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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유학일기] 모두가 악동이 되는 날, 디치 데이

◇술술 읽혀요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의 재밌는 전통을 알게 된 것은 대학 입학 전인 중학생 때였다.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저서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를 읽었는데, 책에서 소개된 그의 캘리포니아공대 교수 재직 시절 이야기가 매우 인상 깊었다.

캘리포니아공대에는 그 학교만의 재밌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나는 파인만이 묘사한 것처럼 캘리포니아공대에 정말 이상한(?)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지 궁금했다. 몇 년 뒤, 캘리포니아공대에 입학한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누군가 캘리포니아공대의 가장 중요한 전통이 뭐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재학생들은 모두 ‘디치 데이(Ditch Day)’라고 답할 것이다. 디치 데이는 한국에서 최근 유행한 ‘방 탈출’ 게임과 비슷한, 일종의 ‘방 입장’ 게임이다.

4학년 학생들이 방문 앞에 퍼즐을 만들어 놓고 놀러 나가면, 학교에 남은 후배들이 퍼즐을 풀어 선배들의 방을 어질러 놓고 방 안의 음식을 먹는 놀이에서 유래했다. 오늘날의 디치 데이 행사는 형식이 조금 바뀌어, 학교의 공식적인 행사로 자리 잡았다. 디치 데이 행사가 있는 날만큼은 모든 수업이 취소되고, 과제 제출 기한도 자동으로 연기된다.

디치 데이의 정확한 날짜는 4학년들만 안다. 나머지 학생들은 행사 당일 아침에 4학년들의 소란스러운 알림으로 비로소 디치 데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디치 데이가 되면, 4학년 학생들은 아침 7시부터 기숙사 복도를 뛰어다니며 여기저기 방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학생들을 깨운다.


 

 

잠에서 깬 1~3학년들은 라운지로 달려가 하루 동안 참가할 ‘스택(stack)’을 고른다. 스택은 방 탈출 게임의 테마와 비슷하다. 스택은 4학년 학생들이 팀을 짜서 1년 동안 준비한 것으로, 각 스택에는 구성원들의 개성과 노력이 담겨있다. 진행 방식은 기숙사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내가 있던 에이버리 기숙사에는 4~6개 스택이 있고, 각 스택에 맞는 게임과 미션이 준비돼 있었다. 보통은 친한 선배들이 준비한 스택을 고르기 때문에 나는 1학년 때 친했던 입학 동기들이 만든 스택인 ‘Peanut Butter Jelly Sandwich’에 참여했다(내가 군복무를 하는 동안 동기들은 먼저 4학년 졸업반이 됐다).

‘Peanut Butter Jelly Sandwich’라는 이름은 스택을 준비한 4명(Praful, Bobo, Joshua, Sundar)의 이름 앞글자를 의미했다. 스택의 게임들은 그 4명의 특징과 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먹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는 음식 관련 스피드 퀴즈와 눈 가리고 음식 이름 맞추기 등의 게임을 준비했다. 또 농구를 좋아하는 친구는 농구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이처럼 하루 동안 풀고 즐길 수 있는 콘텐츠와 게임을 준비하기 위해 캘리포니아공대생들은 마지막 학기 스택 준비에 아주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스택을 모두 마무리한 디치 데이 저녁이 되면, 에이버리 기숙사의 경우 바닷가, 공원 등에 모여 뒤풀이도 진행한다. 뒤풀이에는 디치 데이를 도운 졸업생도 오기 때문에 재학생들이 평소 만나기 힘든 선배들과 친해질 기회가 된다.

캘리포니아공대에는 기숙사가 8개 있는데, 기숙사마다 전통과 문화가 달라 디치 데이 외에 기숙사별로 유지되는 전통도 있다. 예를 들어 한 기숙사는 저녁 시간에 기숙사 식당에서 서로에게 음식을 던지며 노는 행사를 진행한다. 학생 웨이터가 있는 기숙사에서는 웨이터에게 “오즈의 마법사 한 잔 주세요”라는 식으로 아무렇게나 음료를 주문하면, 웨이터가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해 이름과 비슷한 느낌의 음료수를 제작해 내는 전통도 있다. 또 8개의 기숙사는 1년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파티를 개최한다. 파티는 전적으로 학생들이 준비하기 때문에 개성이 넘친다. 러덕 기숙사는 올해 파티에서 음악에 맞춰 색이 바뀌는 형광등을 세워 놨다. 바글바글 모여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꿋꿋이 노트북을 든 채 조형물의 코드를 수정하던 학생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속한 에이버리 기숙사도 올해 색다른 시도를 했다. 야시장을 주제로 해서 파전, 국수, 만두 등의 음식을 만들어 주는 부스를 운영한 것이다. 반응은 굉장히 뜨거웠다.

캘리포니아공대 학생들은 매년 새롭고, 다양한 활동을 시도한다. 학생들의 큰 호응을 얻으면 학교의 전통이 되지만, 그게 아니면 일회성 행사로 이듬해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 이런 모습은 자칫 시간과 에너지만 많이 드는 쓸데없는 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의 이런 열정이 있었기에 캘리포니아공대만의 전통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통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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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글 및 사진

    이용균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컴퓨터과학과 및 경영학과 3학년
  • 에디터

    조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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