의 조종)이 1976년 영문으로 출판돼 역시 러시아어로 번역·출판되었고, 83년에는 근래의 이 방면의 연구를 계통적으로 쓴 'Recent Development in Flow Separation'(최신 전개된 유동의 박리)가 영문으로 국내에서 출판되었다. 이들 저서는 장박사의 학문적 결실이기도 하지만 그와 관련해 세계각국에서 초청강의가 쇄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항공공학과 연구실
 

실제적인 공학교육이라야

-장박사께서는 오랫동안 12개국의 학술기관과 대학에서 초빙교수 또는 교환교수로 강의와 연구활동을 해오셨지요. 세계의 공과대학을 두루 살피신 셈인데 우리나라와 다른 특징 특히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동구와 소련의 공학교육과 연구를 소개해 주시죠.

"세계각국의 공과대학에서 지내 본 경험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북미, 남미, 동서유럽, 소련을 포함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공부와 강의 그리고 연구생활을 했으니까요.

두드러진 양상은 독일어권의 중부 유럽은 물론 북부유럽과 소련을 포함한 동부유럽에서는 실제적인 공학교육을 중시한다는 점입니다. 미국과는 대조적이지요.

1936년 내가 베를린 공대에 입학할 때만 해도 입학 전에 6개월 이상의 1차 기초실습과 2차로 6개월 이상의 전공분야의 실습을 공장에서 했어야 했읍니다. 나와 같은 시기에 공장실습을 한 우주공학의 선구자 '폰 브라운' 박사도 6개월 동안의 실습기간동안 줄칼로 강철공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요컨대 학위 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인데 기술을 교육하는 데에는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아주 우수한 항공기 설계가나 건축가 가운데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은 드물지 않습니까?

미국이나 서구와 다른 동구 공학계의 특징은 어려서부터 공과교육을 서두르며 그것도 대부분 실제의 공작 생산 능력을 배양하는데 중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또 스스로 뒤떨어진 것을 깨우쳐 뒤쫒아가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주당 15시간 정도인 공대 강의시간이 30시간 이상 되는 곳이 많은데, 숙제도 빠짐없이 해옵니다.

또 다른 특징은 소련이나 동구유럽 대학생의 절반이 여학생이란 점입니다. 특히 화학·식품공학·생체역학 분야에는 여학생이 더 많았고 컴퓨터 분야의 여성진출은 다른 나라에서도 두루 발견되는 현상이었읍니다.

유럽과 소련에서 강의를 할때 재미있던 일은, 영어와 독어 중 어떤 말로 이야기할까를 물어보면 연장자는 대개 독어를 그리고 젊은 학자들은 영어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지요."

편협한 영재 만들지 말아야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식 공학교육의 취약점에 대해 여러가지 논의가 있었고 또 최근에는 과학기술대학의 설립 등 영재교육에도 신경을 쓰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대 졸업생이 공장을 운영못하는 것이 실정아닙니까. 엔지니어의 본분이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그의 우수성은 재주를 부려 남보다 뛰어난 물건을 제작하는데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선천적 소질도 중요하지만 훈련과 실제 작업등의 노력과 축적된 경험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이런 일은 일생동안 계속돼야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이 점에서 부족한 것 같아요. 어느 독일인이 이렇게 말합디다. '기본적 기술을 같이 익힌 한국사람이 과장이 되더니 다른 일을 한다. 놓은 직책으로 올라갈 수록 일은 안하고 대학으로 빠질 생각만 한다'고 말입니다.

근래 우리나라에도 영재교육에 관심이 많은 모양입니다만, 서유럽의 경우 프랑스가 영재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반면 독일은 다수의 우수한 고급두뇌 양성에 주력하고 있지요. 그래서 '프랑스에서 발명이 되면 독일에서 제품이 나온다'는 말이 있읍니다.

영재라 하더라도 모든 분야에 다 우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읍니까. 그래서 각 개인에 대한 소질을 파악해 그에 맞는 특별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때 공부에만 얽매여 부자연스런 생활을 한다면 건전한 인격으로 성장할 수 없겠지요. 자유롭고도 자연스런 행동과 사고를 하도록 하여 정신을 집중하고 유연한 사고를 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신의 독자적인 창안이나 탐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공부에 흥미를 갖도록 고무시키고 아울러 편협한 교육을 탈피해 인문·예술·종교 등 소양교육에도 역점을 두어야 하겠지요."

정치에는 관심없어

-장박사께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수도회 신부가 되길 꿈꾸었고 경성제대 예과에서는 문과에 입학했던 것이 잘됐던 일처럼 생각되는군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어렸을 때의 가족분위기와 항공공학에 뜻을 두게 된 배경을 말씀해 주시죠.

"문과에 입학한 것은 신학공부에 필수적인 철학을 전공하기 위해서였는데 다음 해 이과로 바꿔 의과생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번엔 공학을 하고 싶은 간절한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로서 국내에서 공학을 가르치는 대학이 한 군데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결국 독일로 공학을 배우러 가기로 결정을 했는데 국내에 공대가 없는 터여서 무슨 과목이 있는 지도 또 무얼 해야 할 지도 몰랐어요. 다만 이왕 할 바엔 한국인로서는 아무도 전공하지 않는 항공공학을 배워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고 둘째 형님(張勃)의 권고도 큰 역할을 했읍니다.

부모님과 3남3녀가 있던 우리 가족은 매우 평온했읍니다. 저녁 시간엔 온 식구가 다 모여 부친의 지도 아래 기도를 드렸고 일요일 미사 후에는 부친께서 직접 가족들 앞에서 성경을 낭독 하셨지요. 이런 종교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난 내겐 저절로 신앙의 씨가 심어졌고 자라나는 바탕이 되기도 했읍니다.

부친은 일찍 깨치신 분이어서 자식들을 모두 외국에 유학시켰지요. 그래서 형님이나 누나와 같이 지낸 기간이 짧습니다. 우리 집안에는 정치적인 관심이 없었읍니다. 큰 형님(張勉)도 만찬가지였지요. 또 형제들 사이에도 아무런 정치적 관계가 없었읍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지금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아뭏든 1935년 드디어 정든 고국을 떠나 독일로의 유학의 길을 떠났읍니다. 그것이 이후 50년에 걸친 외국 생활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읍니다."

-지난 79년 귀국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읍니까?

"그때가 내나이 65세 되던 해인데 그 동안 근무해 오던 미국 카톨릭 대학을 정년 퇴임했읍니다. 이후 명예교수로 학교 내에 사무실은 있었지만 강의할 의무는 없어졌고, 마침 서울에 있는 KAIST의 초빙을 받아 귀국, 새로 창립된 항공공학과의 일을 돌보며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게 됐지요.

귀국할 때 마음먹고 있던 것으로는 우선 미국이나 유럽의 교육제도와 연구내용을 분석해 우리 실정에 맞게 하자는 것이었읍니다. 한국 교수들이 대개 미국 대학 출신이어서 유럽 사정엔 어두웠기 때문이지요. 그 다음엔 한국 교수들이 공장 경험이 없다는 점을 고려해 내가 12년간 실습한 바를 토대로 항공공학계에 이바지하자는 것입니다. 아울러 한국의 젊은 교수들에게 연장자로서의 나의 경험을 전수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읍니다."

3시간 연속 강의

-미국학생과 비교해 볼 때 한국학생의 자질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미국에서 본 한국 학생들은 성적도 좋고 성실했읍니다. 특히 공식의 유도나 계산 속도와 정확성은 두르러집니다. 그러나 석사나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느낀 겁니다만 한국 학생들은 논문 제목을 선택하는데 자주성이 부족해 교수가 정해주는 일이 빈번하지요. KAIST에서 교편을 잡으며 접한 한국 학생들이 선택된 사람들이니까 일반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공부를 잘하고 상당히 독립적입니다."

-현재의 강의와 연구생활은 어떻습니까.

"저는 강의를 중간에 휴식 시간을 10분 주고 3시간 계속하는데 학생들에게는 퍽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학내에서는 '세시간 연속 강의 교수'로 알려져 있지요. 이것은 제가 미국에서 20여년 동안 해온 습관인데 당시에는 3시간이나 차를 타고 강의 받으러 오는 학생도 있어서 한 주일분 수업을 하루에 몰아 했읍니다. 강의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보통 밤12시였어요.
이곳 교수는 모두 젊습니다. 한번은 학과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거절했지요. 초빙교수라 그런지 대우가 예외적이라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한국생활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장박사의 표정에서 고독하고 쓸쓸한 생활을 읽을 수 있었다. 미국에 얼마전까지 보건부에 근무하던 부인과 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남겨둔 채 칠순이 넘은 나이에 객지생활을 하는 그에게 유일한 보람은 연구와 강의 그리고 그에 따른 보람일 것이다.

실제로 해보라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단계의 우리의 항공공학과 산업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항공산업은 최첨단의 산업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2차대전 후 미국의 최대 산업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제 부품을 생산하는 정도의 시작 단계입니다.

KAIST에서는 지난 85년 민간 항공기로는 첫번째 비행기를 제작한 바 있읍니다. 물론 이것은 부품을 들여다 조립한 거지요. 현재 경비행기를 설계하고 있는데 앞으로 2년 안에 우리 손으로 부품을 만들고 조립한 경비행기를 시험 비행할 수 있을 겁니다.

항공산업의 진흥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일반인의 인식입니다. 미국에서는 유치원부터 모든 매체를 통해 항공 관계의 교육을 하고 있지요. 일반인의 항공에 대한 일반적 개념없이 항공산업은 일어서지 못합니다. 당부하고 싶은 것은 '실제로 해보라'는 것입니다. 비행기 옆에는 가보지도 않고 책만 본다고 비행기가 만들어지지는 않지요. 아직 전투기를 설계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이 손수 설계도를 보고 부품을 구입하여 조립할 수 있는 '학교 비행 사업'(School Flight Project)이 널리 실시돼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항공공학을 전공한 선각자 장극. 50년간의 해외 연구생활을 조국에서 마무리 짓기 위해 귀국한 그가 원하는 것은 한국의 항공산업이 활짝 나래를 펴는 것이리라. 그때까지는 '체력이 허락하는 한 내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는 노학자의 다짐에서 우리는 항공산업의 밝은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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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윤지은 기자
  • 조홍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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