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학력고사가 '선지원 후시험'이란 형태로 바뀐지도 몇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학력고사가 끝나면 출제위원장이 전반적인 출제 경향을 밝히고 사설 입시전문학원이나 입시지도교사들이 일간지 등을 통해 일회적인 출제문제 경향분석을 하는 정도였다. 여기서는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난 학생들에 대한 평가형태인 입시가 과연 그 본래 목적에 제대로 충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그 범위를 좁혀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현장 과학교사가 중심이 돼 대학입시문제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일선 과학교육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본다.
생물
환경 관련 문제의 비중이 높아진 것은 긍정적이나 너무 기능적인 측면만을 강조한 듯
우리나라 과학교육 방침이 탐구학습으로 전환되면서 과학지식의 전수방법 또한 질적인 변화를 시도해온지도 몇년이 지났다. 과학적 지식이 과학적 탐구활동을 통한 지적결과로 얻어지는 사실 법칙 이론 등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전수 또한 결과적 측면뿐만 아니라 그 과정도 중요시해야 한다.
대학입시는 그 본래목적이 대학에서 수학 가능한 사람의 '선발'에 있지만 이 부분의 중요성 못지않게 고등학교 교과과정올 제대로 이수했는가에 대한 평가도 고려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대학입시의 과열경쟁 때문에 원칙들이 지켜지기보다는 효율성만이 강조돼, 결과적으로 암기위주의 단편적교육이 지배하는 것이 현실이다. 학생들은 과학적 사고력을 기르기보다는 딱딱하고 재미없는 공식들을 외우기에 바쁘다.
대입 학력고사 출제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선발'과 '고교교육의 정상화' 명분에도 허점이 있다. 수업에 충실하고 과열과외를 방지한다는 측면(이것이 고교교육의 정상화 명분이다)에서 교과서 내용에 근거한 출제원칙을 지키고 있는데, 바로 그 교과서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과서 출제원칙 검토돼야
인문계고등학교 생물교과서는 5종에 이르지만 한결같이 획일적이다. 내용전개에 탐구교육의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실례로 생물Ⅰ 교과서 앞부분에 나오는 탐구학습방법 모델 제시는 그 뒤의 내용전개와 무관하다. 따라서 교과서 위주의 출제방식은 과학적사고력 측정보다는 지식주입 위주로 흐르기 쉽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문제점은 평가방법에 객관식 점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응시자가 몰리는 상황에서 객관성 신뢰성 신속성이 중시되므로 객관식 문항이 불가피하게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논술형 시험 방식이 선호되고 있는 외국의 경우와는 좋은 대조가 된다. 생물교과의 경우 단순한 객관식 문제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주관식이라고 나와있는 문제도 간단한 단답형인 것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객관식 문항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난이도 조절에는 성공했으나
지난 학력고사 생물 Ⅰ, Ⅱ의 문제들을 이상의 관점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자.
우선 난이도 조절이라는 측면만 본다면 대체로 쉬운 문제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편적이고 직접적이어서 사고력의 판단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공변세포, 상동염색체의 접합, 극피동물, 피루브산, 검정교배 등). 또 사고력을 측정하려고 낸 그래프가 참고서에서 늘 보아왔던 것이어서 실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던 것도 발견된다(모세혈관, 실무율). 테크닉 위주여서 그 의미는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것도 있다(완두콩의 교배). 과학이 가치중립적일 수 없으므로 환경과의 관계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생물 교과과정의 특징이다. 이번 입시에서도 '생물과 환경' 단원의 출제비중이 높이졌다. 그러나 환경오염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좀 더 구체적으로 반영돼 생물들의 구성상 변화가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그냥 BOD(생물학적 산소요구량와 DO(용존산소량)의 변화만을 기계적으로 외우지 않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그 밖에 관념적이며 생활현장에서 멀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겠다. 생물교과가 상대적으로 다른 교과보다 관념성을 극복하기 좋지만 그런 이점을 살리지 못했다(순환적 광인산화 과정, 제한효소, 2가 염색체의 형성시기 등). 이 밖에 지적할 수 있는 사항으로서 문항 모두가 개별적이어서 타교과와는 물론 생물과목내에서의 단원별 연계성을 찾아볼 수 없다. 교과서 전체에서 골고루 내야하는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교과 과정을 개편함으로써 극복해야 할 것이나 금년도부터 사용될 새 교과서는 불행히도 이전의 교과서와 별 차이가 없다.
이번 입시문제에서 비교적 사고력을 요하는 문제로는 침의 소회작용, 초파리의 눈색깔 유전, tRNA의 염기 배열순서 둥을 들 수 있겠다.
과학적 사고력과 탐구능력은 추상적인 암기식 교육에서 얻어질 수 없으며 이의 극복을 위해서는, 비록 제한적인 것이긴 하지만 입시제도의 개선으로 나타날 학습평가 방법의 혁신이 필요하다. 논문식 평가방법의 도입은 한가지 예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사회구조의 모순을 극복함으로써, 대학진학이 기득권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을 극복하고 사회교육을 활성화함으로써 대학교육이 갖는 진정한 의미에 보다 충실해질 때 가능해질 것이다.
물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예를 문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학입학 학력고사의 물리 문제들을 분석해보면 물리교과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계산을 쉽게 하기 위해(1분안에 한개의 문제를 풀어야하므로)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는 가상적인 상황을 만들어 출제를 한 것이다. 이번 학력고사에 출제되었던 물리Ⅱ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4. 지면에서의 중력 가속도를 g라고 할 때, 지면으로부터 높이가 지구 반경 R만큼 되는점에서의 중력 가속도는 얼마인가?
① 1 / 4g ② 1 / 2g ③ 1g ④2g
실제상황을 염두에
4번 문제는 이미 참고서나 문제집에서 풀어보았던 문제다. 상당수의 학력고사 물리문제의 답은 1/4, 1/2, 0, 1, 2, 4 등과 같은 형태 중 하나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계산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이지 물리현상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4번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무책임하게 출제한 문제다. 땅에서 얼마의 높이를 따지는 문제는 실제 자연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학생들은 TV에서 위성 중계를 할 때 위성 중계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진행자가 태평양 상공의 정지 위성이나 인도양 상공의 정지 위성으로부터 화면을 받는 장면을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정지위성은 대략 3만6천km 상공에 있고 지구 반지름의 약 6배 높이다). 또 일기예보 때마다 기상 위성에서 찍은 구름 사진을 본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 자연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감각에도 맞다(물리학적인 감각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많이 접한다는 의미로). 따라서 4번 문제는 아래와 같이 출제돼야 한다.
3. 옆의 그림은 태평양 상공에 떠 있는 정지위성이다. 해면에서의 중력 가속도를 g라고 할 때, 정지 위성이 있는 곳의 중력 가속도는 얼마인가?(단, 정지위성은 해면으로 부터 지구 반지름의 6배 되는 곳에 더 있다)
① 1/49g ② 1/36g ③ 1/7g ④ 1/6g ⑤ 1g ⑥ 0
4지 선다형을 피하면 여러 가지 채점상의 어려움이 있겠으나 해당학교별 채점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본다. 또 주관식으로의 출제도 생각해볼만 하다.
3번 문제(원운동에서 구심력의 크기 구하기)는 단순한 공식 암기를 측정하는 문제다. 3번 문제도 인공위성 같은 실제의 자연현상에 적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문제가 어려워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출제위원들은 문제를 쉽게하기 위해 출제했다고 강변할지 모르나 공식을 묻는 문제는 암기력 측정외에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물리 문제의 가장 큰 문제점이 계산을 편하게 하기 위한 가상적인 상황의 조작이라고 본다면 여기에 버금갈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단순한 수학적인 능력을 측정하는 문제로 바뀌어 등장하는 것이다. 이번 학력고사 물리Ⅰ 10번(물리Ⅱ에서는 11번) 문제를 살펴보자.
10. 오른쪽 그림과 같이 매질 Ⅰ에서의 파장이 λ인 파동이 매질 Ⅱ로 굴절해 들어간다. 입사각이 45˚이고 굴절각이 30˚라면, 이파동의 매질 Ⅱ에서의 파장은?
① 1/$\sqrt{2}$λ ② $\sqrt{2/3}$λ ③ λ ④ $\sqrt{2}$λ
이 문제는 굴절의 의미를 조금도 이해하지 않아도 풀 수 있다. 단순히 공식만 외웠다면 기계적으로 공식에 대입하여 답을 구할 수 있다. 만약 시간이 걸린다면 계산 시간이 걸어서지 물리적인 의미를 생각하다가 머뭇거린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고 해도 만약 이 문제를 푸는 학생이 수학에서의 사인이나 코사인 값을 외우지 못했다면 아무리 굴절을 잘 이해하고 있어도 문제를 풀지 못한다. 누군가 그 정도도 못한다면 어떻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핀잔을 줄 수 있으나, 이런 유형의 문제를 풀기위해 단순한 수학적인 값을 외우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물리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길어지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학력고사에서 어렵다고 느낀 문제의 상당수가 물리적인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라 수학적인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신중하게 출제해야 한다. 또 대학으로 진학하는 학생들의 대부분이 물리나 수학을 전공하지 않는다는 것만 보아도 물리 문제에서 수학적인 능력을 묻는 경향은 피해야 한다.
학력고사 물리 문제에서 매년 지적할 수 있는 문제점은 제시된 문제들이 대부분 단편적인 지식을 측정하는 것들이다. 각 단원마다 치우치지 않게 골고루 출제하다보니 참고서나 문제집에서 취하는 단편적인 지식을 묻는 문제로 되지 않을 수 없다.
참고서나 문제집에서 다루는 문제는 어떤 형식을 갖추고 있는가. 참고서의 문제들은 각 소단원이 끝날 때마다 그 단원에만 알맞은 문제들을 나열한다. 물리를 배워서 얻은 전체적인 효과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예를들어 물리Ⅰ의 3단원과 4단원을 배우면 '물질의 이중성'과 '질량에너지 등가원리' 등에 대한 시각을 갖춘다. 따라서 이중성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물어봐야지 참고서처럼 이중성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과정에 있는 단편적인 지식들을 나열하는 것을 물어봐서는 안된다. 이번 학력고사 문제에서 물리Ⅰ의 8번 파동의 파장을 구하는 문제, 9번 파동의 간섭을 묻는 문제, 10번 굴절에서 파장을 구하는 문제, 11 번 회절에 대한 문제, 12번 거울 문제, 14번 광전효과에 대한 문제 등을 잘 구성한다면 체계적인 시각을 묻는 문제로 발전시킬 수 있으나 단순한 나열에 그치고 말았다.
새로운 출제경항도 눈에 띄어
이번 학력고사 물리문제 중에서 인문계열 주관식 문제 2번은 지금까지의 형태를 벗어난 아주 뛰어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이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있는 전기력선의 그림을 직접 그리게 하는 문제였는데, 시험결과가 상당히 기대를 모은다. 또 주관식 3번(질량에너지 등가문제)은 단순히 등가원리를 묻지 않고 광량자의 파장과 에너지와의 관계까지 연관시킴으로써 늘 중앙평가원이 주장하는 '종합적인 사고력의 측정'이라는 구호에 아주 알맞은 문제가 되었다.
이번 이번 학력고사의 물리문제는 대부분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상황을 기정한 추상적이면서 인위적으로 조작한 가상적인 문제였고, 학생들에게는 물리적인 의미보다는 단순한 암기력 측정에 머물렀으나, 몇몇 문제들은 지금까지의 틀에서 벗어난 뛰어난 문제들이 있었다. 학력고사가 다음해 고교의 물리교육을 지배하는 현실을 볼 때 출제위원들은 각 문제들을 한결 신중하게 교육적인 효과를 생각하면서 출제해야 할 것이다.
지구과학
비교적 교과서 내용에 충실했으나 출제의도가 분명치 않은 지엽적인 문제도 있었다.
지구과학의 경우 지난해와 같이 엉뚱한(?) 문제가 출제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번 문제들을 보면 주로 기본적인 개념에 관한 기초적인 문제들이 출제돼 평이했고, 교과서 내용에도 비교적 충실했다. 이글에서는 단순한 문제 분석이기 보다는 실제 입시문제가 수업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해 이번 입시문제에 나타난 몇가지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난하나 단편적
지구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지구 주위의 자연계에 대한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으로, 크게 천문 해양 기상 지질분야로 나뉘어진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자연과학이다. 흔히 출제위원장이나 입시 전문 기관에서 문제 분석을 한 내용을 보면 교과서내의 전 단원에서 골고루 출제되었다고 발표하는 데 이는 단순히 숫자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즉 전단원에서 골고루 출제가 되었더라도 그 문제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가 더 중요하다.
예를들면 문과 이과 1번 문제의 경우 대기권에서 가장 온도가 낮은 곳을 물었는데 과연 이것이 어떤 쓸모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또한 거기에 중요한 뜻이 담겨져 있는 물음도 아니었다. 그 보다는 대기권이 높이에 따라 온도가 각각 다르게 변하고,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문과 5번과 이과 7번 문제에 퇴적암의 성인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보기의 석회암 암염 집괴암과 같은 퇴적암들은 실제로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퇴적암(역암 사암 셰일) 등이 아니고 특수한 환경에서 생성되는 특별한 퇴적암들이다. 이 내용들은 교과 내용중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간단히 소개하고 지나가는 정도의 지엽적인 내용들이다.
입시 문제는 다양한 지구과학의 교과내용중에서도 반드시 알아야하는 내용을 묻는 문제가 출제됐으면 한다.
현재의 학력고사 문제들은 다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단시간내에 그 결과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객관식 4지 선다형의 문제와 객관식과 다름 없는 주관식 문제들만이 출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단순한 암기위주의 문제와 기본적인 개념 파악을 묻는 문제가 위주가 되고, 실제로 귀가 따갑게 떠드는 탐구과학이라는 의미의 탐구적인 문제는 전혀 출제할 수가 없다.
이러한 폐단 속에서도 문과 3번, 이과 5번의 일기도에 관한 문제는 실생활과 관련돼 도움이 될 수 있는 문제 유형이었다. 실제로 지구과학을 배우는 중요한 이유는 지구과학적 현상의 기본개념을 이해하고, 그 현상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능력을 길러, 이를 바탕으로 실제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적용하는 태도를 길러주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입시문제의 틀속에서 그나마 교과내용 중에서 실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일기도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바람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과 7번과 이과 12번 문제로 출제되었던 금성의 위치도 실제로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금성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문제로 사고력을 요구하는 물음이었다.
또한 객관식같은 주관식이라는 단점은 있으나 문과 l번, 이과 2번 주관식 문제로 출제됐던 세차 운동에 대한 문제도 우리가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북극성을 예로 들어 설명해 지구과학에는 단순한 내용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문제였다. 단, 예년에는 지구과학에서도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지질분야의 내용중 우리나라의 지질 분포나 지사에 관한 문제가 자주 출제되곤 했는데 이번 입시에는 이러한 예가 없어 아쉬웠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히 학력고사를 치른 후 잊혀지는 문제가 아니라 실제 졸업후에도 어떤 현상을 볼때 책을 다시한번 펼쳐보며 왜 그렇게 될까를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다.
출제의도 분명해야
이번 지구과학 문제들중에서 가장 좋지 않았던 문제는 허블의 법칙에 관련해서 우주의 나이를 물었던 이과 14번 문제였다.
첫번째로 이 문제는 설명은 올바로 되어 있으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려준 (그림 1)이 잘못 그려진 것이다. 즉 설명대로 그림을 해석하면 χ축이 시간으로 표시돼있는데 점선을 따라 χ축의 교점인 B점의 시각을 읽게되면 마이너스(-) 시각이라는 웃지못할 결과를 낳게 된다. 실제로 이 그림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며 실제로 그린다면 (그림 2) 같이 그려져야만 올바르게 해석되고, 문제를 푸는데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두번째 문제점은 단순한 기계적 암기사항을 물어보는 문제라는 것이다. 즉 실제 문제를 낸 의도는 허블의 법칙으로 우주의 팽창을 알고, 이를 이용해 우주의 나이를 구할 수 있다라는 것을 물어본 듯하나 이 문제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해석해서 문제를 풀기보다는 단순히 우주의 나이가 허블상수의 역수라는 것만 알면 답을 구할 수 있는 암기 문제가 돼버렸다.
지구과학은 천문 해양 기상 지질이라는 여러 분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학문이다. 그렇기때문에 매년 참가하는 출제위원의 전공 분야에 따라 문제의 전반적인 성격이 달라지는 기현상을 나타낸다. 즉 작년의 경우 전문분야의 문제중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고,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뜻도 없는 타원 은하의 편평도를 묻는 문제가 출제돼 모든 수험생과 일선 교사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올해에도 비교적 평이하기는 했지만, 지질분야의 문제는 실제 수업시 자주 언급 되어지지 않는 내용들도 출제됐다.
현행 입시제도 상에서 가장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은 객관식문제가 지니는 맹점인 암기사항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암기사항을 묻는 문제가 반드시 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분야에서는 지구과학적 현상이나 개념의 이해, 또는 탐구학습에 필수적이거나 실생활에 적용할 때 반드시 필요한 암기사항들도 있다. 논란이 되는 것은 이러한 암기사항 자체가 나쁜것이 아니라 이러한 암기사항을 묻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면 1번 문제와 같은 경우인데 지구의 대기권에서 무조건 온도가 가장 낮은 곳은 어디일까 하고 묻는 것은 단순한 암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대기권의 각 층이 왜 온도가 낮아지고 높아지는가라는 설명도 없이 단순히 온도가 가장 낮은 곳은 어디인가를 물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암기 사항이라도 꼭 필요한 것이라면 여러개의 암기사항을 복합적으로 묶어서 내는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화학
문제가 쉬워지는 방향이 학생의 기호에만 매달린다면 화학 본래의 의미가 상실될 수도 있다.
과학이 학력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못하다. 그 중 화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작다. 그러나 3년간의 배움을 학력고사로 평가받는 체제에서는 어느 과목 하나 소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학력고사 출제방향에 따라 다음해 부터 역점을 두어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을 생각해볼 때 현장교사로서 학력고사의 문제에 대한 비평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현장교사의 장점을 살려 학생의 입장에서 시험문제를 만나게 되었을 때 느낄 수 있을만한 점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문제는 쉬웠지만
이번 학력고사 화학문제에서 나타난 특징은 먼저 예년에 그랬듯이 올해도 비교적 쉽게 나왔다. 이는 과학이 선택과목이 되면서 더욱 심하게 나타난 현상이다. 선택과목으로서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다른 과학과목에 비해 천대받지 않도록 해 많은 학생들이 입시과목으로 선택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경향이 나왔다고 생각된다.
문제가 쉽다는데는 양면성이 었다. 그 하나는 학생들의 기호에 맞다는데 있다. 즉 학생들이 학력고사를 준비해 왔던 참고서에 자주등장하는 경향이기 때문에 약속이나 한 듯이 문제를 풀 수 있고 틀린 학생들이라도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참고서의 경향이란 단순한 지식의 암기상태를 묻는다든지, 계산능력을 테스트하는 문제 등 몰가치적이고도 기능주의적인 문제 방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 학생들이 입시부담을 크게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한면은 쉬워지는 방향이 너무 학생의 기호(실제로는 참고서의 의도)에 매달릴 때 화학이라는 본래적 의미가 상실될 수 있다는 점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화학은 학생들의 흥미를 끌 수도 있고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까지(출제문제의 내용처럼) 그 내용이 피폐화되었다는 사실은 과학교육의 미래가 어둡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따름이다. 선택과목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언발에 오줌누는 식'의 발상보다 보다 알차고 화학의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는 정성들인 문제로 병든 고교교육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식의 출제가 반드시 어려워지는 방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교부가 제시한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지도 및 평가상의 유의점'에 제시한 내용을 지키기만 하더라도 좋은 문제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은 단편적 지식주입을 피하고 화학이 실생활과 산업에 응용되는 면을 다루도록 한다는 것과 화학과 관련되는 책을 풍부하게 소개해 주고 읽게 하여 흥미와 관심을 갖게하는 동시에 개념의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공식암기만 하면
둘째 간단한 화학적 사실을 묻거나 공식화된 법칙을 암기해 대입만하면 쉽게 답이 나오는 형태의 문제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문제가 단편적인 사실을 묻는 형태이거나 간단한 법칙의 기계적인 적용을 묻는 문제다. △전자껍질 내의 최대 전자수(${2n}^{2}$)(2번) △르 샤틀리에 법칙(평형의 이동)(6번) △부분압력의 법칙(8번) △라울의 법칙(9번) △훈트의 규칙(10번) △파라데이 법칙(13번) 등이 그 예다. 주관식으로는 △기체상태방정식(1번) △헤스의 법칙(3번)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교과서 자체가 너무 많은 내용을 담을 수 밖에 없어 과학용어 사전처럼 돼버렸기 때문에 법칙의 나열식 서술을 피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지만 법칙의 실제적 의미나 과학사적인 의의를 도외시한 채 법칙의 단순한 기계적인 적용능력을 알아보는 문제가 이렇게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뜻도 모르면서 문제풀이 방법만 몸에 익힌 학생들은 이러한 문제는 쉽게 맞출 수 있지만 그 학생이 맞았다는 사실과 그 법칙이 가지고 있는 과학적인 사실을 안다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가 된다. 이런 문제는 많은 입시전문학원의 문제집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화학공부를 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점수를 많이 따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올바른 교육과정대로 공부해 온 학생들은 손해를 보게 된다.
셋째 물음의 형식이 단편적인 지식을 묻는 형태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실제 문제를 대하는 학생들로서는 우회적인 질문으로만 보일뿐 과학적 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화학Ⅰ, Ⅱ의 5번은 유기화합물의 끓는점을 묻는 단순한 문제로 보이지만 실제로 푸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고민이 있었을 것같다. 분자간 결합력 차이를 알기 위해 분자의 극성, 비극성을 알아보려 했던 학생들은 디에틸에테르(끓는점 34℃)보다 벤젠(끓는점 80.1℃)을 골랐을 것같다. 둘 다 비극성 분자이고 분자량도 비슷하기 때문에 수소와 탄소원자로 이루어진 벤젠 쪽이 산소까지 포함되어 이루어진 에테르보다 더 결합력이 약한 것 같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에테르가 마취제로 쓰이며 휘발성이 강한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면 풀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학생들에게 익숙한 생활경험상 벤젠도 휘발성이 강하고 불이 붙기 쉬운 물질로 알려져 있으므로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몇몇 교과서에는 벤젠의 끓는점이 나와 있지도 않다).
아마 맞힌 학생들은 끓는점을 외워서 맞추거나 합리적인 결합력 크기를 유추해서 맞힌 경우는 별로 없이 불명확한 상태에서 선택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편적인 지식이 아닌 과학적인 개념을 응용한 문제로 될 수 있었으나 보기의 예가 애매하게 되어 문제의 의도를 흐려버렸다고 본다.
화학의 경우 주관식 문제들은 무난한 형태로 출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합물에 대한 정보를 주고 이성질체 중에서 찾아 구조식으로 답하는 문제나 기체상태방정식에서 분자량을 찾아 원소명으로 답하는 문제는 평범하면서도 화학의 정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예년과 큰 변화없는 출제경향이었고 출제상의 오류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 단편적인 지식의 암기상태를 확인하는 문제가 많았고 고교교육 현실을 보다 교육적으로 만들어 보자는 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