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에서 동태평양을 가로질러 갈라파고스 제도에 첫발을 디뎠다. 진화론을 창시한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이 땅을 밟은지 170년만이다.
갈라파고스에는 핀치, 이구아나, 땅거북, 군함새 등 여기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생물들이 살고 있다. 다윈은 이들이 오랫동안 육지로부터 격리된 채 살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분화했을 거라는 확신을 얻었다. 바로 이 생각이 현재의 생물은 공통 조상에서 유래해 환경에 적응하면서 변화해왔다는 진화론의 모태가 됐다.
“우리는 서서히 진행되는 이 변화를 결코 보지 못하며, (중략) 그저 현재 생물의 형태가 과거와 다르다는 것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다윈은 그의 역작 ‘종의 기원’에서 이렇게 적었다. 진화는 수백만~수천만년에 걸쳐 아주 천천히 일어나기 때문에 지층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화석을 통해서라야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다윈 이후 갈라파고스를 찾은 과학자들은 실제로 진화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다윈이 미처 보지 못한 생생한 진화의 현장을 들여다보자.
체험 진화 현장
다윈이 관심을 보였던 13종의 갈라파고스핀치는 진화의 영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핀치는 씨앗, 곤충, 과일, 나뭇잎 등을 먹는데, 특이하게도 먹이에 따라 부리의 높이나 폭, 모양이 제각각이다. 씨앗 중에도 크고 단단한 것을 먹는 핀치의 부리는 튼튼하고 뭉툭하며, 작고 연한 씨앗을 먹는 핀치의 부리는 작고 예리하다.
1930년대에 갈라파고스를 찾은 영국 조류학자 데이비드 랙 박사는 크기나 강도가 비슷한 씨앗을 먹는 핀치 종들은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함께 살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씨앗을 먹기에 좀더 적합한 부리를 가진 종이 살아남고 먹이를 뺏긴 종은 도태된다. 반면 크기나 강도가 다른 씨앗을 먹는 핀치들은 경쟁할 필요가 없으니 같은 공간에서도 각자 환경에 적응하며 살 수 있다.
1970년대부터 30년 넘게 갈라파고스 제도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 대프니 메이저의 핀치를 연구한 미국 프린스턴대 진화생물학자 피터 그랜트와 로즈메리 그랜트 교수 부부 연구팀은 더 극적인 진화를 목격했다. 연구가 한창이던 1977년 갈라파고스는 비 한방울 내리지 않고 메말라갔다. 가뭄이 계속되면서 짝짓기 횟수가 줄어 핀치의 총 수가 점점 감소했다.
가뭄이 끝난 후 연구팀은 살아남은 포르티스(핀치의 한 종)들의 부리 높이가 가뭄 전보다 평균 0.5mm 정도 늘어난 사실을 발견했다. 가뭄 동안 씨앗의 평균 크기와 강도가 증가해 크고 단단한 부리를 가진 녀석이 유리해졌기 때문이다. 불과 수년 만에 큰 부리를 가진 포르티스가 ‘선택’받은 것이다. 그러면 포르티스는 이제 계속 큰 부리를 갖는 방향으로 진화할까.
1983년 갈라파고스는 엘니뇨로 한바탕 몸살을 앓았다.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으로 따뜻한 해류가 흘러들어와 수온이 올라가고 많은 비가 쏟아져내린 것. 작은 씨앗은 풍작이었고, 큰 씨앗은 흉작이었다. 가뭄으로 지쳐있던 포르티스들은 격렬하게 짝짓기를 했다. 수백% 이상 증가한 포르티스들의 부리 크기를 측정한 그랜트 교수 연구팀은 깜짝 놀랐다. 가뭄 때와는 반대로 작은 부리의 핀치가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갈라파고스의 자연이 큰 부리를 선호했다가 다시 작은 부리에게로 돌아선데 걸린 기간은 불과 십수년이다.
그 후 영국 에든버러대 조프리 하퍼 교수와 미국 뉴욕대 마리아와 요셉 백볼기 교수 부부는 자연선택 이외에 잡종교배도 핀치의 부리 형태를 바꿀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과거 다윈은 핀치들이 제도 내 각 섬에 고립된 채 다양한 모양의 부리를 가진 종으로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퍼와 백볼기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핀치들 중 일부는 섬에서 섬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이민’ 간 핀치가 타향에서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 짝짓기를 하면서 짧은 시간 내에 더욱 다양한 종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구아나도 이 같은 변화를 겪고 있다. 갈라파고스에는 2종의 이구아나가 산다. 해조류를 먹는 바다이구아나와 선인장을 먹는 육지이구아나다. 최근 플라자섬에서 바다이구아나와 육지이구아나가 교배해 머리는 바다이구아나이고 몸은 육지이구아나인 잡종이 2마리 태어났다. 수십년 후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가이드로부터 3종의 이구아나가 살고 있다는 설명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잡종이 생식능력을 가졌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긴 하지만 말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 목격담
갈라파고스 이외에도 지구 곳곳에서 빠르게 일어나는 진화가 목격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미국 동물학자 조너던 로소스 박사는 큰 나무가 우거진 바하마 군도에 사는 아놀리스 사그레이라는 도마뱀 몇 마리를 키 작은 덤불만 자라는 고립된 섬으로 옮겨놓았다. 새로운 환경에서 도마뱀은 과연 멸종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까. 놀랍게도 20년 후 도마뱀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 대신 큰 나무가 많던 고향에 살았을 때보다 도마뱀의 다리가 훨씬 짧아졌다. 작은 나무가 많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20년만에 체형이 ‘숏다리’로 바뀐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데이비드 레즈닉 박사 연구팀은 1980년대 초 카리브해의 트리니다드섬에 사는 포에실리아 레티쿨라타라는 민물고기를 대상으로 흥미있는 실험을 했다. 이 민물고기는 천적인 육식물고기가 서식하는 강의 하류에 산다. 연구팀은 민물고기 몇마리를 천적이 없는 상류로 옮겨봤다. 11년쯤 지나자 상류로 옮긴 민물고기들이 하류 민물고기보다 몸집이 훨씬 커지고 수명도 길어졌다. 짝짓기 시기가 늦어져 새끼 수도 줄었다. 하류에 살 때는 천적에게 잡아먹힐 것에 대비해 성장과 번식에 박차를 가했지만, 상류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불과 11년만에 환경에 적응해 습성을 바꿔버린 셈이다.
이처럼 생물들은 생각보다 빨리 환경에 적응해왔고, 자연은 그 중 가장 적합한 종을 선택했다. 프랑스 피에르&마리 퀴리대 진화생물학자 안데르스 파프 묄러 박사 연구팀은 이 같은 자연선택뿐 아니라 성선택도 진화를 가속화시킨다는 연구를 지난해 12월 ‘진화생물학’지에 발표했다. 그들이 주목한 생물은 제비. 암컷 제비는 꼬리가 긴 수컷을 선호한다. 꼬리 깃털이 자라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므로 결국 꼬리가 길수록 건강하다는 얘기. 연구팀은 지난 20년간 수컷 제비의 꼬리 깃털이 1.14cm나 길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암컷에게 선택받으려고 혈안이 된 수컷들은 좀더 ‘섹시’하게 보이는 방향으로 ‘서둘러’ 진화한 것이다.
암컷의 배우자 선택이 진화의 원동력이 된 사례는 동아프리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네덜란드 라이덴대 올레 제하우젠과 프란스 비테 박사 연구팀은 빅토리아 호수에 서식하는 시클리드라는 물고기가 불과 약 1만2000년만에 자그마치 500종으로 분화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핀치가 종마다 부리 형태가 다르듯 수컷 시클리드는 비늘 색깔이 각양각색이다. 암컷 시클리드는 각자 선호하는 색깔의 수컷을 배우자로 고르며, 마음에 들지 않는 수컷과는 짝을 짓지 않는다. 수컷 시클리드가 암컷의 눈높이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띤 종으로 분화한 것이다.
인간도 ‘선택’받는다
자연선택, 잡종교배, 성선택 등에 의해 생물의 진화는 지금 이 시간에도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지구상의 생물들은 자신들의 진화 속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새로운 존재를 만났다. 바로 ‘인간’이다.
지난 2001년 이곳 갈라파고스에서는 유조선이 암초와 충돌해 침몰하는 바람에 100만ℓ의 기름이 바다에 그대로 유출됐다. 이 사고로 삽시간에 펠리컨, 바다사자, 갈라파고스펭귄 등 희귀동물 수백마리가 희생되고 말았다. 에콰도르 정부는 해양전문가들을 동원해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당시 과학자들은 “최악의 경우 희귀동물 멸종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 사고의 영향으로 현재 이곳 생태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동아프리카의 호수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인간 활동으로 수질오염이 심각해지면서 시클리드의 시야가 좁아지고 있는 것. 시각을 통해 배우자를 골라야 하는 암컷 시클리드에게는 난감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다른 생물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 자신은 과연 자연선택으로부터 자유로울까. 2002년 영국 주간지 ‘옵서버’는 “인류는 진화의 정점에 도달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보도했다. 영국 런던대 스티브 존스 교수를 비롯한 진화정체론자들은 더이상 인류의 다양한 형질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유전적 우열에 관계없이 생존률이 높아졌고, 다른 인종끼리 결혼해 피가 섞이면서 인류는 점차 ‘비슷비슷’해질 거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미국 캘리포니아대 크리스토퍼 윌스 교수를 비롯한 진화옹호론자들은 인간은 여전히 진화의 영향 아래에 놓여있고 그 방향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특정 병원균에 이례적으로 강한 내성을 가진 종족이 출현할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사는 사람보다 우수한 지적능력을 갖고 문명의 혜택을 더 누리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유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최근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인류가 살아남는 자연선택이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와 진화옹호론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유 속의 젖당을 분해하는 능력. 인간은 성인이 되면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한다. 어릴 때는 체내에 젖당분해효소가 많이 만들어지지만 자라면서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핀란드 헬싱키대 리나 펠토넨 교수 연구팀은 4800~6600년 전 우랄산맥에 살던 사람들이 성인이 돼서도 젖당분해효소가 만들어지게 하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목축업의 비중이 큰 유럽이나 중동 사람들이 성인이 돼서도 우유를 잘 마시는 것은 이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펠토넨 교수는 “이 돌연변이는 아마도 우연히 일어났을 것”이라며 “우유에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사람은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이들이 선택돼 다수가 됐다”고 분석했다.
해발 4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 사는 티베트인 사이에서도 자연선택이 이뤄지고 있다. 미국 캐이스웨스턴리저브대 신시아 비알 교수가 이들의 가계를 추적한 결과, 혈액 중 산소 농도가 높은 여성이 낳은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고산소 여성의 경우 자녀가 어릴 때 사망한 수가 0.4명인데 비해 저산소 여성의 경우에는 무려 2.5명이나 됐다.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 환경이 인간에게 자연선택의 압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비알 교수는 “우리 눈앞에서 진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이런 식이라면 2000년 뒤에는 히말라야인 모두가 고산소 유전자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세상 바꾸는 소리 없는 변화
진화의 시계는 다윈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다. 지구상의 생물들은 출발선에서 기다리고 있는 달리기 선수 같다.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들은 진화라는 경쟁을 시작한다. 심사위원인 자연은 생물들의 미미한 변화 하나하나를 민감하게 감지해 순위를 매겨 진화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 같은 선택의 압력에 인류조차도 자유롭지 못하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정말 한치만 더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실제로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갈라파고스를 떠나기 전날, 산타크루즈섬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우기가 시작되는 시기다. 이제 이곳의 생물들은 다시금 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채비를 차릴 것이다. 소리 없이, 하지만 꼼꼼하게.
진화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 유전자
창조론자들은 동물들이 공통조상에서 유래했다면 어떻게 외모가 그렇게 다를 수 있느냐며 진화론자들을 공격해왔다. 그러나 미국 캘리포니아대 윌리엄 맥기니스 교수 연구팀은 지난 2002년 미미한 유전적 변형이 급격한 외형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네이처’에 발표해 창조론자들을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연구팀은 바다작은새우의 유전자 일부를 조작해 변형단백질을 얻었다. 바로 이 단백질이 바다작은새우의 다리를 만드는 유전자를 방해해 배 부분에 생겨야 할 다리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 맥기니스 교수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몸의 마디마다 다리가 있던 갑각류의 조상을 다리가 적은 곤충으로 변형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2002년 뉴질랜드 마시대 데이비드 램버트 교수 연구팀은 유전자로 진화 속도를 추정하기도 했다. 연구팀은 남극 아델리펭귄 사체에서 유전자를 추출해 돌연변이가 일어난 비율을 분석했다. 그 결과 펭귄이 학계에서 추정하던 것보다 2~7배나 빨리 진화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미국 배일러의대 수잔 로젠버그 박사와 인디아나대 패트리샤 포스터 박사 연구팀은 2001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생명체 내의 DNA합성효소 중에는 유독 실수를 많이 일으키는 것이 있어 필요한 경우 스스로 돌연변이가 생기도록 부추겨 진화 속도를 빠르게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핀치 부리의 다양한 모양도 특정 유전자가 발현하는 시기와 양에 따라 결정된다. 지난해 미국 하버드대 의대 클리포드 타빈 박사 연구팀은 씨앗을 깨는데 알맞은 둥근 부리 핀치 3종과 과즙을 먹는데 알맞은 뾰족 부리 핀치 3종의 발생과정을 비교했다. 그 결과 발생 초기에 둥근 부리 핀치에서 유전자가 BMP4라는 단백질을 더 많이 만들어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둥근 부리를 가진 핀치 3종 사이에서도 이 유전자의 발현 패턴이 조금씩 달랐다. 유전자의 미묘한 변이가 핀치의 부리 모양을 바꿔 자연선택과 도태라는 엄청난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유전자가 진화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증명됐다. 오늘날 인류는 생명과학의 발전으로 유전자를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게 됐다. 인류의 유전자 ‘선택’이 진화에 과연 어떤 영향을 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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