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 1월은 근대 과학의 창시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에게는 뜻깊은 달이었다. 자신의 망원경으로 세기적인 발견을 이뤘기 때문이다.
1609년 5월 어느날 갈릴레오는 그의 동료인, 베네치아 정부 자문을 맡고 있던 수학자 파올로 사피로부터 한장의 편지를 받는다. 거기에는 한 네덜란드 사람이 쌍안경(spyglass)을 가져와 베니스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수학자이기도 했던 갈릴레이는 도구들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어 이 이야기에 솔깃했다. 게다가 며칠 후 이 쌍안경의 능력에 대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또 다시 전해듣게 되자,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갈릴레이는 자신이 직접 이 도구를 제작해 시험해보기로 했다.
파도바 대학 강사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스스로 ‘관통하여 보는 도구’(perspicillum)라고 명명한 이 도구를 제작하고자, 유리 제작자를 찾아가 유리 가는 법, 광내는 법 등을 직접 전수받기도 했다. 이렇게 몰두한 덕에, 1609년 8월 갈릴레오는 드디어 배율 8배에 이르는 망원경 제작에 성공했다. 기쁨에 차서 그는 이내 친구 사피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사피는 베네치아 상원 앞에서 그가 망원경을 시험해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참석한 상원의원들은 이 망원경의 성능에 감탄해 즉석에서 그의 봉급 인상을 약속했고, 그에게 상원에 상납하는 망원경 제작 독점권을 주기도 했다.
20배율 망원경 만들어 밤하늘 첫 관측
하지만 그의 관심이 도구 제작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연이 있은 몇 달 후 갈릴레이는 20배율로 더 정교해진 자신의 망원경을 밤하늘로 향하게 했다. 대학에서 천문학도 가르치면서,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경도돼 있던 그가 천체 관측에 망원경을 이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선 그의 망원경은 달로 향하였다. 망원경을 통해 본 달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우주관을 확신하게끔 해주는 듯 했다. 천체에 속하는 달은 전통 우주관이 말하는 완벽한 하늘의 보석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달은 지상계에 속하는 조야한 지구와 마찬가지로 울퉁불퉁한 산이 존재하는 구멍투성이의 암석 덩어리였다. 그후 갈릴레오는 본격적으로 망원경을 이용한 관측에 매달렸다.
1610년 1월 7일, 목성 자리를 관측하던 그는 목성 가까이에 3개의 항성이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지식에 따르면 목성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여가기 때문에, 이 작은 항성들은 시간이 지나면 목성의 동쪽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 다음날 관측한 결과 세 항성들이 마치 목성이 동쪽으로 움직인 것처럼 목성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 뜻밖의 현상에 흥미를 느낀 갈릴레오는 일주일 내내 이 별들 관측에 매달렸다.
그로부터 갈릴레오는 몇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하나는 이 항성들이 한번도 목성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 마치 목성 행성을 따라 운반되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 세 항성이 목성을 중심으로 서로 위치 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 항성들이 3개가 아니라 4개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1월 15일, 마침내 갈릴레이는 이 별들이 항성이 아니라 목성을 돌고 있는 위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목성의 위성 발견으로 갈릴레이는 더욱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확신하게 됐다. 당시 알려져 있던 사실, 즉 금성과 수성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 외에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이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모든 것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전통 우주관이 다시 한번 타격을 입게 됐다.
1610년 3월 갈릴레이는 자신이 망원경을 이용해 관측한 사실들을 기록한 ‘별의 전령’(Sidereus Nuncius)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갈릴레이는 이 책을 토스카나 대공인 코시모 드 메디치에게 헌정하며 이 위성들에 ‘메디치의 별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책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고 갈릴레이에게 명성을 안겨줬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발견에 큰 감명을 받은 토스카나 대공의 은총으로 그해 6월 피사대 수학과장을 맡게 되고 대공의 수학 교사로서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이는 전통적 우주관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망원경은 정교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측 사실은 전통 천문학자들에 의해 쉽게 무시돼 버렸다. 게다가 종교적 믿음이나 전해오는 문헌이 새로 관측된 사실에 비해 더 높은 권위를 갖고 있던 시대였으므로, 당시 종교적 체계의 근간을 이루던 전통전 우주관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수학적 논증에 바탕을 둔 코페르니쿠스 우주관보다 확고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갈릴레이는 관찰 사실들에 입각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떳떳하게 주장할 수 없었고, 결국 종교 재판에서 자신의 신념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지 32년이 지난 1642년 1월 8일, 78세의 눈먼 노인이 된 갈릴레이는 피렌체 교외의 옛집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