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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_제주도 람사르 습지를 가다

자연 속 엄마 품 담은 해발 900m 호수의 비경

 

지난 10월 13일 강화도 ‘매화마름 군락지’, 강원도 ‘오대산국립공원습지’, 제주도 ‘물장오리습지’가 람사르 습지로 새로 지정 등록됐다. 이로써 우리나라 람사르 습지는 모두 11곳이 됐다. 제주도에서는 2006년 물영아리오름 습지가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이후 두 번째 쾌거다. 람사르 습지 하면 우포나 순천만이 떠오르지만 모든 습지가 이처럼 드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지는 않다. 제주도 습지 두 곳은 모두 오름, 즉 기생화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람사르 협약에서는 물새 서식지와 생물종 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희귀하거나 독특한 습지도 람사르 습지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제주도의 오름 습지는 어떤 곳일까.



물영아리오름습지



 


11월 3일 13:30

정오에 제주공항에 도착해 전복해물탕으로 제주도의 ‘맛’을 본 뒤 물영아리오름이 있는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를 찾았다. 오름, 즉 기생화산은 오래 전 용암이 분출했던 곳이므로 정상에 오르면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서는 오름 위에 그런 풍경이 펼쳐지리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저 서울 근교의 청계산 같은 아담한 산의 초입에 서 있는 느낌이다.

이곳은 2006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기 훨씬 전인 2000년 이미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기생화산구로 전형적인 오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다 다양한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오름 정상까지 나무계단이 설치돼 있고 양쪽에는 1970년대 심었다는 삼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정상에 오르자 널따란 평지가 펼쳐져 있고 30~40m 높이로 산이 둘러싸고 있다.

“어서 오십시오. 별로 힘들진 않았죠?”


물영아리오름의 생태계 조사를 위해 먼저 와 있던 국립환경과학원 최태봉 박사가 손을 흔든다. 습지는 예상과는 달리 물이 별로 보이지 않고 벼과 식물처럼 보이는 풀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사초과에 속하는 송이고랭이입니다. 아직까지 물이 있는 습지 중심부의 우점종이죠.” 그러고 보니 습지의 식생이 동심원을 이루며 달라지는 모습이 확연하다. “주변으로 갈수록 건조해지기 때문에 골풀, 고마리가 보이고 습지가 끝나는 지점에는 좀찔레와 복분자가 자라죠.” 연도별, 계절별 식생의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최 박사와 동료 연구사들이 영구방형구(식물군락의 표본을 추출할 때 사용하는 틀)를 설치하고 구획별로 식생도를 작성했다.

“제주도에 오름이 380개 있지만 이처럼 정상부에 물이 고여 있는 경우는 9곳에 불과합니다. 올 가을은 유난히 가물어 물이 많이 줄었네요.”

현지 안내를 위해 최 박사팀에 합류한 영산강유역환경청 제주주재사무실 김영호 씨의 설명이다. 해발 508m인 물영아리오름에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야생동물인 물장군, 맹꽁이 등이 서식했으나 최근 자취를 감춰 걱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습지를 조사한 결과 가장 깊은 곳의 퇴적물의 깊이는 8m 이상이고 토양의 유기물 함량이 약 70% 정도라서 엄밀히 말하면 흙이 아니다.




11월 4일 10:00

전날 안개 낀 날씨처럼 시야가 흐려 걱정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제주시 신시가지에 있는 숙소 앞에서 만나 영산강유역환경청 김영호 씨의 차에 탄 일행은 물장오리오름을 향해 출발했다. 전날 물영아리오름보다 한 참 더 높은 해발 937m인 물장오리오름은 제주국립공원 안에 위치해 있어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여기서 물장오리오름이 보이겠군요.” 도중에 차에서 내린 일행은 남쪽에 펼쳐져 있는 봉우리들을 바라봤다. “저 멀리 보이는 곳이 한라산 정상이고 왼쪽 둥그런 산이 물장오리오름입니다.” 김 씨의 설명에 따라 오름을 보는데 역시 그 위에 물이 고여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오름 앞쪽이 약간 주저앉은 모습이 보일 겁니다. 어제 물영아리오름처럼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지요.”

그러고 보니 매끄럽게 정상으로 올라간 게 아니라 정상 바로 아래 단절된 경계면이 있다.


이번에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면적은 628,987m2로 오름 정상 주변까지도 포함됐다. 최 박사는 “물장오리오름에는 좁은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야생식물인 산작약 뿐만 아니라 한국특산종인 개족도리, 새끼노루귀를 포함해 180여종의 관속식물이 자라고 있다”며 “멸종위기야생동물인 매와 팔색조, 솔개, 조롱이, 삼광조, 왕은점표범나비와 물장군도 서식하는 등 생물다양성의 보고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이 부족한 제주도에서 야생동물이나 수생식물의 서식처였던 이곳의 퇴적물을 분석하면 고식생(古植生)을 밝혀낼 수 있어서 학술적 가치도 높다.

다시 차를 타고 한참을 가다 샛길 도로로 들어가는 입구에 차를 세웠다. ‘이곳은 무단출입 집중단속구역입니다’라는 한라산국립공원의 안내문구가 걸린 펜스가 길을 막고 있다. “여기서부터 걸어가야 합니다.” 김 씨의 안내를 받으며 일행은 산행을 시작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어두컴컴했던 물영아리오름과는 달리 햇빛이 잘 들어 식생 분포가 한결 여유가 있다.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어 있는가 하면 새로 나는 연두색 활엽수 잎도 보여 계절을 짐작할 수 없는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물장오리오름은 한라산, 오백나한과 함께 제주도 3대 성산(聖山)으로 불리며 신성시된 곳으로 설문대할망 전설이 있다.


옛날 설문대할망이라는 노파가 큰 키를 자랑하며 여러 호수에 들어가 수심이 얕다고 비웃었는데 이곳 호수 한가운데에서 그만 빠져죽었다는 것. 물장오리오름의 호수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전설 때문일까. 산을 오를수록 기분이 더 묘해지면서 호수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물장오리습지

11월 4일 11:20



 

“우와! 여긴 물이 많은데요.”


산행을 시작한 지점이 이미 해발 600m였기 때문에 30분이 좀 넘게 산을 타자 벌써 정상이 눈앞이다. 오름에 오르자 잔잔한 호수가 펼쳐져 있다. 나무계단 같은 인공구조물도 없고 최근 다녀간 사람의 흔적도 없다. 그러나 예로부터 이곳은 가뭄이 들 때 인근 주민들의 중요한 식수원이었다고 한다. “이곳 수면은 해발 900m 정도 됩니다. 수심은 50cm 내외로 보이네요.” 최태봉 박사의 설명이다. 물이 깨끗해 물밑에 깔린 낙엽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인다.

역시 송이고랭이가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지만 수면이 노출된 부분도 적지 않다. 오름 습지는 평지 습지보다 규모가 작지만 생태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하다. “이곳에 습지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동식물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 여기 노루발자국이 있네요.” 최 박사가 가리킨 곳을 보자 각목으로 쑤셔놓은 듯 움푹 들어간 지점이 군데군데 있다. 눈으로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정말 물가에 이른다. ‘갑작스런 사람들의 침입에 놀란 노루가 어딘가에 숨어있지 않을까?’ 주위를 둘러봤지만 가끔 새소리만 들릴 뿐이다.

노루발자국을 따라 걸으니 신발이 쑥쑥 들어간다. “이렇게 서 있으면 몸이 서서히 빠져 못 나오는 거 아닌가요?” 늪에 들어갔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습지에서 이 부분이 늪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습지 주변부는 그렇게 깊지는 않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최 박사가 웃으며 자리를 뜬다.


습지를 벗어나 오름 정상 부근에 오르자 저 아래 습지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물이 노출 된 부분과 송이고랭이가 자라고 있는 부분이 마치 지도의 바다와 육지처럼 나뉘어 있다. 습지 너머로 눈을 향하자

저 멀리 오름들이 봉긋봉긋 솟아있는 모습이 귀엽고 아득히 바다가 들어온다.


“멋진 풍경이군요. 여기서 사진만 찍어도 계절별, 연도별 식생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겠습니다.”

정상 부근 조망 좋은 위치의 나무에 올라 습지를 바라보며 최 박사가 미소 지었다. 일행 모두 그 자리에 서서 자연이 빚어놓은 환상적인 풍경을 감상하며 이런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길 기원했다.

1 물장오리오름은 한라산국립공원보호구역 안에 위치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보호구역이 시작되는 해발 600m 지점.
2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가 있는가 하면 연둣빛 잎이 달린 나무도 있어 계절을 짐작하기 어려운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다.
3 덩굴식물이 신갈나무 줄기 위에 뿌리를 내린 모습이 탐욕스럽다.
4 모암이 현무암인 오름은 토양층 두께가 얇아 나무뿌리가 깊이 내리지 못한다. 산을 오르다 보면 강풍으로 뿌리째 뽑힌 나무가 군데군데 눈에 띈다.
5 제주도에 흔한 미끈도마뱀. 11월임에도 날씨가 따뜻해 먹이를 찾아 나섰다. (영산강유역환경청 김영호 씨가 미끈도마뱀 생태를 설명하는 동영상은 동아사이언스 홈페이지(www.dongaScience.com)에서 볼 수 있다.)
6 오름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제주도 특산인 제주조릿대가 빽빽이 자란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다.
7 짙은 녹색의 뺀질뺀질한 잎이 특징적인 굴거리나무와 잎이 연둣빛인 산수국 어린 개체가 함께 자라고 있다. 산수국은 낙엽관목이지만 겨울이 따뜻한 제주에서는 낙엽이 지지 않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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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제주=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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