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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게임(이하 게임)을 ‘뿅뿅’이나 ‘오락’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부르면 어색하고 촌스럽다. 비디오 게임이 단순히 오락을 벗어나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문화 상품으로 올라선 지는 이미 오래다. 이 과정에는 게임기의 역할도 크다. 방구차, 갤러그, 제비우스라는 게임 제목이 친숙하게 들리는 세대라면 엄마한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며 오락실을 드나들던 아련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가정용 게임기가 보급되면서 집에서도 오락실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감동을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렵다.
슈퍼컴 대신하는 게임기
1970년대 등장한 가정용 게임기는 꾸준히 발전했지만, 한동안은 게임이라는 본연의 기능에 충실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2,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가 나오면서 점차 멀티미디어 기기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게임은 물론이거니와 음악감상, 동영상 재
생 같은 기능까지 제공해 거실의 중심이 되고자 했다.
특히 게임 매체가 팩 형식에서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광미디어로 바뀌면서부터는 게임기를 개조하는 일이 늘어났다. 게임기를 들고 서울 용산 전자상가의 ‘알 만한 사람은 아는 곳’으로 찾아가면 쉽게 ‘모드칩’을 넣을 수 있다. 모드칩은 게임기의 내부 구조를 바꿔 제조사가 걸어 놓은 제한을 풀거나 새로운 기능을 추가해 준다. 주로 불법 복제품을 이용하려는 목적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게임기의 성능을 더 충실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 소비자가 게임기를 다른 용도로 쓸 수 있게 된 것은 게임기 판매 전략 때문이다. 기업은 게임기를 최대한 널리 보급하기 위해 성능에 비해 낮은 가격을 책정한다. 소비자로서는 최신 하드웨어를 싸게 살 수 있는 셈이다.
이 점이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게임기는 그래픽이 뛰어난 게임을 구현하기 위해 상당한 연산 능력을 갖춘 프로세서를 쓴다. 이를 다른 데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 플레이스테이션3가 좋은 사례다. 플레이스테이션의 연산장치인 ‘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여러 개 연결하
면 상당한 고성능을 낼 수 있다.
2007년 미국 다트머스에 있는 매사추세스주립대 물리학과의 가우라프 칸나 교수는 플레이스테이션3를 여러 대 연결해 슈퍼컴퓨터를 만들었다. 바로 ‘플레이스테이션 클러스터’다. 칸나 교수는 이를 이용해 초대형 블랙홀의 중력이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시뮬레이션했다. 슈퍼컴퓨터를 이용하려면 비싼 비용을 내고도 정해진 시간만 쓸 수 있지만, 플레이스테이션3 클러스터는 저렴한 비용으로 마음껏 쓸 수 있다. 예산 문제에 시달리는 과학자들에게는 매력적이다.
‘분산 컴퓨팅’ 기술로 단백질 구조를 해석하는 프로젝트인 ‘폴딩@홈’도 플레이스테이션3를 이용한다. 분산 컴퓨팅은 인터넷에 연결된 개인용 컴퓨터의 연산 능력을 활용해 복잡한 계산 문제를 푸는 기술이다. 폴딩@홈은 단백질이 접히는 모습을 시뮬레이션해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에이즈와 같은 난치병의 진행을 이해하려는 게 목표다. 플레이스테이션3는 2007년부터 여기에 참여할 수 있는 메뉴를 제공하고 있다. 게임기로 과학에 공헌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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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도 안심하고 걷는다
2006년 닌텐도는 동작인식 게임기인 ‘위’를 발표했다. 곧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도 각각 플레이스테이션 무브, 키넥트라는 동작인식 게임기를 내놓아 게임기의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열었다. 특히 키넥트는 색을 인식하는 카메라와 깊이측정기, 거리 측정용 적외선 센서, 소리의 방향을 알아낼 수 있는 마이크가 들어 있어 다른 보조 장비 없이도 사용자의 얼굴과 동작, 음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인터넷 검색사이트에서 ‘kinect hacking’으로 검색하면 세계 각지의 다양한 활용 사례를 볼 수 있다. 사용자가 직접 만든 체감형 게임은 물론 옷을 사기 전에 가상으로 입어볼 수 있는 드레싱룸, 증강현실 도시 모델, 3D 스캐너로 활용하는 방법 등 참신한 아이디어가 눈길을 끈다.
예를 들어, 도시 모델은 지도 위에 건물을 나타내는 블록을 배치하고 천장에 달린 키넥트가 이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깊이 측정기로 블럭의 높이를 인식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태양빛과 건물의 그림자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여준다. 도시 공간을 설계할 때 건물이 어떻게 서로 일조권이나 미적 요소에 영향을 주는지 확인할 수 있다.
독일 콘스탄츠대에 재학 중인 학생은 키넥트로 시각장애인 보조장비를 만들었다. 키넥트가 달린 헬멧을 쓰면 센서가 거리에 놓인 증강현실 표식을 감지해 장애물을 피해 걸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키넥트와 연결된 헤드셋을 착용하면 장애물이나 방향에 대한 정보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로봇의 눈도 대신할 수 있다. 영국 워릭대 연구팀은 키넥트로 재난이 일어났을 때 위험에 처한 사람을 찾는 인명구조 로봇을 만들었다. 기존에 쓰던 값비싼 레이저 거리 측정장치를 저렴한 게임기로 바꾼 것이다. 로봇 만드는 비용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진보했다. 레이저
거리측정장치가 제공하는 시야는 평면이지만, 키넥트로는 입체 영상을 얻을 수 있다.
스페인 기업인 테데시스는 병원 수술실에서 쓸 수 있는 키넥트용 응용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수술 도중에 의사가 손짓만으로 환자의 차트나 자기공명영상장치(MRI) 영상을 화면에 띄워 참고할 수 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인 디베이션유엑스는 키넥트를 이용해 마우스 없이 손동작으로 컴퓨터를 조작할 수 있는 ‘키모트’를 개발했다.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도 저렴하면서 성능이 좋은 게임기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활용 사례가 많아지자 마이크로소프트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2011년 6월에는 키넥트용 개발 키트를 공개해 자유롭게 키넥트 응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게 했다. 다양한 응용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공모전을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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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도구가 된 게임기
게임기에 관심을 보인 분야가 또 있다. 바로 인터랙티브 아트다. 인터랙티브 아트는 기존 예술과 달리 참여자(인터랙티브 아트에서는 ‘관람객’이 아니라 ‘참여자’라는 표현을 쓴다)가 능동적으로 관여해 작품을 완성하는 예술 분야다.
소통과 이해, 표현을 다루는 특성상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따라 등장하는 새로운 소통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인터랙티브 아트 작가로 서울과 뉴욕 등지에서 ‘미디어 공간 유영’이라는 전시회를 연 강은수 미국 아크론대 교수는 “키넥트의 등장이 작가와 참여자 모두의 입장에서 인터랙티브 아트의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키넥트가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작품에 도입했다. 인터랙티브 설치와 무용을 결합한 작품을 만드는데, 이전에는 참여자가 LED와 스피커가 달린 옷을 입고 움직여야 했다. 천장에 달린 센서가 LED 빛을 인식하는 방식이었다. 참여자가 어색해하거나 불편한 경우가 많았다. 키넥트를 도입한 뒤에는 ‘옷을 입는다’는 장벽 하나가 없어지면서 설치도 쉬워지는 동시에 참여자도 더욱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강 교수는 “동작 인식 게임이 대중화된 뒤로는 참여자가 자연스럽게 작품에 접근한다”며 “더욱 자유롭고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키넥트를 사용해 더 연구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근 들어 게임기는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바로 스마트폰의 대중화다. 스마트폰은 거의 누구나 들고 다니는 게임기라고 할 수 있다. 항상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어 우리의 외부 활동을 게임과 연결해줄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 우탁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예전에는 아웃도어 게임을 기획하면서 장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며 “스마트폰은 터치패드, 자이로센서 같은 첨단 기술을 대중과 가깝게 만들어 줬다”고 말했다.
우 교수는 현재 관광 같은 아웃도어 활동에 게임을 활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단순히 코스를 따라 순서대로 둘러보는 수동적인 관광에 게임을 접목해 훨씬 더 적극적이고 기억에 남는 활동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게임기가 게임기를 넘어서면서 게임과 다른 분야와의 경계도 무의미 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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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게임이 현실인가 현실이 게임인가
PART1. 내가 아직도 게임기로 보이니?
PART2. 게임, 현실을 침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