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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헤일메리 과학굿즈 작가 “우주와 인간 문명이 만나 우연히 만들어지는 로맨틱한 이야기를 좋아해요”

 

아주 가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어떤 물건에 꽂혀버릴 때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스포츠 브랜드의 새 신발, 출간을 기다려 온 책, 혹은 나의 컬렉션을 완성할 새 장난감일 수도 있죠. 기자에겐 헤일메리 작가의 ‘궤도 유리잔’이 그런 물건입니다. 2022년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발견했습니다.

 

궤도 유리잔에는 태양계 여덟 개 행성과 달, 그리고 명왕성의 타원궤도가 그 이심률(물체의 운동이 원운동에서 벗어난 정도)과 함께 그려져 있었습니다. 투명한 유리컵 위에 그려진 행성의 궤도가 우주에 떠 있는 행성을 연상시켰죠. 제품 설명에는 아래와 같은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성의 궤도는 원이 아니야. 어, 이거 조금 위로가 되지 않나’ 16세기까지 천문학자들은 행성이 완벽한 원을 그리며 돈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조화롭고, 기하학적이고, 신의 뜻이니까요. 하지만 사실 행성들은 각자 자기만의 타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죠. 그렇다면 그들이 기준으로 여겼던 ‘완벽’은 ‘완벽’이 맞을까요?”

 

예쁜 과학 굿즈(제품)는 많습니다. 과학적으로 의미가 깊은 과학 굿즈도 많죠. 그런데 예쁘면서 과학적으로 의미도 깊은 과학 굿즈는 몇 안 됩니다. ‘이건 나더러 사라고 만든 물건이군’이라고 생각하며 결제 버튼을 눌렀습니다. 헤일메리 작가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강렬했습니다.

 

조금 더 알아보니 그는 정말 과학에 진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트위터에 과학 랩 배틀 홍보 포스터가 공유돼 있질 않나(왜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박사의 팬미팅에서 찍은 인증샷이 있질 않나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촬영한 토성 사진을 보며 황홀해하는 게시물(?) 등 과학 덕질이야기가 가득했습니다. 뭐 하는 사람인지 점점 더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그냥 항상 뭔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하면 뭔가 만들어야 해요”

 

태양이 내리쬐던 7월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의 스튜디오에서 헤일메리 작가를 만났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먼저 꺼냈습니다. “전공이 혹시천문학인가요?” 헤일메리 작가는 웃으며 “미대를 나와 현재는 디자인과 기획 일을 하는 직장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렇기엔 그의 신발에 적힌 ‘NASA’란 글자가 너무 눈에 띕니다. 그는 “천문학은 그냥 즐거워 관심이 많다”고 덧붙였습니다.

 

과학 굿즈를 만들게 된 이유도 그저 즐겁기 때문이었습니다. 헤일메리 작가는 ‘과학 굿즈 작가’라는 호칭이 과분하다면서 “저는 그냥 오타쿠 정도인데요, 그냥 항상 뭔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하면 뭔가 만들어야 하는 성향”이라고 했습니다. 천문학을 사랑하게 된 디자이너라니 그간 항상 과학을 사랑하는 과학자만 만나던 기자에게 너무 낯선 인터뷰이입니다.

 

과학자들이 과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대부분 과학 그 자체가 좋아서입니다. 그런데 헤일메리 작가가 과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과학을 좋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사람에 있었죠.

 

“저는 사람이 좋아요. 사람들이 자연물에 붙인 이야기가 좋아요. 명왕성의 예를 들어볼게요. 사람들은 명왕성의 크기, 위성, 온도, 위치 이런 것들이 아니라 이 행성의 감정을 궁금해해요. 명왕성이 행성 명단에서 쫓겨나면서 가족을 잃어 쓸쓸하진 않을지 생각하죠. 고등학생 시절, 뉴호라이즌스호가 찍어 보낸 명왕성 사진을 보고 감명받았어요. 명왕성의 하트 모양 지형을 보고 ‘명왕성 뺨에 하트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필 인간 문명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기호랑 똑같이 생긴 그림자가 명왕성에 생기는 바람에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생겼죠. 이런 게 좋아요. 우주와 인간 문명이 우연히 만나서 생기는 로맨틱한 이야기들. 우주에 인간이 있어야 성립하는 이야기가 너무 좋아요.”

“새싹 과학자부터 연륜 있는 과학자들까지

제 컵을 쓰고 있더라고요”

 

덕후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게 생기면 그걸 들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제발 한 번만 시도해 보라고 ‘영업’하는 덕후가 있죠. 또는 혼자 조용히 좋아하면서 덕질과 관련된 이것저것을 ‘연성’하는 덕후도 있습니다. 과학 덕질에 있어서 기자는 전자에 속합니다. 그리고 헤일메리 작가는 후자죠. “저는 보통 새벽 두 시쯤 뭔가 가지고 싶어져요. 그리고 만들기 시작하죠. 사실 이런 물건은 저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인기가 좋아서 당황했어요. 그동안은 항상 혼자 좋아했으니까요.”

 

술의 주성분인 에탄올의 분자구조가 강아지처럼 생겼다는 밈은 화학 전공자 사이에서 유명합니다. 작가는 여기에 착안해 귀여운 에탄올이 인쇄된 술잔을 만들었죠. 헤일메리 작가는 “공대나 연구소 등에서 몇십 개씩 주문하시더라”며 “이런 제품을 누가 쓰나 늘 궁금했는데 알게 된 셈”이라고 웃었습니다.

 

좋아하는 걸 계속 만들었을 뿐인데, 사람이 계속 모였습니다. 궤도 유리잔은 서울 북촌의 과학책방 ‘갈다’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책방에 방문한 손님들은 이 컵에 담긴 음료를 마시기도 하고, 컵을 구매하기도 하죠. 혼자 조용히 좋아하며 만든 물건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모습을 보는 경험은 귀합니다.

 

작가는 “갈다에 놀러갔는데, 엄마 손 잡고 온 요만한 새싹 과학자부터 연륜 있는 진짜 과학자들까지 모두 다 제 컵을 쓰더라”면서 “천문학자를 꿈꾸는 아기가 엄마 손을 잡고 그 컵을 사 가고요. 저 컵 덕분에 신기한 일들이 많이 생겨서 저 컵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엄청 잘 만들었어요(웃음).”

 

굿즈가 사랑을 받으면서 책임감도 늘었습니다. 점차 대중과학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게 된 거죠. 그는 “저는 틀리는 게 너무 무서워요”라며 “혹시나 잘못된 정보를 제품에 담을까 봐 크로스체크를 많이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쁘면서 가벼운 과학적 사실이 담긴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건 비전공자만이 가진 장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과학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는 없지만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제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많은 것 같아요. 점점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돼요. 제 말을 듣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고, 제가 좋아하는 물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는지 묻자 아주 그 다운 답이 돌아왔습니다. 헤일메리 작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걸 이야기할 때마다 눈이 빛나는 사람을 좋아해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눈을 빛내는 게 좋아요. 그래서 계속하게 될 것 같아요” 그는 이어 “집에만 있으면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좋아하는 물건만 만들고 싶다”면서 “과학자 여러분의 많은 연락 부탁드린다”고 덧붙였습니다. 과연, 대답하는 그의 눈이 반짝거렸습니다.

 

에필로그: 두 덕후 이야기

 

헤일메리 작가를 만난 게 7월, 이 기사가 여러분께 공개되는 시점은 9월이니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과학계는 한국이 상온 상압 초전도체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는 대박 뉴스로 들썩거렸죠. (자세한 이야기는 30쪽에서 확인하세요!) 이 소식의 진위를 떠나서, 8월 초 기자는 무척 들뜬 나날을 보냈습니다. 갑자기 온 나라가 과학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현실이 들이닥쳤으니까요. 신남을 감당하지 못하고 헤일메리 작가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같은 과학덕후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거든요.

 

헤일메리 작가는 “과학동아 기자가 제게 상온 상압 초전도체 이슈에 관해 묻는 이게 현실인가 싶다”면서 “2022년 태양계 행성이 정렬될 때 한참 천문학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걸 보고 저도 ‘아니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우주에 관심이 많았다고?’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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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일메리: 헉, 근데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이과 개그에 정말 대중이 다 같이 웃고 있어요갑자기 감동적;;

소연 기자: 그게 너무 기뻐요. 이 일을 계기로 과학을 즐겁게 여기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생겼길! 과학덕후가 우르르 생기면 더 좋고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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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김소연 기자
  • 사진

    남윤중
  • 디자인

    이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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