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 중화학공장, 도시가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산업과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점과 함께 자칫 사고라도 발생하면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낳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산업설비에 비해 각별한 안전대책이 요구된다.
하지만 한국은 성장 위주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온데 비해 안전성 확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기울인게 사실이다. 그래서 산업설비에서 조금이라도 사고의 조짐이 보일 때 국내의 인력과 기술만으로 대처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특히 원자력발전소의 경우 불과 5-6년 전만 해도 가동 중에 기계에서 이상한 기미가 발견되면 일단 미국의 제작회사에 문의하는게 최선의 방책이었다. 전문인력이 국내에 있는데도 기계에 대한 기초 데이터를 확보하지 못해 손을 못쓰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적도 있다.
문제는 제작회사측이 이런 ‘약점’을 알고 값을 마음대로 불러대는데 있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고 해결하는데 얼마의 비용이 드는지에 대해 제작회사측의 견해에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마치 자동차에 대해 잘 모르는 초보운전자가 정비소에서 시키는대로 부품을 교체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뭔가 심증적으로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달리 할 말이 없다.
이런 부당한 일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인력과 기술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현재 산업설비안전성 평가연구센터가 부지런히 기반을 마련하고 있는 일이다. 사고를 예방하려면 사고를 일으킬만한 원인을 정확히 찾아야 한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소처럼 방사능물질에 노출될 위험이 큰 경우 인간이 직접 들어가서 기계를 일일이 체크하기 어렵다. 그래서 등에 ‘초음파발사기’를 단 조그만 로봇을 이용한다. 배관 안에 들어가 움직이며 초음파를 발사하고 반사돼 돌아온 파형을 센서로 감지해 배관 곳곳에 균열이 생긴 곳이 있는지 탐색한다.
만일 원자력발전소의 주요 배관에서 1cm의 균열이 발견됐다고 하자. 그리고 이 균열이 20cm 정도로 커지면 사고가 발생한다고 가정하자.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까.
기계의 남은 수명 평가가 핵심
“1cm의 균열이 생겼다고 당장 발전소의 작업을 정지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20cm가 되기 전까지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안은 20cm로 커질 때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인지 정확히 알아내는 일입니다. 균열 부위를 수리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은지 파악해야 구체적인 보수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설비안전성평가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는 김영진 소장(기계공학부 교수)의 말이다. 사고 예방에서 핵심 사안은 기계의 ‘수명’을 평가하는 일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 일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 사고 원인인 기계의 결함을 정밀하게 검출하는 안전진단기술, 산업 설비의 구조에 대한 엄밀한 해석기술, 그리고 산업설비의 작동시간과 조건에 따라 재료가 어떤 성질로 변화하는지를 평가하는 기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한다. 그래서 연구센터는 국내 여러 대학으로부터 파괴역학, 재료강도학, 구조해석, 비파괴공학, 전산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공학 전문가들을 모아 통합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김소장이 이끄는 성균관대학교 연구센터는 전체 프로젝트를 지휘하는 사령탑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김소장은 캐나다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전력회사에서 5년간 실무경험을 다진 뒤 1985년 귀국했다. 당시 그의 꿈은 국내 산업설비의 안전성을 우리 손으로 확보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외국 제작회사의 점검에 익숙한 한국의 상황에서 ‘한국사람이 제대로 알겠느냐’며 시큰둥한 눈길을 보내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물론 현재는 상황이 바뀌었다. 2년 전부터 과학기술부가 9년 계획으로 우수공학연구센터(ERC)로 지정해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또 국내 주요 산업체에 핵심적인 안전기술을 꾸준히 제공하고 있다.
최근 연구센터는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 점검 수준을 한단계 높인 성과물을 배출했다. 컴퓨터 안 사이버 공간에서 실물과 똑같은 구조를 갖춘 가상공장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새로운 원자력발전소를 짓는다고 하자. 처음 만들 때부터 구석구석에 가느다란 광섬유를 배치하고 이를 통해 레이저를 쏜다면, 나중에 설비에 결함이 생겼을 때 발생하는 레이저의 흔들림을 센서가 감지할 수 있다. 이 데이터는 컴퓨터에 즉각 보내지기 때문에 모니터링 요원이 쉽게 결함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사용되는 로봇의 탐지내용과 결합한다면 안전성에 대한 더욱 완벽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 연구를 맡고 있는 최재붕 연구교수는 “앞으로는 원자력발전소 1기를 세우면 가상공장 1기를 같이 세워 안전에 만전을 기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연구원들의 노력으로 한국이 ‘안전분야의 불감지대’라는 오명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