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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에서 찾는 21세기판 진화법칙

찰스 다윈이 지금 ‘종의 기원’을 다시 쓴다면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까.
그가 유전자라는 개념을 알았더라면 ‘종의 기원’ 내용은 달라졌을까.
‘진화발생생물학’ 또는 간단히 ‘이보디보’로 불리는 ‘21세기판 종의 기원’을 들여다보자.

나의 사랑하는 부인 엠마에게.
오늘은 오랜만에 미국에 있는 친구와 만났다오. 아니, 사실 친구라기보다는 손자뻘쯤 되는 새까맣게 어린 후배라고 해야 할 테지. 물론 그 친구도 머리가 하얗게 샜지만 말이오. 그동안 나를 못살게 굴던 세상에 눈과 귀를 닫고 지내다가 세상 돌아가는 얘길 들으니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소.

아직도 살아 있는 내게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아오? 내가 몸소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을 실천하고 있다며 뒤에서 수군댄다는구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오. 나도 곧 당신이 있는 평화로운 곳에 가리다.

아, 당신이 들으면 흥미로울 이야기도 있소. 사실은 이 얘길 하고 싶어 펜을 들었다오. 세상에는 여전히 나를 떠받들며 나의 진화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소. 오늘 만난 어린 친구도 그 중 한명이오. 내 오랜 벗 헉슬리가 부활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 얘기를 요즘 식으로 만들어 알리는데 열심이라오.

유전자에 새겨진 진화의 흔적
오늘 그가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가 ‘유전자’라는 것이오. DNA라고도 불리오. 당신이 저 세상으로 가고 20~30년 뒤 유전학이란 새로운 학문이 많이 연구됐다오. 그리고 내가 ‘종의 기원’에서는 쓸 수 없었던 다양한 진화의 증거가 여기서 발견되고 있소. 나는 동물들의 겉모습을 보는데 그쳤지만,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 겉모습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DNA라는 물질에서 해답을 찾는다오. 이 DNA를 보려면 머리카락 한 가닥만 있으면 된다고 하오. 입속에서 피부를 조금만 떼어내도 되고 말이오.

논리는 이렇소. 생물이 진화하는 동안 발생한 돌연변이는 유전자의 염기서열에 쌓여서 두 종이 공통조상에서 갈라진 뒤 오랜 세월이 지날수록 두 종의 염기서열 차이가 커진다는 것이오. 생물의 공통조상을 인정하면, 내가 주장했듯이 말이오, 그 공통조상에서 갈라진 생물의 유전자 염기서열에 돌연변이가 쌓이는데, 최근에 갈라진 생물끼리는 염기서열 유사도가 더욱 높고, 상대적으로 오래전에 갈라진 생물끼리는 유사도가 낮다는 것이오. 어떻소? 그럴 듯하오?

여기에는 재밌는 얘기가 하나 있소. 때는 1975년으로 거슬러 가오. 당시 미국 버클리소재 캘리포니아대 알란 윌슨과 메리 클레어 킹이라는 젊은 학자들이 침팬지와 사람의 단백질을 조사했다오. 우리 인간은 두 발로 걷지 않소. 침팬지는 네 발로 움직이고 털도 많고 뇌 용량도 우리보다 작아요. 인간과 침팬지의 이런 엄청난 생물학적인 차이가 유전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 친구들이 궁금했다고 하더구려.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조사하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그럴 만한 기술이 없었던 터라 이들은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을 조사하기로 했다는구려. 헤모글로빈이나 미오글로빈 같은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은 밝혀져 있었기 때문에 그걸 이용한 것이었소. 실제로 조사하기 전에는 이 서열이 상당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오. 그런데 막상 조사를 해보니 사람과 침팬지의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다지 뭐요. 고작 1%였다고 하오.

그래서 이들이 내린 결론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단순히 유전자 차이가 많거나 적다고 생물학적인 형태가 다른 것은 아니며, 중요한 점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데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소. 이런 조절의 차이를 일으키는 곳을 유전자 조절부위라고 하오. 사실 유전자 조절부위 자체가 일종의 DNA요.

내가 지금 ‘종의 기원’을 다시 쓴다면 아마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동물들에서 DNA를 분석해 비교한 결과를 쓰지 않았을까 하오. 갈라파고스 핀치와 거북이 특히 더 궁금하구려.

초파리와 사람이 공통으로 가진 ‘호메오박스’

혹시 에른스트 헤켈 씨를 기억하오? 내 이론을 지지해준 독일의 생물학자 말이오. 헤켈 씨는 1866년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반복설’을 주장했소. 생물 종의 배 발생은 생물의 진화발생을 반복한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하오. 사실 나도 고등생물의 배 발생 과정에 나타나는 특정 기관이 하등생물의 성체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해 이를 진화의 한 증거로 얘기했지만 말이오.

오늘 ‘진화발생생물학’이란 흥미로운 단어를 들었는데 헤켈 씨가 생각나더구려. 요즘 진화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최첨단분야를 진화생물학과 발생생물학을 합쳐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이라고 부른다오. 줄여서 ‘이보디보’라 부르기도 하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됐다지요.

쉽게 말해 발생과정이 어떻게 진화했고, 유전에 의해 어떻게 변경됐으며, 이런 진화학적이고 발생학적인 변화들이 생물의 다양성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연구한다오. 그 얘기를 듣고 헤켈 씨가 진화발생생물학의 장을 연 인물이 아닐까 생각했다오.

원래는 이 두 분야가 떨어져 있었소. 발생생물학은 생물의 발생이 유전적으로 프로그램화돼있고 되풀이되는 반면 진화생물학은 생물의 진화가 프로그램화돼 있지 않고 우연적이라고 봤다오. 사실 ‘종의 기원’이 유명세를 탔던 19세기 말에도 내 기억에 이 둘은 별개였소.

아마 그 즈음이었소. 종간 발생을 비교하는 일이 진화의 증거로 활용되고 거꾸로 진화의 역사가 종 발생에서 나타나는 모든 구조와 형태를 충분히 설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소. 그런데 1920년대와 1930년대 유전학이 진화론에 도입되면서 이 둘은 다시 떨어졌고, 그 뒤 50여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오. 두 학문의 인연이 참으로 깊지 않소.

이 둘의 인연을 이어준 주인공이 바로 초파리라오. 미미한 생물에 지나지 않는 초파리가 어떻게 이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소? 때는 1984년, 초파리의 발생을 조절하는 여러 유전자들이 ‘호메오박스’(homeobox)라고 하는 DNA 염기서열 부위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발견됐소. 이 얘기는 초파리의 발생에서 특정 기능을 담당하는 유전자들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오.

그런데 이후 사람과 같은 척추동물에서도 이 호메오박스가 발견됐소. 이 얘기를 풀이하면 모든 호메오박스 유전자들은 공동 조상에서 비롯됐을 뿐만 아니라 초파리와 사람의 호메오박스 유전자들은 수억 년의 진화 역사가 흘렀지만 여전히 비슷하고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말이오. 이렇게 발생유전자는 보존됐는데도 어떻게 사람과 초파리 사이엔 엄청난 형태적 차이가 생겼을까? 이런 물음이 진화발생생물학의 시작이었다오.

‘종의 기원’에서 내가 쓴 말을 기억하오? “그러므로 나는, 이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생물들은 생명이 첫 숨을 쉬었던 하나의 원시 형태에서 유래했을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젊은 친구에게서 호메오박스 얘기를 듣는 순간 이 구절을 생각했다오.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진 않았나 보오.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레고블록’은?
진화발생생물학 같은 낯선 용어를 쓴 탓에 어렵게 느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레고에 비유하면 이해가 아주 쉽소. 아, 당신은 못 봤겠지만 20세기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가 레고라는 것이오. 이게 어찌나 재밌는지 나도 한동안 레고로 이것저것 만드는데 푹 빠져있었다오. 여러 블록을 끼워 맞추면 집도 됐다가 말도 됐다가, 정말 못 만드는 것이 없다오.

진화발생생물학에서는 생물을 이런 레고블록으로 끼워 맞춘 형태라고 생각한다오. 그러니까 중세 기사를 만들고 서부 농장을 만들고 달에도 간다는(인간이 달에 다녀왔다오!) 우주선을 만든다고 할 때 이들 셋에 공통으로 들어간 레고블록이 있는가 하면 셋 각각에만 들어가는 레고블록도 있소.

여기서 공통으로 들어간 레고블록은 생물로 따지면 조상에게 물려받은 공통유전자에 해당하고, 각각에 들어간 독특한 레고블록이 바로 생물 종이 왜 서로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지 결정짓는 유전자라고 할 수 있소. 예를 들어 인간을 비롯한 척추동물엔 무척추동물한테는 없는 턱이나 척추, 인두라는 레고블록이 있는 셈이오.

이 레고블록이 요즘 학자들 표현으로는 앞에서 말한 조절부위라는 것이라오. 조절부위의 변화가 발생의 차이를 만든다는 증거에는 이런 것들이 있소. 나비 날개에 점이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옐로우 유전자 조절부위, 민물과 바다에 사는 가시고기의 가시 구조 차이를 결정하는 Pitx1 유전자 조절부위 그리고 박쥐의 긴 팔 발생에 관여하는 Prx1 유전자 조절부위 같은 것들이오.

그렇다면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의 진화는 어떻게 일어날 것 같소? 진화발생생물학자들은 그래서 복제라는 개념을 강조하오. 가령 척추동물은 무척추동물보다 유전자 수가 더 많은데, 이는 유전자 복제에 의한 것이라는 식이오.

발생학적으로는 유전자 수가 증가하면 이들 사이에서 다양한 상호작용이 생겨나고 이로부터 복잡한 즉 더 고등한 동물이 나오기 유리하오. 아메바 같은 단세포생물이 다세포생물로 진화할 때도 유전자복제가 대량으로 일어났다고 하오.

나는 이들 발견이 대단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소. 하지만 한편으론 이들이 나의 진화론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오. 사실 유전자 조절부위란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내 머릿속에는 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소.

내 진화론에 조절부위 이론을 넣어보면, 생물이 발생하고 진화하기 위해서는 결국 변화를 위한 돌연변이가 내재돼야 하고, 집단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연선택된 변이, 그 중에서도 우량 유전자가 집단에 퍼져야하오. 이게 적자생존 아니겠소.

그런데 유전자 조절부위를 발견한 것만으론 이것이 뒷받침되지 않소. 박쥐의 팔을 길게 만든다는 Prx1 유전자를 생쥐에 넣어 생쥐 앞다리가 길어졌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자연선택’돼 후손에게 퍼질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겠소. 내가 이 질문을 던졌더니 어린 친구들이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소. 나의 명석함이 아직은 퇴색하지 않았나 보오.

진화발생생물학자들도 이 점을 걱정하고 있다고 들었소. 그래서 내놓은 해결책이 이런 것이오. 나비 날개의 안점을 보면 짧은 세대 동안에도 커지거나 아예 없어지기도 한다는구려.
이런 예를 볼 때 작고 숨겨진 변이들이 큰 진화적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식이오. 다시 말해 작은 진화들이 생물 집단에 존재하다가 적절한 환경에 노출되면 동반 작용을 일으켜 거대한 진화를 일으킨다고 설명한다오.

‘진화법칙’ 만들 수 있나
오늘 나눈 대화는 참으로 오랜만에 나의 학문적 호기심을 자극하길래 당신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어 펜을 들었는데 얘기가 길어졌구려. 내게 많은 얘기를 해준 친구는 션 캐럴이라고 하오. 진화발생생물학을 열심히 연구하는 학자 중 한명이라오.

이 친구는 동물의 다리 발생 조절 유전자를 연구해 생물체에서 새로운 형태가 어떻게 진화돼 나오는지 아주 멋들어지게 설명했소. 나도 감탄할 정도였다오. 바다가재 다리와 초파리 다리는 다리 발생 조절 유전자의 작용에 차이가 있을 뿐 사실은 동일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증명했더구려.

이미 이런 진화발생생물학 연구 덕분에 동물의 배열 방식은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고 하오. 나의 계통수가 점점 풍성해지고 있는 셈이오. 고무적인 결과라 지금 내 마음은 들떴다오.
하지만 아직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오. 생물은 럭비공이오. 예측이 불가능하단 말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생물학자들은 사용할 수 있는 자료를 모아 하나의 ‘공식’을 만들려고 하오.

그러기 위해선 돌연변이 속도나 환경의 영향, 유전자 재조합 효과 같은 요인들이 정량화돼야 하오. 유전자 조절부위와 단백질의 상호작용을 정확히 이해해서 거대한 생물의 계통수도 그려야 하오. 그래야 생물의 ‘진화법칙’을 만들 수 있지 않겠소? 내가 내놓은 자연선택을 정량적으로 만든 법칙이 분명 있을 것이라 믿고 싶소.

나는 오늘 얘기를 나누며 좀 더 살아갈 힘을 얻었소. 당신이 무척 그립소만 앞으로 계속 채워질 진화론이 어떤 결론에 이를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크다오.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겠소? 조만간 또 소식 전하리다.

WORLD INTERVIEW

토머스 헉슬리

1825~1895년. 영국 일링 출생.
독학으로 19세기 후반 최고 비교 해부학자의 반열에 오름.
다윈의 진화론을 열렬히 옹호한 덕에 ‘다윈의 불독’으로 알려졌다.

열렬한 다윈주의자
헉슬리는 스스로 “다윈의 불독이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론을 널리 알리고 또 그 주창자인 다윈의 대변인이 돼 맹렬하게 활동했다. ‘종의 기원’이 출판된 다음해인 1860년 영국과학진흥회의 연례발표는 옥스퍼드에서 있었다. 그 자리에서 헉슬리는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어느 쪽이 원숭이를 조상으로 했는가?”라는 윌버포스 주교의 농담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논의를 하기 위해 지적능력을 사용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원숭이를 조상으로 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종의 기원’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하자마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무릎을 쳤다고 한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헉슬리는 자연선택이 진화의 중요한 동력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를 뜻한다면, 헉슬리는 다윈주의자가 아니었다. 생물의 진화가 선택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뤄진다는 관점은 다윈주의의 핵심이다. 하지만 헉슬리는 생물의 진화는 통상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진행돼왔다고 믿었으며, 여러 차례 다윈에게 생물의 진화가 결코 점진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설득시키려 애썼다. 다윈은 진화의 방향성을 부정했지만, 헉슬리는 진화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헉슬리는 왜 열렬한 다윈주의자 행세를 했을까? 다윈과 마찬가지로 헉슬리는 진보주의자였다. 귀족과 성직자들을 사회구조의 상층에 두고 온갖 사회적, 경제적 활동이 이뤄지는 사회보다는 능력과 노력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꿈꿨다. 국립광산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그는 과학 그리고 과학자의 시각이 과학지식은 물론, 사회, 경제, 정치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의 기원을 신의 창조로 해석하는 일은 과학이 아니었다. 진화론이라는 당시 해석방법이 있었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표현할 길이 마땅치 않던 차에 다윈이 자연선택이라는 과학적 표현과 이론을 내놓았던 것이다. 헉슬리가 무릎을 친 이유도 어떤 방식이든 진화에 대한 과학적 이론이 제시됐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선택 이론에서 창조론을 대체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론의 존재를 봤다.

칼 마르크스

1818~1883년. 프로이센 출생. 정치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
사회주의자. ‘자본론’으로 유명하다.

사회의 진화를 논하다
한때 마르크스가 그의 ‘자본론’을 다윈에게 헌정하려 했으나 다윈이 고사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사실 자본론을 다윈에게 헌정해도 좋겠느냐는 편지를 보낸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그의 사위인 아벨링이었다. 아벨링은 자연현상을 비종교적인 눈으로 다루는 다윈으로부터 많은 통찰을 구하면서 그의 정치철학을 개진했다. 하지만 다윈은 무신론자로 알려진 아벨링과의 접촉을 피하려 했고, 그의 제의도 고사했다. 사실 마르크스 자신도 다윈의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읽으며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그의 ‘자본론’ 3판 한 권을 경탄의 마음을 표하는 증정사와 함께 다윈에게 보냈다. 첫 20~30쪽을 본 다윈은 예사로운 책이 아님을 직감했다. 하지만 독일어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글의 톤도 생소하고 심오한 정치경제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노라고 답장을 썼다. 하지만 지식을 확장하려는 서로의 노력이 인류의 행복을 더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고 전했다. 다윈의 세속화된 자연관이 역사상 계급투쟁의 자연과학적 근거를 보여주는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해 보였다. ‘종의 기원’에서 만인에 대한 투쟁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은 마르크스 한 명만이 아니었다. 물론 다윈 자신은 그의 책에서 ‘힘이 정의를 만들어 낸다’는 함의를 읽었다는 서평을 보고 분노했다. 하지만 그의 책에서 자유방임경제나 처절한 경쟁의 그림자를 놓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찍이 마르크스가 간파했던 것처럼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진화론과 독립된 이론으로 볼 수는 없다. 다윈 자신은 자연선택 이론이 던지는 ‘살벌한’ 함의를 피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경쟁에서 도태되는 개체는 짧은 순간의 고통 뒤 곧 죽음을 맞게 된다는 식이었다. 국가경제론, 계급갈등, 인종, 성별의 문제 등 진화론을 사회현상에 적용하는 이유나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경우든 자본주의사회에 만연했던 자유경쟁 상태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종의 기원’이나 그 내용 일부를 직접 인용하는 행위는 일상적인 일이 됐다. 다윈 자신은 그런 행위를 부정했을까? 그렇지도 않다. 1871년 출판된 ‘인간의 유래’는 인간의 신체뿐 아니라 행동, 마음 그리고 문명까지도 동물의 몸, 행동, 인지 그리고 사회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음을 밝히고자 쓴 책이었다.

다운 하우스

영국 런던 외곽 다운에 위치.
다윈은 1842년 다운 하우스로 이사한 뒤 죽을 때까지 살았다.

진화론의 탄생지
다윈의 사진에는 대개 그가 30대부터 자리 잡고 평생 살게 되는 시골집 서재가 등장한다. 그의 서재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장소였을 뿐 아니라, 1만 통이 훨씬 넘는 매우 긴 편지를 쓰며 외부와 접촉하는 중요한 창구이기도 했고, 현미경 관찰을 하는 실험실이기도 했다. 서재뿐 아니라 그의 집과 주변 전체가 생애 후반 다윈의 주요 작업장이었다. 8명의 아이들을 키우며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과 행동을 관찰하며 다윈은 동물들의 행동과 비교했고, 그 결과는 ‘인간의 유래’나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 이용됐다. ‘종의 기원’을 출판하기 전 다윈은 학자들 사이에서 무엇보다도 따개비의 분류에 관한 3권짜리 학술서적을 낸 권위자로 알려졌는데, 8년간 진행한 따개비 연구 역시 전적으로 그의 서재에서 이뤄졌다. 또 식물의 형태와 가루받이에 관한 연구 역시 대부분 집안과 주변 산책로에서 관찰한 결과였으며, 그의 마지막 책의 내용인 지렁이와 흙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구 역시 집 정원과 주변의 밭 그리고 산책로에서 행해졌다. 다윈은 19세기 가장 유명한 과학자로 인정받았지만, 사실 다윈의 삶은 당시 막 등장하던 전문과학자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박물관과 실험실 또는 학교에서 일했다면 다윈은 여전히 18세기의 대표적인 자연학자들처럼 집에서 대부분의 작업을 했다. 그가 집에서 과학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다윈의 집은 라이엘, 헉슬리, 후커 같은 과학자들과의 교류장소이기도 했으며 주변에 흩어져 사는 다윈가문과 부인의 웨지우드가문 사람들의 중요한 집합 장소이기도 했다. 또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어려운 시기에 쓸 수 있도록 교구목사와 함께 약간의 기금을 따로 마련해 관리하면서 시골 유지로서의 역할도 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사진에서도 잘 드러난다. ‘종의 기원’을 출판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다윈은 사진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연구와 저술에 사진을 이용했고, 말년에는 사진을 넣은 명함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건넸다. 다윈의 이런 명함용 사진은 성스러운 과학자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창배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있다가 2000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을 거쳐 2008년 상명대에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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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김창배 상명대 생명과학전공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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