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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화 임금님을 만나다

“지오가 궁궐에 남기로 결심한 건 순전히 한 마디 말 때문이었다. “어쩌면 먼 과거의 세상을 보게 될 지도 모르지” 라고 하던 천복의 말이 지오의 마음을 잡은 것이다.

‘연월기를 만들어서 2년 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때로 돌아간다면 누나의 사고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천지관의 야장들은 황산사, 천복, 장도사를 ‘연월치인’이라고 불렀다. 연월기를 만드는 사람이란 뜻인데, 이제 지오도 연월치인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궁궐에서의 첫 밤은 연월치인과 함께 잠들었다. 연월치인의 숙소는 작지만 깔끔했다.

“봄이라지만 아직은 추워. 밤엔 기온이 많이 떨어지지. 지오는 따끈한 아랫목에서 자거라. 고뿔 들라.”

황산사의 말에 아무도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려. 고뿔 들지 않게 이불도 잘 덮고.”

천복과 장도사는 이불깃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난생 처음 덮어 보는 폭신한 솜이불이었다.절절 끓는 아랫목에서 솜이불까지 덮고 누웠지만, 지오는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히려 밤이 깊을수록 눈동자는 말똥말똥해졌다. 문득 누나와 함께 하던 밤이 떠올랐다.
 

지오를 꼭 안아주는 누나



“누나, 추워.”

솜 한 자락 들어가지 않은 무명 이불로 간신히 잠을 이루던 그 밤, 누나는 오들오들 떠는 지오를 꼭 안으며 속삭였다.

“따끈한 군고구마를 상상해 봐. 화로에 구운 군밤도 상상해 보렴. 그걸 품에 꼭 숨겼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때? 이젠 안 춥지?”

“히히! 정말 덜 춥다. 근데 누나, 군고구마 생각하니까 배고파.”

“오늘 밤만 꾹 참고 자. 내일은 누나가 김초시 댁에 가서 일해 주고 맛있는 거 많이 얻어올게. 내일이 김초시 어른 환갑잔치잖아.”

“참말로?”

“그럼 참말이지. 그러니까 먹고 싶은 거 상상하면서 자.”

“음……, 인절미 먹고 싶어. 약과도 먹고 싶고. 그리고…….”

그 날 밤, 지오는 알고 있는 음식들을 모두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럴수록 배는 더 고팠고, 뱃속에서는 꼬르륵 꼬르륵.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지오는 좋았다. 보리밥 한 술도 먹지 못한 배고픈 밤, 서로의 온기만으로 추위를 달래는 밤일지라도 누나와 함께 있으면 따뜻하고 행복했으니까.

“이 녀석! 첫날부터 늦잠이냐. 냉큼 일어나.”

이른 아침부터 장독이 깨지는 듯한 장도사의 목소리가 지오의 귀를 찔렀다. 새벽 무렵에야 간신히 잠든 탓에 늦잠을 잔 것이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데, 천복이 방으로 뛰어들었다.

“장도사, 옷부터 갈아입어야겄어. 어여!”

“옷이야 밥 먹고 갈아입으면 되지, 아침부터 웬 수선이야.”

장도사의 대거리는 듣는 둥 마는 둥 천복은 옷 한 벌을 꺼내 지오에게 던지며 말했다.

“지오야, 너도 옷 갈아입어. 어여! 상감마마께서 찾으신다지 뭐여. 황산사는 벌써 달려갔다는구먼.”

상감마마라면 임금님이 아닌가? 지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임금님이 왜요? 우리가 무슨 죄라도 지었나요?”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던 장도사가 지오의 말에 ‘풋!’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죄 중에서도 아주 큰 죄를 졌지. 궁궐에 와서 아직 임금님께 인사도 안 올렸으니, 상감마마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 게야.”

천복은 장도사를 흘깃 노려보더니 지오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며 말했다.

“임금님 앞에 가면 무조건 엎드려야 혀. 그리고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예. 황공하옵니다.마마!’하면 되여. 알겄어?”

지오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저 곳이여.”

앞서 가던 천복이 턱짓으로 작은 정자쯤 되는 크기의 집을 가리켰다. 집 앞엔 건장한 장수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원래 임금님이 계신 곳은 문정전인데, 비밀 이야기를 나누실 땐 여기로 오시는구먼.”

문이 열리자마자, 지오는 천복과 장도사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임금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임금님도 우리처럼 눈이 두 개고 코는 하날까?’

고개를 들어 확인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지만, 지오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천복과 장도사가 바닥에 박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오도 천복을 따라 엎어지듯 고개를 푹 숙일 때였다.

“저 아이냐?”

근엄하면서도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임금님의 목소린가 봐.’

지오는 저도 몰래 슬쩍 고개를 들었다. 긴 수염에 곤룡포를 입은 사람이 보였다. 임금님이었다. 지오의 눈이 임금님의 눈과 딱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아이쿠!’

황급히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지오의 가슴은 쿵쿵 방망이질을 했다.

 “예, 전하. 어제 데리고 입궐하였습니다.”

황산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이내 임금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오라고 했지? 고개를 들어라.”

순간, 장도사가 지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전하께서 고개를 들라고 하시잖아.”

그제야 지오는 고개를 들어 임금님을 바로 보았다.

‘어라? 임금님도 눈이 두 개고 코는 하나네.’ 

임금님의 용안을 확인한 지오는 신기하기만 했다.

“똘똘하게 생겼구나. 연월기를 만드는 일에 전심을 기울여주길 바라노라.”

임금님의 인자한 눈길이 지오를 훑고 있었다. 지오는 임금님께 무어라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때 천복이 소리 없이 입 모양을 해보였다. ‘황공하옵니다’라는 뜻이었다.

‘아하!’

그제야 지오는 옷을 갈아입을 때 천복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맞아! 무조건 황공하옵니다 라고 하랬어.’

“마마, 황공하옵니다.”

 임금님은 입가에 미소를 함박 머금은 채 지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과인이 너희들을 부른 건 다시 한 번 연월기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니라. 나라의 앞날이 연월기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여라. 우리 조선은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으로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려야 할 관리들은 당파싸움으로 나라의 안위는 뒷전이구나. 과인은 평소부터 나라를 부강하게 할 방법은 수리와 천문에 있다고 믿어 왔노라. 과학과 수리력이 발달한 나라가 미래를 여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 시작이 바로 연월기니, 너희들이 맡은 바가 중요하다. 그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기거라.”

임금님의 말끝엔 연신 ‘황공하옵니다. 황공하옵니다’하는 천복과 장도사의 목소리가 추임새처럼 끼어들었다.

“비록 연월기에 관한 것은 짐과 너희들, 그리고 중신 몇 사람만이 아는 비밀 작업이다.하지만 너희들이 연월기만 성공시킨다면 그 보답은 충분히 해 줄 것이다. 신분에 상관 없이 높은 관직을 내려주겠노라.”

“황공하옵니다. 상감마마!”

천복과 장도사는 납작 엎드리며 소리쳤지만, 황산사의 표정은 오히려 굳어졌다.

“전하, 저희가 어찌 개인의 욕심만으로 연월기를 만들겠나이까. 연월기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오직 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기 때문이옵니다. 연월기를 성공시킨다면 과거는 물론 미래 세상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를 읽을 수만 있게 된다면, 이 세상 어떤 나라도 우리 조선을 얕볼 수 없을 것입니다.”

충심에 가득 찬 황산사의 목소리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제야 지오는 황산사가 연월기를 만들려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천복과장도사가 연월치인이 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하지만 충심이나 관직 따윈 지오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지오가 연월치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오직 누나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니까.

며칠 후, 천지관에선 연월제가 열렸다. 본격적으로 연월기 작업이 시작되는 날이었다.연월기의 설계도가 완성된 날이기도 했다. 5년 전부터 황산사와 천복, 장도사가 만들고 있었다는 연월기의 설계도가 완성된 것이다.

‘연월제라고? 양반네들이 벌이는 잔치 같은 건가?’

지오는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궁궐에서 벌어지는 잔치니까 대단할 거야. 잔칫상이 차려지고, 무희들이 춤판을 벌이겠지?’

잔칫상만 생각해도 절로 군침이 돌았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벌어진 연월제는 지오의 상상과는 딴판이었다. 잔칫상 따윈 차려지지도 않았다. 제단에 차려진 건 맑은 물 한 보시기가 전부였다.

“잔치가 뭐 이래요? 맛있는 음식도 없고, 노랫소리도 없고…….”

지오가 입술을 한 자나 내밀고 투덜거리자, 천복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섭섭해 말어. 연월기는 궁궐 안 몇 사람만 아는 일인데, 어찌 잔치를 벌이겄어. 연월제는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해와 달에 정성을 올리는 행사이니, 중요한 건 마음이지.”

연월제는 ‘연월기의 설계도’를 제단에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황산사가 연월기의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릴 땐, 야장들과 천복, 장도사도 제단에 엎드려 함께 기도했다. 지오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해님, 달님, 별님! 부디 연월기가 성공하게 도와 주세요. 꼭 누나를 만나게 해 주세요.’

2010년 07월 수학동아 정보

  • 이향안
  • 진행

    장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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