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진원의 독백
# 민정의 집을 찾은 진원
사람 사는 것 다 비슷하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 사는 환경, 사용하는 화장품, 먹는 음식에 따라 피부에서 발견되는 미생물은 천차만별이다. 연구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은 계통의 미생물을 공유하고 있을 확률은 대체로 30% 이하다.
미생물은 20세기 초부터 범죄의 중요한 증거로 여겨져 왔지만, 그간 DNA를 채취하고 읽는(시퀀싱) 기술이 성숙하지 못해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생물의 DNA를 읽는 데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DNA 시퀀싱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물건에 남은 미생물을 파악할 수 있게 됐고, 증거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다행히도 민정의 방 한 켠에는 고장난 노트북과 오래된 폴더형 휴대전화가 남아있었다. 현대인들이 가장 가까이에 두고 사는 것, 컴퓨터와 휴대전화. 이 두 가지 물건에 묻어있는 미생물만 잘 분석해도 주인을 알 수 있다. 만약 이 노트북의 주인이 민정이 아닌 X로 밝혀진다면, 두 사람의 사이는 생각보다 가까웠던 것이리라.
이 노트북은 누구의 것인고?
미국 콜로라도대 생태및진화생물학과 노아 피어러 교수는 키보드에 남겨진 피부 미생물로 개인을 식
별할 수 있다는 연구를 2010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doi:10.1073/pnas.1000162107). 연구팀은 피부에 상주하는 미생물이 개인마다 매우 다르기 때문에 노트북 자판 위에 있는 피부 미생물을 통해 누가 그것을 만졌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연구팀은 면봉을 이용해 세 명의 개인 컴퓨터 키보드에서 평균 1400개 이상의 미생물 리보솜RNA(rRNA)를 채취해 분석했다. 그리고 키보드 주인의 피부 미생물과 비교했다.
리보솜RNA(rRNA)
단백질을 합성하는 세포 소기관으로, 크고 작은 소단위체로 이뤄져 있다. 세균의 계통을 밝히고자 할 때 리보솜을 구성하는 소단위체의 RNA(16S rRNA)를 이용한다. 동종 간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다른 종 사이에서는 큰 다양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논문을 통해 “증거로서 미생물의 가장 큰 장점은 매우 안정적이라는 점”이라며 “엄지 표면의 미생물은 손을 씻고 한두 시간이면 바로 회복됐으며, 수개월이 흐른 뒤에도 비슷한 군집을 유지했다”고 밝혔다. 심지어 2주간 상온에 방치된 물체에서도 피부 미생물 군집을 얻어낼 수 있었다.
키보드에서 얻은 미생물의 군집과 침실에 흩어진 민정의 화장품, 향수에서 검출된 미생물은 동일했다. 키보드의 주인과 향수의 주인이 같다는 의미다. 하지만 민정이 자신의 피부 조각을 내밀지 않는 이상, 두 물건의 주인이 같은 것만 증명할 수 있을 뿐, 이게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집의 물건이 민정의 것인지 X의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생활방식에 따라 분비하는 물질이 달라져
피어러 교수의 연구처럼 대조할 수 있는 피부 조각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용의자조차 찾기 어려운 범죄도 있다. 이런 경우 용의자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UC샌디에이고 약리학과 피터 도러스테인 교수팀은 지난해 11월, 휴대전화에 남겨진 화학물질로 휴대전화 주인의 생활 방식을 추정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doi:10.1073/pnas.1610019113). 연구팀은 성인 39명을 대상으로 참가자의 손과 개인 물품에 묻은 화학물질을 분석했다. 휴대전화를 잡는 오른손에서 8개의 샘플을, 또 휴대전화에서는 앞면과 뒷면에서 각각 2개의 샘플을 추출했다.
각각의 휴대전화에서는 루틴, 플라본 글리코시드, 덱스판테놀 등 다양한 화학물질이 나왔다. 연구팀은 6개의 휴대전화를 선정해 소유자의 생활 방식을 추정했다. 예를 들어 1번 참가자의 휴대전화에서는 ①루틴 ②플라본 글리코시드 ③아노벤존 ④옥시벤존 ⑤디에틸톨루아미드 ⑥아니스산 ⑦덱스판테놀 등이 검출됐다.

연구팀은 1번 참가자가 천연 화장품(식물 유래 성분 ①, ②)을 사용하고, 햇볕이 많은 곳에서 거주하며 야외활동이 많고(자외선 차단제 성분 ③, ④), 모이스처라이저를 사용하며(⑦), 향수를 쓰고(착향제 성분 ⑥), 모기 물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품(⑤)을 사용한다는 것을 유추했다.
연구팀은 이런 방식으로 6명의 식습관과 화장품 사용 패턴을 알아냈다. 카페인은 커피, 니코틴은 흡연 습관을 나타내며, 특정 화장품의 성분이나 약 성분 역시 평소 생활 습관을 드러낸다. 또 오렌지나 레몬을 먹으면 나오는 시트러스 분자 등은 식습관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민정의 방에서 발견된 폴더형 휴대전화의 분석을 의뢰했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날아왔다.
‘향수를 즐겨 사용하는 여성으로, 가격대가 높은 화장품을 주로 이용하며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임.
하루에 한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며, 와인을 선호하고, 오렌지와 같이 상큼한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 나는 과일을 선호하는 것으로 분석됨.’
분석 결과를 조심스레 성준에게 내밀자,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자신의 증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한참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민정이가… 맞는 것 같아.”
하지만 휴대전화와 노트북, 향수가 민정의 것이라고 해서,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다. 분석한 것들이 너무나 개인적인 물건이기 때문이다. X가 민정의 동거인이라고 하더라도, 민정의 향수나 휴대전화를 만질 일이 있었을까.

청소를 하지 않는 창 틈을 보면 누가 사는지 알 수 있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숨바꼭질’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현관문 옆 한 켠에 작은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 그리고 숫자가 쓰여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집에 살고 있는 구성원이다. ‘성인 남성과 여성이 한 명, 아이들이 두 명’.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명장면이었다. 사실 과학적으로는 그 집의 먼지 한 조각만 구할 수 있다면, 구성원을 바로 알 수 있다.
노아 피어러 교수는 청소를 잘 하지 않는 창문이나 문틈에서 발견되는 미생물로 집 안에 구성원을 밝힐 수 있다고 발표했다(doi:10.1098/rspb.2015.1139). 모든 사람의 피부에 존재하는 더마박터(Dermabacter ), 코리네박테리움(Corynebacterium ) 등의 세균들은 성별에 따라 비율이 달라진다. 고양이나 강아지가 특이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균이 있고, 또 사람이나 반려동물 모두 실내에서 주로 생활하느냐 야외에서 주로 생활하느냐에 따라 그 비율이 다르다. 연구팀은 논문을 통해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집 안에 사는 균류의 종류가 결정되고, 집 안의 세균 군집은 구성원들의 정보를 알려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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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 곳곳을 수색했다. 화장실, 화장대, 창문과 문틈의
미생물을 모두 다 분석한 결과는, 단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집에는 오직 민정만이 살고 있었다.
Intro. ‘그날’의 사건을 해독한다 新 DNA 과학수사
Prologue. 당신, 도대체 누구야?
Part 1. DNA는 의외로 수다스럽다
Part 2. 미생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Part 3. DNA로 몽타주를 그릴 수 있을까
Bridge. DNA 메틸화로 기자의 신상을 털다?!
Part 4. 시체 없이도 살인을 증명할 수 있다
Epilogue.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