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 바위에 붙어 멍하니 생애를 보내는 듯한 성게는 눈도, 귀도, 뇌도 없는 단순한 생물로 여겨졌다. 그런 성게가 사실은 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뇌처럼 작동한다는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11월 5일, 독일 베를린 자연사박물관과 이탈리아 안톤 도른 해양생물학 연구소 등으로 구성된 국제 공동연구팀은 성게의 신경계가 척추동물의 뇌와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고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했다. doi: 10.1126/sciadv.adx7753
연구팀이 주목한 건 성게의 변신이었다. 성게는 유생 시절 자유롭게 헤엄치며 인간처럼 좌우 대칭 구조를 지닌다. 그러다 바닥에 정착해 성체가 되면 불가사리처럼 중심에서 다섯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5방사대칭’ 형태로 탈바꿈한다. 연구팀은 하나의 게놈을 가진 성게가 어떻게 이렇게 다른 두 가지 몸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 배경에 집중했다.
연구팀은 보라성게(Paracentrotus lividus)가 성체로 변태한 직후의 세포들을 분석했다. 성게의 유전자를 염색해 어떤 유전자가 어떤 세포에서 작동하는지 지도를 그린 것이다. 그 결과, 다른 동물에서 몸통을 만드는 유전자들은 성게에서 소화관 등 일부 기관에서만 제한적으로 활성화됐다. 반면 척추동물의 뇌 발달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은 성게의 표면과 신경계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현됐다.
더 놀라운 건 신경세포의 다양성이었다. 연구팀은 성게 몸에서 수백만 가지의 서로 다른 신경세포 유형을 발견했다. 이들 신경세포는 도파민,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을 사용했다. 척추동물의 뇌에서 쓰이는 물질들이다.
중앙에 뇌가 없는데 성게는 어떻게 이런 복잡한 신경계를 가질 수 있을까. 연구팀은 성게의 신경계가 단순한 신경망이 아니라 몸 전체에 걸쳐 통합적으로 작동하는 ‘뇌 유사 체계’라고 설명했다. 즉, 성게의 몸 전체가 사실상 척추동물의 머리에 달린 뇌와 유사한 유전적 특성을 지녔다는 의미다.
이번 발견은 복잡한 신경계가 반드시 중앙화된 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논문 저자인 잭 울리히-뤼터 독일 베를린 자연사박물관 연구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전통적인 의미의 중추신경계가 없는 동물도 뇌와 유사한 구조를 발달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복잡한 신경계의 진화를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결과”라고 밝혔다.
성게의 신경 전달 물질은 성게 몸 전체에 분포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