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보통 당이라고 하면 설탕을 떠올리고 몸에 해로운 성분으로 여겨 덜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설탕을 비롯한 여러 당 성분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영양소로, 우리 몸의 최소 구성요소인 세포의 표면을 덮고 있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세포들이 의사소통을 원활히 해야 한다. 이때 세포 표면에 있는 당들이 의사소통의 통로 역할을 한다. 당의 대사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치명적인 병들이 발생한다. 류마티스관절염 같은 자가면역질환, 암과 동맥경화, 노화과정 등에 당의 과학이 숨어있다.
이에 최근 당 및 당이 결합한 복합당에 대해 방대한 데이터를 확보해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분야인 ‘글라이코믹스’(Glycomics)가 주목받고 있다. 글라이코믹스의 첫음절인 ‘글라이코’(glyco)란 그리스어로 ‘달콤하다’는 의미다.
인간과 침팬지 차이는 당유전자
2001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성을 토대로 ‘지노믹스’(Genomics) 분야의 붐이 일었다. 포스트 게놈 시대를 맞아 ‘프로테오믹스'(Proteomics)가 뒤를 이었다. 대량의 데이터 분석을 특징으로 하는 이른바 ‘~오믹스’(omics) 기술의 핵심이 이제 당으로 옮아가고 있다. 즉 글라이코믹스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일본에서는 글라이코믹스를 활용해 새로운 개념의 신약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당사슬을 리모델링해 효능이나 안정성이 크게 증가한 고성능의 차세대 의약품을 개발하는 것이다. 2003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는 ‘세상을 놀라게 할 10대 과학기술’로 글라이코믹스를 선정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글라이코믹스 관련 연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식품과 영양소로서의 탄수화물 연구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1990년대에는의약품이나 기능성 식품을 개발하기 위해 식물, 버섯, 곰팡이에서 천연당을 추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체기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당의 구조나 기능 연구는 DNA나 단백질에 비해 크게 뒤쳐졌다.
2000년대 들어 유전체 정보가 해독되고 질량을 분석하는 기기들이 발달해 구조 해석이 쉬워지면서 글라이코믹스 분야에서는 커다란 진전이 이뤄졌다. 특히 인간의 유전체를 해독해보니 예상보다 유전자 수가 훨씬 적게 나와서 인체의 기능을 유지하는데 당사슬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리라고 예상된다. 뿐만아니라 최근 영장류인 침팬지의 유전체를 해독한 결과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거의 동일하나 당 관련 유전자들에서 차이가 발견되면서 이런 예상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포도당, 갈락토오스, 만노오스 같은 개개의 당이 사슬 형태로 연결된 구조를 당사슬 또는 당쇄(糖鎖)라고 부른다. 당사슬은 DNA와 단백질에 이어 체내 기능 관련 정보를 담고 있는 ‘제3의 정보 고분자’로 여겨지고 있다.
당은 백혈구의 내비게이터
DNA와 단백질은 주형으로부터 스스로 복제되거나 번역돼 나오는데 반해 당사슬은 주형 없이 세포내 효소들의 복합작용으로 생성된다. 또한 선형구조를 가진 DNA나 단백질과 달리 가지가 여러 개 뻗어나간 형태가 가능해서 더 다양한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즉 단백질은 아미노산 블록 20개가 선형으로 연결돼 ${20}^{n}$(n은 결합 횟수)개의 조합을 갖는다. 이에 비해 당사슬은 8~9개의 당이 5군데에서 결합할 가능성을 갖고 연결되므로 이론적으로 ${(9×5)}^{n}$개의 조합이 된다. 때문에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구조가 생길 수 있다.
세포 표면의 막은 대부분 당사슬로 코팅돼 있다. 이들은 생체 정보의 전달, 세포 간 상호작용, 면역작용을 비롯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예를 들면 세포가 이동할 때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위치를 알려주는 게 바로 당사슬이다.
백혈구는 혈관 속을 빠르게 이동한다. 상처가나 감염이 되면 인접한 혈관이 확장되면서 틈새가고 혈액이 찐득해지면서 혈류 속도가 감소한다. 그러면 백혈구도 상처 부위 근처에서 이동 속도가 느려지면서 표면에 있는 s${Le}^{x}$, s${Le}^{a}$같은 당사슬이 혈관 내피 세포 표면에 발현돼 있는 셀렉틴(Selectin)이라 불리는 수용체와 결합해 혈관 벽을 타고 흐른다. 셀렉틴과 당사슬의 결합은 매우 약하고 일시적이어서 백혈구의 이동을 멈추게 하기보다는 속도를 늦추는 역할을 해 백혈구가 혈관 벽의 틈새를 통해 상처 부위로 빠져나가도록 해준다. 백혈구는 상처 주변에서세균 같은 이물질을 잡아먹는다.
이런 감염반응 메커니즘에 이상이 생기면 면역세포들이 특정 부위에 과다하게 모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류마티스관절염 같은 자가면역질환이다. 또한 특정 부위에 생긴 암이 다른 부위로 번져가는 전이(metastasis) 현상에서도 셀렉틴 같은 당사슬 결합 단백질과 당사슬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사슬은 면역반응에서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표지자로 흔히 사용된다. 예를 들어 사람의 혈액형은 적혈구 표면에 있는 당사슬에 따라 결정된다. 이 당 사슬이 항원으로 작용해 면역반응을 일으키므로 혈액형에 맞춰 수혈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대표적인 혈액형이 ABO 유형이다. A형은 골격사슬(H chain)에 N-아세틸갈락토사민(GalNAc)이라는 당을 부착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어서 A형 항원을 만들어낸다. B형은 갈락토오스를 붙이는 유전자가 있어 B형 항원을 만든다. AB형은이두 유전자를다 갖고 있어 A와 B형항원이 모두 생성된다. O형은골격사슬만 갖고 있다. 따라서 AB형은 자신의 당사슬에 대해서는 항체가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모든 혈액을 수혈받을 수 있는 반면, A형과 B형은 O형 또는 자신과 같은 혈액형만 수혈받을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당사슬에 대해 면역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동물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경우에도 큰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영장류를 제외한 동물의 세포에는 ‘갈락토오스-(1,3)-갈락토오스’(Gal(1,3)Gal)라는 당사슬 항원이 존재하는데, 사람은 이에 대한 항체를 갖고 있다. 따라서 돼지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면 사람의 항체가 이식장기의혈관내피세포표면에있는Gal(1,3)Gal 항원에 결합하는 면역반응이 일어난다. 이 때문에 몇분 만에 이식 장기의 기능이 멈춰버린다.
2003년 미국에서 유전공학 기법으로 Gal(1,3)Gal이 제거된 돼지가 개발돼 이 같은 초급성 면역거부반응 문제가 해결됐다. 그러나 다른 메커니즘으로 일어나는 면역거부반응,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 등은 장기 이식 분야의 숙제로 여전히 남아있다.
당사슬이 생체 기능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글라이코믹스 기술은 의약품, 식품, 화장품 같은 생물 관련 산업에 응용할 수 있다. 특히 의약품으로 사용되는 당단백질이나 탄수화물에 붙은 당사슬의 종류와 구조는 몸에 들어갔을 때 치료 효능, 체류시간, 약리활성, 면역반응 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의약품의 당사슬 구조를 최적 상태로 만들어 효능과 안정성을 증진시키고 면역반응 같은 부작용을 줄이려는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런 연구로 기존 의약품을 개량해 새로운 질병 치료제를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투여량을 줄일수있다. 또 투여 간격을 늘려 환자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할 수도 있다.
글라이코믹스 기술을 적용한 성공 사례로 미국 생명공학회사 ‘암젠’을 들 수 있다. 악성 빈혈, 만성신부전 환자에게는 혈액을 만들어내는 조혈인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제약회사들은 신장에서 만들어지는 조혈인자인 EPO(Erythropoietin) 유전자를 동물세포에서 발현시켜 제품으로 만들었다. EPO는 시장 규모가 10조원이 넘는 ‘바이오 블록버스터’제품이다.
암젠은 기존 EPO에 당사슬을 2개더붙여 효능과 안정성을 10배 이상 증가시켰다. 이것이 바로 빈혈약 ‘아라네스프’. 글라이코믹스 기술이 의약용 당 단백질의 성능 향상에 효율적임이 입증된 셈이다. 아라네스프는 기존 제품에 비해 투여 간격이 3배 이상 길어져 환자의 편의를 크게 증진시키기도 했다.
탄수화물 의약품인 헤파린도 한 예다. 천연 헤파린은 크기와 순서가 다른 선형 다당류의 혼합물로 항응고 효과 외에도 부작용이 많다. 여기서 필요 없는 부위들을 제거해 부작용을 획기적으로 줄인 고성능의 저분자 또는 합성 헤파린이 아벤티스, 화이자, 사노피 같은 굴지의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출시됐다.
의약품뿐만 아니라 기능성 식품, 화장품에도 글라이코믹스 기술은 성공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비타민류는 식품, 화장품, 의약품 시장에서 많은 수요가 있었으나 용해도, 불안정성, 맛과 향의 문제 때문에 사용이 제한돼왔다. 그러나 최근 비타민에 특정 당을 붙여 배당체(glycoside) 형태로 제조하면수용성, 안정성, 생리활성과 같은 물성이 개선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타민C도 포도당을 붙였더니 구조가 안정돼 식품과 화장품에까지 용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비타민B1은 맛과 향을 개선하기 위해, 비타민B6는 자외선과 열에 대한 안정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그리고 비타민P와 비타민E(토코페롤)는 용해도를 증가시키기 위해 당을 붙인 형태가 개발됐다.
조류독감 타미플루도 당과 닮아
지금까지 설탕의 다량 섭취에 대해 경고를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치료하는 설탕이라고 하면 어딘가 모순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당 관련수많은 의약품이 이미 허가를 받아 사용되고 있다.
조류독감 때문에 유명해진 타미플루도 산성 당인시알산과 구조가 비슷하다. 그래서 독감 인플루엔자가 숙주에 감염될때꼭필요한 시알산분해효소의 기능을 억제할 수 있다. 탄수화물 의약품인 히알우론산, 알로에와 단백질 의약품인 면역조절 단백질과치료용 항체도 널리 쓰이고 있다. 아쉽게도 이 분야에서 국내 기술 수준은 특허가 만료된 제품을 개발해판매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몇몇 제약업체와 바이오 벤처기업에서 첨단 글라이코믹스 기술을 적용한 제품을 개발중이다. LG생명과학은 관절기능 개선제나 안과수술 보조제로 사용되는 히알우론산에 글라이코믹스 기술을 적용해 성능이 향상되고 성형수술에도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녹십자와 목암연구소는 임파종을 치료하는 항체의 당사슬을 변형해 효능이 향상된 차세대 제품을 만들고 있다.
바이오 벤처기업인 두비엘과 팬젠도 당사슬을 변형시켜 차세대 B형간염 백신을 만드는 연구를 수행중이다. 이수 앱지스는 유전병인 파브리병을 치료하는 효소를 만들기 위해 당사슬을 변형하는 공정을 개발하고 있다. 학계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는 당사슬을 리모델링하기 위한 원천기술을 연구하고 있어 산업계의 차세대 의약품 개발에 힘을 보탤 전망이다.
당을 붙인 새로운 형태의 ‘빌트인’(built-in) 고성능 의약품들은 소량 투여로 장기간 약효가 지속되고, 기존 약보다 효능이 뛰어나며, 부작용이 적은 ‘친(親)환자용’이다. 투여량이 줄어드니 가격도 낮아져 환자도 이득이다. 결국 환자를 위한 차세대 신약 개발은 당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지노믹스 : 지놈(게놈), 즉 유전체(Genome)란 유전자(Gene)와 염 색 체(Chromosome)의 합성어로 생물이 갖고 있는 전체 유전정보를 뜻한다. 인간 유전체 정보가 해독된 뒤 대량의 유전정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의미 있는 유전자를 발굴해내는 연구 분야를 통틀어 ‘지노믹스’(Genomics)라고 부른다.
프로테오믹스 : 프로테옴, 즉 단백질체(Proteome)란 생물이 갖고 있는 모든 단백질을 말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유전체의 상대어로 ‘유전체에서 발현된 단백질’(PROTEinexpressed by a genOME)을 뜻한다. 단백질체를 연구하는 분야가 바로 ‘프로테오믹스’(Proteomic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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