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세계적인 개방시대에 우리나라의 농업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경작지 규모가 작아 평야가 넓은 선진농업국과 경쟁하기 쉽지 않다. 또 수천 년 간 농사를 지어 왔기 때문에 토양생산성이 낮다. 그렇다고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록 가격경쟁력은 낮지만 기후 조건과 자연환경이 좋아 우리 체질에 꼭 맞는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업은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수자원 보호처럼 자연환경을 좋게 유지하는데도 큰 몫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농업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닐까?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용어는 다산 정약용을 연구한 고 이을호 선생이 불교와 다산의 가르침을 인용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조선사람이니 조선의 시를 즐겨 짓겠다”(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는 다산의 말은 비록 한문을 빌려 쓰지만 결코 중국적인 시가 아니라 조선 토종적인 시를 써야 한다는 신토불이적 발언이었다. 이런 뜻을 이을호 선생은 우리 땅에서 나와 땅으로 돌아가는 우리 민족의 육신은 같은 곳에서 발원하는 토종의 농산물 실체와 결코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철학적, 종교적, 토속적 어구로 표현했던 것이다.
현재 ‘신토불이’는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토종농산물의 소비를 권장하기 위한 홍보 전략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신토불이를 글자 그대로 풀이할 때, ‘몸(身)과 땅(土)은 결코 서로 무관한 둘(二)이 아니다’는 뜻이 된다. 즉 ‘둘이 아니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말은 ‘밀접하고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지구촌이 하나의 시장으로 엮이는 세계화의 과정에서 우리 것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우리 것을 더 좋은 것으로 지키고 가꿔야 한다는 필연성을 인식시키려는 가르침으로 이 말이 쓰이고 있다. 그런데 혹시 이 말은 세계화가 필수적인 이 시대를 역행하는 시대착오적인 부르짖음은 아닐까.
‘신토불이’는 혹시 미신이 아닐까? 우리나라 사람이 안먹고는 못사는 배추김치 역사는 250년이 채 안된다. 우리가 즐겨 먹는 야채도 콩을 제외한 대부분은 자생지가 우리나라가 아닌 외래품종이다. 같은 원리라면 패스트푸드가 들어와 2백년 정도 시간이 흐르면 김치버거나 불고기버거처럼 토종음식이 되는지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만약 신토불이가 무조건 옳다면 농산물은 수입은 물론 수출을 해서도 안된다는 논리가 생긴다. 신토불이라는 단어는 생각하면 할수록 혼란을 일으킨다. 신토불이 사상의 근원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사상 근원은 조선시대
신토불이 사상의 근원을 정확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로 올라갈 수 있다. 당시는 질병을 다스리고 농사를 일으키는 모든 지침이 중국에 의존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맞지 않는 점이 많았다. 이에 따라 ‘우리땅을 중심으로 건강하게 사는 최선의 방편을 찾자’는 선토성(宣土性) 의식이 싹터 ‘향악집성방’(鄕樂集成方), ‘농사직설’(農事直說), ‘의식동원’(醫食同源), ‘산가요록’(山家要錄), ‘금양잡록’(衿陽雜錄) 같은 책들이 발간됐다.
신토불이 사상은 사람의 병은 장기의 불균형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 땅에서 나는 먹을거리에서 처방을 찾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신토불이를 ‘우리 것만 좋고 남의 것은 나쁘다’는 배타적 행위로 확대해 고집하는 경우가 있고, 한 나라의 국경선을 두고 정의하려는 옹졸함을 보이기도 한다. 단순히 좁은 시야로만 보지 말고 조금 더 넓게 생각하면 신토불이는 자연의 섭리로 해석할 수 있다.
지구에 관다발식물이 나타난 것은 약 4억2000만년전인 실루리아기 때다. 그 뒤로 약 1억년이 지나면서 겉씨식물과 속씨식물이 등장했고, 속씨식물은 꽃가루를 매개해 주는 곤충 덕분에 아주 짧은 시기에 새로운 종을 많이 분화시켰다. 겉씨식물을 갉아먹던 곤충들도 새로 분화된 속씨식물을 먹으면서 새로운 종으로 진화해 현재 지구 생물 수의 반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먹이와 꽃가루 매개활동처럼 속씨식물과 곤충은 불가분의 공생관계로 발전했다.
수억년 공진화의 비밀
식물 입장에서는 자신을 해치는 곤충에게서 공격받는 피해를 줄여야 했다. 방어전략을 진화시키지 못하면 생존을 위협받아 멸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털이나 가시를 만들어 물리적으로 막거나 해로운 화합물을 합성해 곤충의 섭식을 피하거나 줄이는 방어전략을 모색했다. 이에 맞서 곤충은 새로운 먹이식물을 찾아 떠나거나 먹이식물의 방어전략을 이겨내는 새로운 공격전략을 개발했다. 이런 관계는 1억년 이상 지속되는 ‘공진화’(coevolution) 과정을 밟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동식물의 상호관계가 이런 공진화의 산물이다.
생물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화합물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다. 아미노산, 지방산, 탄수화물, 무기염 등 100가지 정도면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할 수 있어서 이들을 1차대사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식물개체의 화합물 조성을 분석해 보면 수천 내지 수만 가지나 된다. 이들 2차대사물은 공진화 과정에서 생긴 물질이다. 먹이식물의 2차대사물 가운데 일부는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는 곤충들을 유인하거나 섭식을 자극하는 화합물로 둔갑했다.
실제로 자연계에서 곤충이 먹이식물을 찾는데는 이런 2차대사물이 필수적이다. 극단적인 예가 누에다. 누에는 뽕나무에 고유한 모린 (morin)이라는 2차대사물이 없으면 굶어 죽더라도 다른 식물은 전혀 먹지 않는다. 반대로 같은 곤충이라도 사는 환경이 다르면 다른 식물을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먹이식물과 곤충의 관계는 이런 공진화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다. 따라서 곤충에게는 현재 그들이 먹는 식물이 그 환경에서는, 특히 화학적인 면에서 최적의 먹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인류가 지구에 등장한 것은 곤충보다 훨씬 늦지만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선조가 되는 여러 단계의 유인원과 그 이전의 선조 동물들이 적자생존하면서 진화시켜 온 유전자를 물려받으면서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인삼의 사포닌이나 은행나무의 플라보노이드는 모두 그 식물이 방어를 하기 위해 만든 물질인데, 사람이 오히려 약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식물의 방어를 이겨낼 수 있도록 진화됐기 때문이다.
인류는 처음 동아프리카에 등장한 뒤 지금부터 약 6만년전 북상하기 시작해 아시아와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황색인종과 백색인종으로 진화했다.
환경에 따라 소화관 길이 달라
우리나라,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유럽의 라틴계 나라들은 연중 강우량이 많아서 곡류나 채소를 생산하기에 적합한 환경으로 농경문화가 발달했다. 이들은 주로 농산물에서 얻는 탄수화물 위주의 식생활을 한 결과 체격이 왜소하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띤다. 반면에 몽고나 티베트, 그리고 유럽의 게르만 족이나 앵글로색슨 족의 유목민들로 발원했던 건조한 지대의 나라들은 가축들을 이끌고 떠돌거나 귀리나 호밀 또는 목초류를 가꾸는 목축문화를 일궈왔다. 이 곳의 사람들은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한 육류 위주의 식생활을 하면서 신체적으로 장대하고 진취적인 성향을 띠게 됐다.
결과적으로 인류도 종족에 따라서 피부색이나 체격은 물론, 생리적인 기능이 많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백인종과 황인종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소화관의 길이다. 영양가가 높은 육류에 의존하는 백인의 소화관은 영양가가 낮은 곡물이나 채소에 의존하는 황인종보다 짧다. 이런 차이가 사는 장소의 땅이나 식생활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신토불이의 섭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현된 결과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요즘 들어 식생활이 크게 바뀌면서 성인병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 주로 쌀을 먹으면서 살아왔는데, 상대적으로 생소한 음식인 빵이나 피자를 많이 먹으면서, 밀가루에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는 경우가 매우 많다. 최근 음식이 달라지면 소화기관내 미생물 종류가 달라진다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먹는 모든 채소가 자연적으로 공진화한 것은 아니다. 채소의 유전자에는 아직도 선조식물들이 자연계에서 생존하면서 축적해 온 유전형질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먹을거리와 그 이용 방식은 제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는 민족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따라서 생활환경이 급격하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먹을거리를 쉽게 바꾸거나 조리 방법을 달리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지금까지 역사와 전통, 관습에 따라 제각기 진화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와 그 이용 방식에는 좋고 나쁨이나 문명과 야만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신토불이, 우리 것만은 아니다
신토불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전유물이 아니다. 동서양 모두 공감하는 사상이다. ‘자신으로서 쌀’(Rice as Self)이라는 책을 지은 에미코(Emiko Ohnuki-Tierney)는 “먹을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견주어 스스로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역동적인 구실을 한다”고 했다. 또 패리(Parry)는 힌두교 문화를 설명하면서 “인간은 먹을거리로 규정된다. 먹을거리가 창출하는 것은 물질적인 육체에 그치지 않고 도덕적인 천성을 이루기도 한다”고 했다. 브라우델(Braudel)도 유럽 문화권 지역에서 “당신이 먹는 음식을 알려 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은 곧 먹을거리”(Der Mensch ist was er ist)라는 독일 속담과 우리의 ‘신토불이’라는 말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세계 각 나라들은 저마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생산하는 농산물도 다르다. 무엇을 먹고 무엇에 의존해 생존하며 자기만의 문화를 만들든 남들이 시시비비하거나 바꾸도록 강요할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시장 개방의 무역 논리에 굳이 민족 자존심을 내세워 반대 목소리만 높일 이유도 없다.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身土不二(신토불이)는 미신인가
1. 신토불이는 미신인가? 과학인가?
2. 우리 쌀은 좋은 것이야
3. 우리 농작물로 만든 위대한 밥상
4. 다시 쓰는 農事直說(농사직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