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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나노 조각가, 플라스마

배기가스 정화에서 농약 대체까지

중성입자빔을 이용해 증착한 실리콘 박막 시편. 250℃ 이상의 온도가 필요한 기존 방법과는 달리 상온에서도 증착이 가능해 응용 범위가 넓다.


우주에서 물질은 주로 어떤 상태로 있을까.

수소(H₂)나 헬륨(He) 같은 기체가 아닐까 싶지만 답은 플라스마다. 게다가 구성비도 99%가 넘는다. 플라스마란 원자를 이루는 원자핵과 전자가 서로 분리된 상태. 장마철 하늘을 가르는 번개가 바로 플라스마다. 일상생활에서는 형광등 유리관 안의 플라스마, 즉 유리된 전자가 빛을 내는 원동력이다.

국가핵융합연구소는 고온의 플라스마를 융합시켜 막대한 에너지를 만드는 핵융합발전소를 짓는다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 발전소가 가동되려면 해결해야할 난제가 많아 상용화까지는 앞으로 30~40년 더 기다려야 한다. 국가핵융합연구소가 축적한 플라스마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응용연구를 2000년에 시작한 이유다.


반도체 소자 집적화 핵심기술

마이크로칩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양이 18개월마다 2배씩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에서 1년마다 2배씩 늘어난다는 황의 법칙까지 반도체 메모리 증가 속도가 눈부시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소자 집적화의 핵심 변수인 회로 선폭을 줄이는 기술이 뒷받침됐기 때문. 최근에는 선폭을 50nm(나노미터, 1nm=10-9m)까지 줄인 반도체가 나왔다. 머리카락 두께의 1000분의 1도 안 되는 선폭을 구현하는 데는 플라스마가 한몫했다. 식각, 즉 반도체 기판 위에서 전류가 흐르는 도랑을 파는 기술의 핵심이 플라스마이기 때문이다.

국가핵융합연구소 응용기술개발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봉주 박사는 “반도체 기판에 고에너지의 플라스마 입자인 이온을 조준해 때려주면 경계가 매끄러운 선로를 팔 수 있다”며 “기판이 대리석이라면 플라스마는 조각가의 정인 셈”이라고 말했다. 현재 반도체 제조 공정의 70% 정도에 플라스마가 관여할 정도로 기여도는 엄청나다. 그러나 삼성전자나 하이닉스반도체 같은 국내 반도체업체는 고가의 반도체 장비 대부분을 수입하고 있다. 수조원에 이르는 설비투자다보니 시장에서 검증된 업체의 제품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설비업체들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방법은 제조업체들이 요구하는 새로운 설비를 제작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일입니다. 이 과정에서 저희가 도움을 줄 수 있겠죠.”

반도체의 집적도를 더 높이려면 선폭이 더 좁아져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플라스마 식각 기술로는 한계에 다다랐다. 양전하인 이온은 기판에 붙어있는 음전하인 전자에 끌려 경로가 살짝 휘어지기 때문에 완벽한 수직 도랑을 얻을 수 없다. 응용기술개발그룹은 이런 한계를 극복한 ‘중성입자빔 발생기’를 만들었다. 즉 고에너지의 이온에 다시 전자를 줘 중성입자를 만든 것. 이 입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기 때문에 기판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힐 경우 중간에 휘어지지 않아 매끄러운 수직 도랑을 만들 수 있다. 이 박사는 “현재 중성입자빔 발생기를 써서 반도체 회로를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며 “이 방법이 성공하면 2012년쯤 선폭 32nm를 구현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둘둘 마는 반도체를 만드는 데도 중성입자빔이 중요한 역할을 할 전망이다. 유리판을 구부리면 깨지듯이 무기소재인 실리콘 기판으로 만든 반도체도 고정된 상태로만 쓸 수 있다. 해결책은 탁월한 유연성을 자랑하는 유기소재인 플라스틱을 기판으로 대체하는 것. 그런데 플라스틱은 온도가 올라가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현재 반도체 증착 과정에는 1000℃까지 올라가는 공정도 있으므로 플라스틱을 쓸 수 없다. 응용기술개발그룹의 유석재 박사는 “기판 온도를 높여 증착을 하는 대신 고에너지의 중성입자빔을 쏘아 증착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며 “2012년쯤이면 상온증착을 이용한 고품질 박막제조 기술이 상용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응용기술개발그룹이 만든 중성입자빔은 휘어지지 않기 때문에 선폭을 줄일 수 있다.


팔방미인 대기압 플라스마

반도체 식각, 박막증착처럼 정밀한 작업에는 진공에서 발생시킨 플라스마가 필요하다. 그러나 굳이 진공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는 대기압 상태에서 만든 플라스마를 쓰면 된다. 진공을 만들고 유지하려면 비싼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기압에서 만든 플라스마가 주로 쓰이는 분야는 액정표시장치(LCD)용 기판 표면 세정.

사람 눈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 보이는 기판이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표면에 탄소-수소화합물이 묻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예전에는 화학물질을 처리해 세정했지만 그 과정이 번거로운데다 몸에 해로운 세정액으로 인해 골칫거리다. 그런데 기판 표면에 플라스마를 발생시키면 대기 중의 산소가 오존으로 바뀌며 기판 표면의 탄소-수소화합물을 공격해 이산화탄소와 수증기로 바꿔 날려버린다.

환경기술(ET) 분야에서도 대기압 플라스마가 주목받고 있다. 자동차 배기가스에 포함돼 있는 유해화합물인 낙스(NOx)와 삭스(SOx)가 배출되는 통로에 플라스마 발생장치를 부착하면 배기가스가 통과하면서 낙스와 삭스가 무해한 물질로 분해된다. 연구를 총괄하는 노태협 박사는 “플라스마를 구성하는 고에너지의 전자가 유해화합물을 분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현재 실용화를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플라스마로 수소(H₂)를 만드는 연구도 활발하다. 전자레인지에 쓰이는 마이크로파를 물에 보내면 플라스마 상태가 되면서 고에너지의 전자가 생긴다. 이 전자가 물과 반응하면서 수소기체와 산소기체가 발생한다. 기존의 전기분해를 통한 기체 발생보다 훨씬 효율이 높은 방법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체는 연료전지, 수소자동차에 활용될 전망이다. 노 박사는 “대기압 플라스마는 환경·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며 “우리 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술을 관련 기업체에 이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장마철 번개로나 볼 수 있었던 대기압 플라스마가 우리 곁으로 다가올 날도 머지 않았다.
 

대기압 플라스마 발생 장치를 작동시키고 있는 노태협 박사. 아래 밝은 부분이 플라스마다.


꽃 신선도, 플라스마가 지킨다

은은한 꽃향기와 청아한 자태가 일품인 동양란. 그런데 동양란은 좀처럼 꽃을 피우지 않을뿐더러 꽃을 피우고 나면 식물이 약해진다. 그런데 앞으로는 꽃도 빨리 피고 오래가는 난을 볼 수 있다. 국가핵융합연구소 응용기술개발그룹이 개발한 플라스마 활성수 덕분이다.

전극을 위아래로 놓고 중간에 물이 흐르게 한 뒤 대기압 플라스마를 발생시키면 물이 분해되면서 오존과 수소이온이 발생한다. 이런 상태의 물을 활성수라 부르는데 pH가 2.8~3.0으로 산성을 띤다. 활성수를 테스트한 결과 미생물 살균력이 뛰어나 농약을 대신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또 상추 같은 채소에 뿌려주면 일시적으로 성장을 멈추게 해 출하시기를 조절할 수 있다. 한편 과일이나 꽃에 분무하면 신선도가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를 진행한 김용현 연구원은 “공기 중의 여러 기체에서 나온 플라스마가 물과 반응하면서 수많은 분자가 만들어져 활성수의 특징을 갖는다”며 “정확히 어떤 분자가 이런 역할을 하는지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연구원은 “플라스마로 만든 활성수가 농가에 보급되면 환경에 유해한 농약 사용을 줄이고 농작물의 상품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며 “현재 몇몇 농장에서 현장 테스트를 실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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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 사진

    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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