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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DNA는 의외로 수다스럽다

민정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친구가 집으로 놀러 오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같이 살았던 사람이 있다니.
진원은 민정의 방에서 발견된 DNA의 흔적들이,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준다고 했다.
DNA가 말하는 진실을 듣는 것이… 두렵다.
- 성준의 독백 -


 
#1 진원의 사무실
성준: 그게 무슨 소리야. 혼자 산 게 아니라니.
진원: 민정 씨 화장대, 놓고 간 향수, 흩어진 옷가지, 싱크대, 이불 다 뒤졌어. 거기서 나온 지문은 모조리 다 채취했고. 일단 나온 지문은 세 개야. 민정 씨 것, 네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것. 근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네.

성준: 빨리 말해.
진원: (민정의 지문으로 등록된 사람의 정보를 컴퓨터에 띄우며) 네가 보는 게 빠르겠다.
성준: (한참을 침묵하다) 차수연? 얼굴은 민정인데…, 나이도 본적도 내가 알고 있는 거랑 전부 다 달라. 왜 이런 거야?
진원: 더 이상한 건 이거야. 민정 씨 집에서 나온 또 하나의 지문. 이 지문 주인 이름이 김민정이야. 나이도 네가 알고 있는 민정 씨 나이랑 같고.
성준: …. 얼굴만 빼면 민정이랑 똑같아.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마치 두 사람의 신분이 바뀐 것 같아.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야?
진원: 내가 묻고 싶다. 도대체 누구냐, 김민정.


 
7월 5일에 찾은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혈액이 묻은 천과 기자의 지문이 묻은 지폐가 놓여있다(➊).
여기에 법광원을 비추면 흔적이 남은 부분만 밝게 빛난다(➋).
천은 그대로 잘라서 분석하지만, 지폐는 면봉으로 세포를 채취해 분석한다(➌).

 
지문 채취 속 DNA와 만나다

각종 수사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 중 하나는 범죄 현장에서 용액을 뿌려 지문을 확인하는 것이다. 화학 용액을 군데군데 뿌리고 법광원(크라임라이트)을 비추면 남겨진 지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문은 신원 파악에도 쓰이지만, DNA를 추출할 수도 있다.

잔류한 지문의 98%는 물이고, 나머지는 땀샘 분비물과 소량의 상피세포다. 상피세포에서 DNA를 추출해낸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라 간단할 것 같지만, 의외로 이 과정은 꽤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된다. 기자가 이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보기 위해 7월 5일, 대검찰청 과학수사부를 찾았다.

“증거물 중에는 옷가지가 가장 많지만, 간혹 지폐나 공문서 관련 사건의 경우에는 종이(문서)가 증거물로 들어오기도 합니다.” 이한철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보건연구사가 말했다.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것은 지폐였다. 가장 사람의 때가 많이 탄 물건이거니와, 범죄에서 돈이 빠질 수 없으니까. 지갑에서 천 원짜리를 꺼내 양쪽 손으로 꾹 누른 뒤 이 보건연구사에게 건넸다. 이제 이 지폐에서 채취한 기자의 DNA와 기자의 침(타액)에서 추출한 DNA가 동일한지 알아볼 것이다.

이 연구사의 표정은 ‘이 정도는 껌이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 과정은 절대 껌이 아니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실험은 오후 5시가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기자의 지문이 묻은 지폐에 닌하이드린(Ninhydrin) 용액을 뿌리자 지문의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증거물이 천이라면 혈액이 묻은 부분을 동그랗게 잘라 그대로 작은 실험용 유리병에 넣으면 되지만, 지폐는 지문이 찍힌 부분을 조심스럽게 닦아낸 면봉을 잘라 넣어야 한다.

“면봉에 물이 묻어 있어요. 물을 흡수하는 천은 면봉으로 닦아내도 세포가 묻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그대로 잘라 넣고, 지폐나 종이는 찢어질 염려가 있어 면봉으로 살살 세포를 채취하는 거죠.”

이렇게 얻어낸 증거물에는 범인의(지금은 기자의) 세포가 잔뜩 묻어 있다. 이제 세포를 깨고 그 안에 들어있는 DNA를 분리해내야 한다. 세포를 깨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원래 몸에 들어있는 세포막 분해효소를 주입하는 방법이 가장 많이 쓰인다. 혈액 속 세포나 상피세포는 금방 깨지지만, 정자는 다르다. 난자 막을 녹이는 분해효소들이 첨체에 들어있어 이에 대한 방어기작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세포막 분해효소로는 정자의 막을 깰 수 없다. “혈액과 정액을 분리하는 데 이 성질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정자는 디티오트레이톨(DTT, Dithiothreitol)이라는 화학물질을 이용해 세포를 깹니다.”

DNA의 굵기는 고작 0.34nm. 이 가는 실을 어떻게 다치지 않게 분리해낼 수 있을까. 일반생물학 책을 꺼내 들 시점이다. DNA는 음(-)전하를 띠고 있다. 전기적으로 중성이 아니다. 즉, 양(+)전하를 띤 물질에 달라붙는 성질이 있다. 이 보건연구사는 혈액이 묻어 나온 작은 유리병을 양전하로 대전된 도체에 갖다 댔다. 3분 정도가 지나자 유리병 속 물은 투명해지고, 혈액은 자석 쪽으로 달라붙었다. 이 원리를 이용해 분리해 낸 DNA와 용의자의 DNA를 분석해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면 모든 작업이 끝난다.

처음에는 물에 퍼져있던 혈액 속 DNA가 시간이 지나자 양전하로 대전된 도체 쪽으로 모여있다. DNA가 음전하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성준 더 알아낸 건 없어?
진원 하나 더 있어. 이 의문의 여자, 그냥 X라고 할게. X가 방에서 끌려나갔다는 거야.
성준 그걸 어떻게 알아? 혈흔이 나왔어?
진원 아니, DNA의 흔적이 남았지. DNA의 흔적을 가지고 범죄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어. X의 것으로 보이는 바지 밑단에서 민정 씨 것으로 추정되는 DNA가 엄청 묻어 나왔어.
성준 (발끈하며) 그냥 세탁물을 개다가 묻었을 수도 있잖아. 그게 끌어냈다는 증거가 된다는 거야?
진원 응. 단순히 손을 댔을 때와 끌어냈을 때 나오는 DNA의 양이 완전히 달라.
성준 …….
진원 생각해봐. 이름도 나이도 민정 씨랑 똑같은 X가 민정 씨네 집에 살았고, 심지어 마지막 행적은 그 집에서 끌려나간 거야. 이상하지 않아?
성준 끌고 나간 사람은 민정이가 확실해?
진원 (말문이 막히는 듯) 그 집에서 가장 많이 검출된 DNA와 일치해 민정 씨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어.
성준 (버럭 화를 내며) 그게 무슨 소리야? 민정이를 범죄자 취급해놓고, 누군지 모른다니.
진원 우리나라는 디엔에이법에 의해 대조 DNA가 없으면 신원을 파악할 수 없어. 하지만 민정 씨네 집에서 나온 머리카락과 바지 밑단에서 나온 DNA가 일치한다고. 민정 씨가 누군가를 끌어냈을 가능성이 높아.
성준 나는 못 믿겠어.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줘. 진원 휴…. 그래. 정확한 게 좋지. 내가 아는 박사 중에 DNA로 생김새를 추정하는 사람이 있어. 그 분한테 부탁해 보자(3파트). 그 전에 확인할 게 하나 더 있어. 도대체 X가 누구냐는 거야. 전에 살던 사람인지, 민정 씨랑 같이 살았던 동거인인지, 아님 그냥 집에 놀러 온 친구인지. 일단 그것부터 알아봐야 해(2파트).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DNA는 알고 있다

지금까지 DNA의 역할은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누군지를 밝혀내는 데에 집중돼 있었다. 하지만 최근 범죄의 현장을 재현해내는, 이른바 ‘행동수준(Activity level)’에 DNA를 활용하려는 연구가 많아지고 있다. 네덜란드법과학연구소(NFI)의 티티아 시젠 박사팀은 특정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와 일반적인 상황에서 발견되는 DNA의 양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연구 결과를 국제과학수사학술지 ‘국제포렌식사이언스(FSI)‘ 2016년 1월호에 발표했다. 시젠 박사는 논문을 통해 “DNA 감식 기술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사건 현장에서 사건과 무관한 사람의 DNA가 검출될 확률이 높아졌다”며 “어떤 DNA가 범죄와 연관이 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고 연구 취지를 밝혔다.

범죄 현장에는 범인의 손에 묻은 DNA가 남는다. 손에서 나온 DNA는 주로 입이나 코와 같이 DNA가 많은 부분에서 유래한 것으로, 피부의 피지 샘이나 땀에 포함된 핵산 물질은 DNA를 옮겨주는 유용한 매개체다. 이렇게 묻은 DNA는 생각보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심지어 옷을 빨아도 소량의 DNA는 남아있다.

연구팀은 총 549개의 샘플을 통해 문 손잡이, 전등 스위치와 같이 모든 사람이 만지는 공용 물품에서 나온 DNA와 옷, 장갑, 바지 등 개인 물품에서 나온 DNA, 세탁 후 옷에 잔존해 있는 DNA, 범죄 행위를 했을 때 매개체를 통해 남겨진 DNA의 양과 세포 유형을 조사했다. 범죄 행위에는 교살을 했을 때 피해자의 목에 남겨지는 범죄자의 DNA와 쓰러진 피해자의 바지를 잡아 끄는 등의 행동이 포함된다. 시젠 박사는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어떤 범죄 현장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범용적인 실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범죄 행위보다는 일반적인 상황에 좀 더 초점을 맞춰 실험했다”고 말했다.

실험 결과, 일상 생활에서 묻은 DNA와 범죄 행동을 했을 때의 DNA 양은 평균적으로 4배 이상 차이가 났다(범죄일 때가 많다). 시젠 박사는 “우리가 실험한 어떤 케이스에서도 사건과 무관한 사람의 DNA의 양이 범인의 것보다 많이 검출된 적은 없었다”며 “사건을 수사할 때에는 범죄 상황을 유추하고, 행동의 주체를 찾을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세포 유형도 구분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현장에서 DNA의 존재만 확인할 수 있었다. 가령 성범죄가 일어나 피해자의 속옷에서 용의자의 DNA가 발견돼도, 이것이 그냥 집 안에 널려있던 속옷을 만져서 나온 DNA인지, 정액에서 나온 DNA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연구팀은 피부 세포에만 있는 전령RNA(mRNA)를 발견했고, 자외선(UV) 처리 이후에도 잔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반면 체액에서는 RNA를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연구팀은 “범죄의 상황을 이전보다 구체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doi:10.1016/j.fsigen.2015.1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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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그날’의 사건을 해독한다 新 DNA 과학수사​
Prologue. 당신, 도대체 누구야?​
Part 1. DNA는 의외로 수다스럽다​
Part 2. 미생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Part 3. DNA로 몽타주를 그릴 수 있을까​
Bridge. DNA 메틸화로 기자의 신상을 털다?!​
Part 4. 시체 없이도 살인을 증명할 수 있다​
Epilogue.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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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 사진

    이서연
  • 기타

    [​기획·진행] 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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