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다, 코비야” - 존 매더, 조지 스무트
1990년대였다. 영국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며 치켜세운 연구가 있다. 세기는 바뀌었지만 호킹 박사의 ‘예언’대로 그 연구가 올해 노벨물리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처음 9 분간
미국 항공우주국(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의 존 매더(60) 박사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물리학과 조지 스무트(61) 교수는 지난 10월 3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이 두 사람을 우주의 기원을 밝힌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매더 박사와 스무트 교수를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이끈 연구는 ‘코비’(COBE, COsmic Background Explorer) 프로젝트다. 코비는 우주에 가득 찬 마이크로파를 관측하는 인공위성으로 1989년 NASA가 쏘아 올렸다. 이들은 코비로 관측한 결과를 바탕으로 우주배경복사가 플랑크의 흑체복사 스펙트럼을 정확히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우주의 정밀한 온도 분포 지도를 만들어 ‘우주배경복사’의 미세한 온도 변화를 발견함으로써 ‘빅뱅’ 우주론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우주배경복사와 빅뱅 우주론이 뭘까. 현재 대부분의 과학자는 우주가 약 137억년 전 극도로 뜨거운 상태에서 대폭발(빅뱅)과 급팽창을 겪으며 생겨났다고 본다. 이것이 빅뱅 우주론이다. 빅뱅 우주론에 따르면 급팽창이 일어날 당시 우주의 온도는 ${10}^{27}$K(절대온도 K=273.15+섭씨온도°C) 이상이었고, 우주의 나이는 겨우 ${10}^{-32}$초였다. 태초에 이렇게 뜨거운 우주 속에는 빛, 전자, 양성자 같은 수많은 기본입자들이 뒤엉켜 충돌하면서 열적 평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열적 평형상태에서는 빛이 플랑크의 흑체복사 스펙트럼을 따른다. 그래서 흑체복사의 온도만 알면 특정 진동수에서 빛의 세기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우주가 팽창할수록 흑체복사의 온도는 내려가는데, 이는 공기를 단열팽창시킬 때 공기가 차가워지는 원리와 비슷하다.
빅뱅이 일어난지 38만년 뒤 우주의 온도는 약 3000K로 낮아졌고, 운동에너지가 줄어든 원자핵과 전자는 서로 달라붙어 수소, 헬륨 같은 가벼운 원자를 만들었다. 빛과 숱하게 충돌하던 전자가 급격히 사라지자 빛은 물질과 더 이상 부딪치지 않고 우주공간에서 자유롭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빛과 물질의 분리시기라고 하며, 이때 최초로 물질을 빠져나온 빛이 우주배경복사다.
우주배경복사는 흑체복사의 성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아직까지도 우주를 떠돌아다니며 식고 있다. 현재는 온도가 2.73K인 차가운 흑체복사로 존재한다.
매더 박사팀은 코비를 이용해 우주배경복사의 세기를 여러 파장(1~20cm)에서 측정했다. 그 결과 우주배경복사가 2.73K인 흑체복사의 스펙트럼을 정확히 따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매더 박사는 코비가 관측을 시작한 처음 9분 동안의 자료를 바탕으로 얻은 이 스펙트럼을 1990년 1월 미국 천문학회에서 발표했고, 당시 청중들은 환호하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미세한 온도 차이 밝혀내
그런데 우주거대구조나 은하단, 은하, 별 그리고 태양계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갖가지 구조들은 모두 물질이 중력수축하면서 생겨났다. 만약 우주 초기에 물질의 분포가 균일했다면 이들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물질 분포의 요동(fluctuation)이 존재해야 중력수축으로 다양한 우주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과학자들은 우주거대구조가 존재한다는 점과, 빛이 분리되던 시기의 물질 분포에 관한 정보가 우주배경복사에 들어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우주배경복사의 온도가 미세한 변화를 띨 것이라고 예측했다. 즉 우주배경복사의 온도가 우주를 보는 방향에 따라 수십 μK(마이크로켈빈, 1μK=100만분의 1K) 가량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를 우주배경복사 온도의 비등방성(anisotropy)이라고 한다.
스무트 교수팀은 코비 위성으로 우주의 모든 방향에서 오는 우주배경복사 온도의 미세 요동을 측정했다. 그 결과 우주를 지구 모양으로 가정할 때 남극과 북극 쪽에서 온도가 더 낮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온도가 차가운 곳은 빛이 분리되던 당시 물질이 많았던 곳을 뜻하는데, 빛이 깊은 중력포텐셜을 빠져나올 때 에너지를 잃어 다른 곳보다 차갑게 보인다.
결국 스무트 교수는 가설로만 존재하던 우주배경복사 온도의 미세 요동을 발견했고, 이로써 물질 밀도의 차이로 은하와 천체가 생길 수 있다는 가설과 빅뱅 우주론을 뒷받침하는 단서를 찾았다. 1992년 4월 23일 스무트 교수팀은 언론을 통해 처음으로 이 사실을 보고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83년 러시아가 ‘렐릭트-1’(Relikt-1)이라는 장치를 ‘프로그노즈’(Prognoz) 9호에 실어 6개월 동안 우주배경복사 온도 요동을 관측했다는 점이다. 스트루코프(I. A. Strukov)를 포함한 4명의 과학자는 1992년 5월 러시아 천문학회지에 우주배경복사의 미세 온도 요동을 검출했다는 논문을 발표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한편 코비 프로젝트의 베넷 박사는 1993년 논문에서 렐릭트가 검출한 미세 온도 요동 값이 코비의 값과 크게 다르다고 지적했다.
암흑에너지는 아직도 ‘암흑 상태’
코비 위성은 빅뱅 우주론을 지지하는 결과를 냈지만 우리우주의 나이와 팽창속도, 보통 물질과 암흑물질, 암흑에너지의 양에 관한 질문에는 자세히 답할 수 없었다. NASA는 코비의 뒤를 이어 2001년 WMAP(Wilkinson Microwave Anisotropy Probe) 위성을 발사했다. WMAP은 물질 밀도가 균일하지 않아 나타나는 온도편차를 100만분의 1K의 정확도로 식별할 수 있었다.
2006년 WMAP이 3년 동안 측정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우리우주는 나이가 137억년이며, 공간적으로는 평탄하고, 전체 에너지 중 보통 물질이 차지하는 비율은 불과 4%인 반면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이 각각 74%와 22%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우리우주의 팽창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물론 WMAP으로도 아직 다 밝히지 못한 점들이 남아있다. 중력과 반대되는 성질을 갖고 있어 우주를 가속 팽창시킬 것으로 추정되는 암흑에너지나,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하지 않고 오직 중력 상호작용만 하는 암흑물질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왜 위성을 띄울까
우주배경복사를 지상에서 관측할 수는 없을까. 가능하지만 인공위성을 띄우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우주에서 날아오는 마이크로파는 파장이 수cm로 지구 대기권에 있는 분자에 흡수돼 정확히 관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코비 위성이 발사되기 전인 1980년대 후반에는 소형 로켓을 발사해 대기권 밖에서 우주배경복사의 비등방성을 측정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RNA ‘전사’ 규명한 생화학 전사 - 로저 콘버그
“이제 우리가 유전자 발현과정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2000년 4월 27일자 사이언스지에는 DNA에 들어있는 유전정보가 RNA로 복사되는 ‘전사’(transcription) 과정을 증명하는 한 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세포 내에서 전사가 이뤄지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분자인 ‘RNA중합효소II’(RNA polymerase II)(단백질을 합성하려면 DNA 유전정보를 RNA에 실어 전달해야 한다. 이 때 중간 역할을 하는 것이 RNA중합효소다. 고등동물의 세포인 진핵세포에서 작용하는 효소는 RNA중합효소Ⅰ~Ⅳ 4개가 있고, 그중 전사 과정에 관여하는 효소가 RNA중합효소Ⅱ다.)의 정체를 밝혀낸 것이다. 이 효소는 특정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DNA의 영역을 골라서 메신저RNA(mRNA)로 전달한다. 즉 DNA와 RNA의 중매쟁이 역할을 해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논문의 주인공은 바로 올해 스웨덴 왕립과학원이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미국 스탠퍼드대 로저 콘버그(59) 교수다.
중매쟁이 효소의 정체를 밝혀
RNA중합효소II는 12개의 단백질 하부단위로 구성돼 있는 거대한 단백질 복합체다. 이 효소는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큰 단백질 복합체로, 워낙 크고 복잡한 구조를 띠고 있어 3차원 구조를 밝히기 어려웠다. 하지만 로저 콘버그 교수는 방사광 가속기의 X선을 이용해 RNA중합효소II를 10-10m의 정확도로 볼 수 있게 했다. X선 회절을 통해 분자의 3차원 구조를 밝혀내는 ‘X선 결정법’을 사용해 수소를 제외하고도 약 3만개 원소로 이뤄진 각각의 하부단위 단백질 구조를 알아냈다.
로저 콘버그 교수는 수십 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쳐 12개의 단백질 하부단위를 모두 포함한 RNA중합효소 전체 복합체를 순수하게 분리해 정제시키고 결정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 중 가장 큰 하부단위인 Rpb1과 Rpb2는 유전정보가 담긴 DNA 영역을 정확히 인식하고 붙잡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실 RNA중합효소는 스페인의 생화학자인 세베로 오초아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이 공로로 1959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당시 공동 수상자가 스탠퍼드대 아서 콘버그 교수로 바로 올해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로저 콘버그 교수의 아버지다.
RNA중합효소가 발견된지 40년이 넘어서야 마침내 RNA중합효소II의 분자 구조를 볼 수 있게 됐으며, 이를 통해 로저 콘버그 교수는 어떻게 전사과정이 수행되는지 실제 과정을 분자 수준에서 볼 수 있게 했다.
전사과정 이론, 센트럴 도그마
원자폭탄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수학자 존 폰노이만은 생명체를 자기 자신을 복제해 번식할 수 있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생각했다. 스스로 복제해 번식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담은 설계도가 있어야 하며 이 설계도를 복사해서 옮길 수 있어야 하고 다시 그대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센트럴 도그마’(Central dogma)라고 부르는 이 이론은 설계도인 DNA가 정보를 담고, 정보를 옮기는 역할을 하는 RNA를 통해 생명체 구조인 단백질을 합성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폰노이만이 생각한 센트럴 도그마는 그가 죽고 난 뒤에야 밝혀졌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프랜시스 크릭은 모든 생물의 유전정보는 DNA에 저장돼 있으며, 그 유전정보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먼저 RNA(특히 mRNA)로 바꿔야 하고, RNA는 다시 유전정보를 담을 단백질로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모든 유전자는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센트럴 도그마의 과정을 꼭 거쳐야 하는데, 첫 번째 단계이며 가장 중요한 조절단계가 바로 ‘전사’라고 부르는 RNA 합성과정이다.
유전자 발현 연구, 뉴클레오솜도 발견
로저 콘버그 교수는 RNA중합효소II를 통해 전사과정을 규명한 연구 이외에도 평생 동안 유전자 발현 연구에 몸바쳐 중요한 발견을 해왔다. 프랜시스 크릭 박사 연구실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활동하던 1970년대에는 진핵세포의 핵에서 염색체DNA가 감겨 있는 기본 단백질 구조체인 ‘뉴클레오솜’(nucleosome)을 발견했다. 이는 원핵세포와 진핵세포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히스톤단백질에 DNA가 감겨있는 뉴클레오솜의 모습은 이제 전세계 거의 모든 생물학 교과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로저 콘버그 교수는 스탠퍼드대에서 전사과정을 계속 연구했으며, 단세포 진핵생물인 효모를 사용해 전사과정장치를 구성하는 모든 단백질 구성체를 분리하고 정제했다. 그리고 다시 시험관 안에서 생체와 같은 기능을 가지는 전사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성공했다.
줄기세포로 이어지는 연구 성과
전사과정을 밝혀낸 로저 콘버그 교수의 업적은 센트럴 도그마 과정을 증명해낸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이 전사과정은 암, 심장병 및 다양한 염증관련 질병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고, 줄기세포를 사용한 치료 연구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줄기세포가 원하는 세포로 분화되려면 이에 관여하는 특정 단백질이 발현돼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단계가 전사과정이며, 이 전사과정을 명확히 조절하지 못하면 생각지 않은 다른 세포로 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저 콘버그 교수는 그 밖에도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핵심 분자를 발견해 그 역할을 밝히고 있다. ‘메디에이터’(mediator)라고 부르는 이 분자는 연세대 김영준 교수가 연구실의 박사후 연구원 시절에 로저 콘버그 교수와 함께 밝혀냈다.
인간이 가지는 약 3만개의 유전자들은 각각 서로 다른 전사효소들의 조절을 받아 발현되는데, 메디에이터가 여러 유전자 발현신호를 종합해 전사과정을 수행할 것인지 결정한다.
RNA중합효소II가 DNA가 가진 정보를 RNA로 중개해 주는 역할을 한다면 메디에이터는 RNA중합효소II를 조종하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마치 컴퓨터 CPU에 해당하는 존재가 바로 메디에이터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영광을 되물림
로저 콘버그 교수가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은 그의 아버지에게 47년전 기억을 더듬게 했다. 로저 콘버그 교수의 아버지는 1959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아서 콘버그 교수기 때문이다. 그 역시 스탠퍼드대 교수로 박테리아에서 DNA를 합성하는 효소를 발견해 DNA 복제과정을 밝힌 업적으로 수상했다. 아버지는 유전학의 시초를 확립하고 아들은 한 단계 발전시켜 성장날개를 단 셈이다.
부전자전은 계속될까. 유전학자로저 콘버그의 아들인 가이 콘버그 역시 스탠퍼드대에 재학 중이다. 할아버지는 스탠퍼드대의 명예교수로 아버지는 교수로, 아들은 학생으로 이른바 스탠퍼드대의 명예를 건 3대의 행진이 주목된다.
로저 콘버그 교수는 환갑을 바라보는 59세의 나이에도 연구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 못지않다. 연구원들과 미팅을 할 때 실험실 전체 상황을 항상 빠르게 파악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토론한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연구원들이 가져온 결과물을 보고 “It’s a dynamite!”(정말 놀라운 발견이다!)라고 소리치는 콘버그 교수는 실험실 모든 연구원들의 동료이며 동시에 지도자다.
노벨상 유전자가 존재할까?
콘버그 부자처럼 부자가 노벨상을 수상한 기록이 또 있을까? 놀랍게도 이번이 6번째다. 영광스런 첫 번째 부자는 1906년에 물리학상을 받은 조지프 톰슨과 아들 조지 톰슨(1937년 물리학상)이다. 1915년에는 아버지 윌리엄 헨리 브래그와 아들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가 ‘X선 회절 실험’으로 같은 해에 공동으로 물리학상을 받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양자역학을 대표하는 물리학자 닐스 보어도 부자 노벨상 수상자다. 그는 1922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고, 그의 넷째 아들인 오게 보어는 1975년에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24년에 물리학상을 수상한 칼 시그반의 아들 카이 시그반은 56년이 지난 뒤인 1981년에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부자 수상자가 물리학상에서만 나오던 기록을 깬 사람은 한스 폰 오일러 켈핀으로 효소작용 연구로 1929년에 화학상을 받았고 아들 울프 폰 오일러는 1970년에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부자 말고도 가족이 무더기로 수상한 예도 있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가 1903년에 나란히 노벨물리학상을 받았고 딸 이렌느와 사위인 프레데릭 졸리오 역시 1935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마리 퀴리와 딸 이렌느는 유일한 모녀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노벨상 유전자라도 있는 걸까? 가족 수상 기록을 보면 대부분 같은 분야로 수상했다.
결국 학문적인 되물림과 부부 공동 연구의 힘을 의미할 것이다.
유전자 발현 조절하는 ‘RNA 간섭’ - 크레이그 멜로, 앤드류 파이어
지난 10월 2일 오전 2시(미국 태평양시간)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앤드류 파이어(47) 교수는 새벽 단잠을 깨우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스웨덴에서 걸려온 그 전화는 2006년도 노벨생리의학상 공동수상자로 자신과 매사추세츠의대 크레이그 멜로(46) 교수가 결정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파이어 교수와 멜로 교수는 1998년 ‘RNA 간섭’이란 현상을 처음 규명해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제 겨우 40대 중반을 갓 넘긴 두 교수는 불과 8년 전에 발표했던 연구성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거머쥐었다. 공교롭게도 필자는 9월 초 ‘파이낸셜타임스’ 기자에게 두 사람이 노벨상을 예약해뒀다고 말한 바 있다.
꼬마선충이 온몸 비트는 이유
보통 어떤 학설이 발표되면 15~20년간 여러 연구자들의 검증을 거친 뒤에나 노벨상을 받던 전례로 봤을 때 이번 수상 발표는 파격적이며 의외의 결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노벨위원회가 RNA 간섭 현상의 중요성과 파급 효과를 그만큼 높이 평가한 셈이다.
RNA(리보핵산)는 유전정보의 전달과정(유전자 발현)에서 DNA와 함께 중요한 기능을 하는 또 하나의 유전물질이다. RNA 간섭(RNAi, RNA interference)은 쉽게 말해 RNA가 유전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 간섭해 유전자가 발현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생명체에서 유전정보가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DNA의 유전정보가 RNA로 전사된 뒤 이 유전정보에 담긴 대로 단백질이 합성돼야 한다. 만약 이 과정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생명현상을 유지하는데 필수인 단백질이 제대로 합성되지 않는다. RNA 간섭은 DNA의 유전정보를 단백질 합성정보로 전달할 때 이 과정에 관여하는 전령RNA(mRNA)를 방해하거나 파괴해 유전정보의 발현을 막는 현상이다.
파이어 교수와 멜로 교수는 흙에 사는 하등생명체인 꼬마선충에서 RNA 간섭 메커니즘을 밝혀냈다. 두 사람은 한 가닥의 RNA를 서로 결합시킨 두 가닥의 RNA(dsRNA)를 꼬마선충의 세포 안에 넣었다. 그런데 그 꼬마선충에게서 태어난 자손이 온몸을 비트는 기이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닌가. 꼬마선충의 근섬유 단백질 정보를 담고 있는 mRNA가 파괴돼 관련 유전자가 발현되지 못했고 꼬마선충의 자손에게서는 근섬유 단백질 양이 감소했던 것이다.
이 결과가 발표된 뒤 다른 연구자들이 세포 내에서 RNA 간섭에 관여하는 단백질(다이서, RISC)을 밝혀내면서 RNA 간섭 현상의 메커니즘이 분자수준에서 규명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하등생명체가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때 방어하는 메커니즘, 유전체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이 그 정체를 드러냈다. 더 나아가 고등생명체가 생명현상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유전자 발현을 RNA가 정밀하게 조절하는 메커니즘도 밝혀졌다.
예를 들면 3만여개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인간은 분화발생단계에 따라 필요한 일부 유전자만 엄격한 통제 아래 발현되고 다수의 유전자는 발현이 억제돼야 한다. 인간의 유전자 중 1만2000여개는 마이크로RNA(miRNA)가 관여하는 RNA 간섭에 의해 제어된다고 예측하고 있다.
유전자 기능 규명, 3 년에서 수개월로 단축
현재 생명과학자들은 RNA 간섭 기술에 열광하고 있다. RNA 간섭 기술을 활용해 유전자의 기능을 쉽게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게놈프로젝트를 통해 질병 관련 유전자, 신약개발 관련 유전자, 그리고 발생과 분화, 노화 같은 생명현상에 관련된 유전자처럼 많은 유전자가 밝혀졌다. 이전에는 이렇게 쏟아져 나오는 유전자의 기능과 응용가능성을 쉽고 빠르게 규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불과 2~3년 전만 하더라도 유전자 하나의 기능을 알기 위해 1~3년이라는 긴 시간과 엄청난 연구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RNA 간섭 기술로는 수개월 내에 유전자 기능을 규명할 수 있다.
그동안 신약개발 후보물질을 찾는데 쓸 수 있는 타깃 유전자를 발굴하기 위해 유전자 하나하나의 기능을 잃게 만든 세포나 생명체의 집합체(유전자결핍 라이브러리, knock-out library)를 사용했다. 즉 유전자결핍 라이브러리에서 질병의 특징과 관련된 유전자를 규명했다. 문제는 이 기술을 효모나 초파리 같은 하등생명체에만 적용할 수 있어 여기서 발굴된 유전자의 기능이 인체에 적용되는 확률이 높지 않은 점이었다.
하지만 RNA 간섭 기술로는 인간을 비롯한 포유동물 세포의 유전자결핍 라이브러리를 구축할 수 있다. 덕분에 인간의 질병에 직접 관여하는 유전자를 쉽게 규명할 수 있고, 발굴된 유전자 중에서도 그 기능을 제어했을 때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타깃 유전자를 선별할 수 있다. 그래서 RNA 간섭은 생명현상 규명뿐 아니라 신약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출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엔 RNA 간섭을 인위적으로 일으켜 질병을 치료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DNA 칩을 이용해 암세포에서 많이 나타나는 유전자를 확보하고 그 유전자를 타깃으로 RNA 간섭을 일으키는 ‘작은 조각의 dsRNA’(siRNA, small interfering RNA)를 암세포에 주입하거나 암세포에서 생산하게 만든다. 이때 암세포의 특징이 일부 사라진다면 그 유전자의 기능 중 일부가 암세포의 발생이나 유지에 관여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지난해 9월 7일 미국 생명공학기업인 ‘시르나’(Sirna)는 생명공학계를 한바탕 떠들썩하게 했다. 미국 식약청(FDA)에 퇴행성 각막질환(황반변성) 치료용 신약의 임상시험 허가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신약을 상용화하면 임상시험은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인데, 왜 시르나의 신약이 화제가 됐을까. 알약이나 가루약이 아니라 RNA 간섭을 일으키는 siRNA를 이용한 신약이었기 때문이다.
RNA 신약, 새 유전자치료의 가능성
지난 8월 시르나는 임상시험이 일부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황반변성을 일으키는 단백질의 기능을 억제하는 ‘Sirna-027’을 환자 26명의 눈에 넣은 결과 8주 뒤 환자 5명의 시력이 월등히 향상됐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이 제품이 임상시험에 성공하고 시판허가를 받으면 RNA 자체가 질병을 치료하는 첫번째 신약이 된다.
현재 폐렴을 치료하는 siRNA 신약의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으며, 에이즈 같은 바이러스성 질환, 심혈관질환, 암, 내분비계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수많은 질환은 감염성 병원체나 세포 내 유전자 발현과 관련돼 있다. RNA 간섭을 이용해 유전자 발현을 제어하는 기술은 앞으로 중요한 신약개발 방법이자 새로운 유전자치료 방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2006 이그 노벨상 ig Nobel Prize
딸꾹질 퇴치법은 항문에 손가락 넣기
1분에 최고 30번까지 72시간 동안 계속 딸꾹질을 하다가 응급실에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뇌신경의 일종인 미주신경에 전기자극이 폭주하면 웬만해선 멈추지 않는 ‘폭주 딸꾹질’이 생긴다. 이 정도면 물을 마셔도 소용이 없는데, 어떡해야 할까.
미국 테네시의대 프랜시스 페스미어 박사는 18년 전 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입 벌리기, 혀 잡아빼기, 눈알 누르기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응급의학과 심장병 전문가인 페스미어 박사는 손가락으로 직장을 마사지하는 법(항문에 손가락 넣기)이 급상승한 심장박동을 늦추는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이 방법을 폭주 딸꾹질 환자에게 썼다. 물론 효과 만점이었다. 폭주 딸꾹질을 ‘엽기적으로’ 치료하는 이 방법에 대한 논문 덕분에 페스미어 박사는 올해 ‘이그 노벨상’(의학)을 받았다.
노벨상 발표 시즌에 맞춰 미국 하버드대의 과학잡지 ‘애널스 오브 임프로버블 리서치’(AIR)가 1991년부터 선정해온 ‘이그 노벨상’(ig Nobel Prize)은 올해도 어김없이 ‘엽기발랄한’ 과학연구에 수여됐다. 하루에 1만2000번이나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가 왜 뇌진탕에 걸리지 않을까(조류학),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에 왜 몸서리칠까(음향학), 단체사진을 찍을 때 눈 감는 사람이 없으려면 몇 번을 찍어야 할까(수학)를 밝혀낸 연구결과가 대표적이다.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이반 슈왑 박사팀은 북미산 도가머리딱따구리가 부리로 나무를 쪼는 과정을 연구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딱따구리는 두꺼운 두개골에 뇌가 딱 맞게 자리하고 눈은 순막이라는 ‘제3의 눈꺼풀’이 잡고 있어 나무를 쫄 때 뇌진탕에 걸리거나 눈알이 튀어나오지 않는다.
정원용 삼지창 갈퀴를 슬레이트 석판에 긁는 소리, 금속이나 스티로폼끼리 비비는 소리는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에 못지않게 불쾌감을 일으킨다. 미국 밴더빌트대 랜돌프 블레이크 박사팀은 이같은 실험에서 진동수가 가청영역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소리가 짜증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블레이크 박사는 “칠판을 긁는 소리는 침팬지의 경고음과 비슷하다”며 “인류 조상이 맹수를 만났을 때 외쳤던 고함을 연상시켜 그 소리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 피어스 반스 박사팀은 20명 이하의 단체가 사진을 찍을 때 1명도 눈을 감지 않으려면 몇 번을 찍어야 하는지 계산해냈다. 이들의 계산에 따르면 강한 조명에서는 사람 수를 3으로 나눈 횟수만큼, 약한 조명에선 2로 나눈 횟수만큼 찍어야 한다.
그밖에 청소년만 들을 수 있는 고주파 소리를 발생시켜 불량청소년을 퇴치하는 장비(평화)를 개발하고 쇠똥구리가 쇠똥을 구별하는 법(영양학), 요리하지 않은 스파게티가 부서지는 과정(물리), 치즈 속으로 전달되는 초음파의 속도에 온도가 미치는 영향(화학)을 알아내며 말라리아모기가 냄새나는 발과 벨기에산의 연한 림버거 치즈에 똑같이 끌린다(생물)는 점을 증명한 업적에 올해 이그 노벨상이 돌아갔다.
“과학에서 가장 흥분시키는 어구는 ‘알았다(Eureka)!’가 아니라 ‘그것 참 재밌네!’다”라고 하던 아시모프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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