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역이 왕정 찬성파와 반대파 간의 충돌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19세기 중엽, ‘깨어있던’ 몇몇 귀족들은 미지의 야생을 찾아 속세를 떠났다. 가깝게는 검은 땅 아프리카에서 수천년 간 발길이 끊긴 아마존에 이르기까지. 숨막히는 열사의 사막과 축축한 삼림을 통과하며 죽음과 맞서 싸우면서 그들은 탐험가로, 인류학자로 맹활약했다. 현대 생물학과 지질학도 그런 풍토 속에서 싹 틔우기 시작했다.
유럽 학자들이 사막의 한 가운데서 마주친 거대 동물의 화석뼈를 보며 찻잔을 기울인지 이미 150여년이 흘렀다. 그에 비해 30년 남짓한 한국의 공룡 연구사는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그나마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정도가 흘렀을 뿐이다. 공룡 연구자들은 1972년 경상남도 하동군 수근리에서 공룡의 흔적이 발견된 이래 최근 10년은 한반도 공룡연구의 최고 도약기라고 입을 모은다.
국내 학자끼리 자위적으로 그냥 한번 불려 한 말은 아닌 듯하다. 썩 내키진 않지만 세계적인 공룡연구자들도 최근 한국의 공룡연구를 인정하는 눈치다. 최후의 공룡이 사라진지 6500만년. 한반도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전남대 한국공룡연구센터 허민 교수와 발굴팀을 따라 전라남도 일대의 공룡 화석 발굴 현장을 찾았다.
해안가 전체가 공룡알 밭
한국공룡연구센터 이대길 연구원이 망치와 붓을 이용해 조심스레 흙을 치워나가자 붉은색 퇴적암 속에서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처음 공룡알 화석을 본 순간 흥분이 온 몸을 휘감았습니다.”
1999년 처음 전남 보성군 비봉리 해안을 찾았을 때 그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난감했다고 한다. 발굴지로 지목된 3km 해안이 온통 파도가 깬 바윗덩어리와 자갈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큰 파도라도 치는 날이면 자갈밭에서 공룡알 화석을 찾는 일은 수포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폭 30여m인 바닷가와 높이 10여m인 인근 산자락에서 연구팀은 조각류 공룡알 화석 수백점을 비롯해 공룡 알 둥지 흔적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 공룡이 사멸해가던 중생대 백악기말 이 지역이 말 그대로 공룡의 ‘소굴’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일렬종대로 해안가를 훑고 절벽에 매달리길 그동안 수십 차례. 한여름 내내 뙤약볕 속에서 땀흘리며 얻어낸 큰 수확이었다.
지난해 다시 조사에 나선 발굴팀은 지금까지 발견된 공룡뼈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의 화석을 발굴하는 수확을 올렸다. 뼈 화석의 주인은 중생대 백악기말 살았던 새끼 ‘하드로사우루스’. 연구팀은 백악기 말기 멸망의 길을 걸었던 공룡의 최후를 연구하는데 필요한 또 하나의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됐다. 여기서 두시간여 떨어진 ‘땅끝마을’을 전남 해남 우장리 해변. 해안가를 따라 비스듬히 솟아오른 퇴적암층에는 풍화작용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는 이암층은 약간의 힘만 가해도 결을 따라 잘 부서진다. 1990년대 지질학자들이 관심을 갖기 전까지 한반도 공룡 발자국은 켜켜이 쌓인 퇴적층에서 고이 잠들어 있었다.
석사2년차인 정진우 연구원이 수풀과 비닐로 가려놓은 곳을 가리킨다. 이윽고 지표면에 드러난 가로세로 40~50cm되는 웅덩이들. 대형 조각류 발자국 흔적이다. 발자국은 바닷가를 따라 산책을 한 듯 표면에 드러난 암석 위로 길게 뻗어있다. 정씨는 “전남 해남군 우항리 바닷가엔 이런 발자국만 수백여 개에 달한다”고 말한다. 현재 우항리는 세계에서 익룡 발자국이 가장 조밀하게 보존된 지역으로 손꼽힌다.
공룡 발자국 연구는 경상남도의 한 바닷가에서 시작됐다. 경상남도 고성군 덕명리 바닷가는 넓은 퇴적암반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유명하다. 1982년 겨울방학을 이용해 학생들과 남해안 일대의 지질조사에 나섰던 경북대 양승영 교수는 해안을 따라 나 있는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파도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 작은 웅덩이가 일렬로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분석 결과 이 웅덩이들의 실체는 중생대 백악기 한반도를 주름잡던 공룡의 발자국이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발자국 수만 3000개 정도. 이 지역 역시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 산지로 꼽히고 있다.
발자국 흔적은 당시 공룡의 행동 방식과 생활습관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보통 2족보행의 흔적은 한 줄로 나타나는데 이는 2족보행 공룡이 뒤뚱거리며 걸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특히 20여 마리가 한꺼번에 육지로 걸어 나온 흔적은 당시 공룡이 무리지어 어울렸다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지자연) 이융남 박사는 “공룡교란 흔적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흔적 화석”이라고 설명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알과 발자국을 비롯한 이들 화석이 아무 곳에서나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공룡화석이 발견되고 있는 지역은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 남해안, 시화호 등 한반도 일부분에 집중된다. 주로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 백악기 육상 퇴적층이 존재하는 지역이다. 한반도의 4분의 1에 불과한 넓이지만 일본 공룡 연구의 중심지 후쿠이현보다 20배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공룡연구자들은 “당시 한반도가 공룡이 서식하기에 최고의 환경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왠일인지 공룡뼈 화석이 많이 발견되는 미국과 캐나다, 중국과 반대로 한반도에선 공룡발자국 화석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에 대해 이 박사는 “생활하기 좋은 지역보다 산사태나 건조한 기후처럼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화석이 되기 쉽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공룡 뼈화석 발굴을 결코 포기한 것은 아니다. 전남대 허민 교수는 “파볼 엄두가 나지 않을 뿐 뼈 화석을 찾아낼 가능성은 여전히 상존한다”고 말한다.
중생대 지층이 분포한 부산을 비롯해 충청남도 서산일대와 경상북도 문경, 전라북도 일부 지역도 여전히 발굴 가능성 높은 공룡 연구지로 지목되고 있다. 우항리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에서 불과 20여m 떨어진 암반 위엔 또 다른 크고 작은 발자국들이 이리저리 찍혀있다. 익룡 앞뒤발자국 흔적인 이들 화석은 당시 이 지역이 이들의 낙원이었음을 시사한다. 조금더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물갈퀴가 있는 작은 발자국이 익룡 발자국과 겹쳐있다. 두 개체의 ‘공존’을 상징하는 증거다. 1991년 우연히 현지를 방문한 외국학자에게 발견된 이들 새발자국은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물새 발자국으로 기록됐다.
이처럼 최근 한반도 공룡 연구는 세계 공룡연구사에서 지금까지 풀리지 않던 몇가지 문제에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오리주둥이 공룡이다. 연구자들은 오랫동안 발자국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조각류 공룡뼈를 찾지 못해 그 실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대략 전기백악기에 가장 번성한 이구아노돈의 발자국이었을 것으로 어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2002년 경남 하동군에서 오리주둥이 공룡 이빨이 처음 발견되면서 이들 발자국의 주인이 좀더 진화한 오리주둥이 공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는 백악기말에 가장 번성한 오리주둥이 공룡이 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허 교수는 “한반도 공룡 연구는 지금까지 베일에 감춰져 왔던 중생대 백악기 전기와 후기 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넣고 있다”고 말한다.
멸종 단계에 접어든 공룡들이 최후의 보루로 찾아온 한반도는 그만큼 공룡 멸종 연구의 중심지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역시도 보성에서 발견된 부화되다만 백악기말 알화석을 통해 공룡 멸종의 미스터리를 풀어나가고 있다.
한반도 공룡의 추적자들
한반도 공룡 연구에 새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모두 숨은 공로자들의 노력 덕분이다.
연구자들 사이에 부산대 김항묵 교수와 경북대 양승영 교수는 비교적 일찍부터 공룡 연구에 뛰어든 대선배로 통한다. 두 교수는 경상누층군에서 발견된 상당수의 공룡뼈와 알, 발자국 화석을 발견해 학계의 관심을 끌어냈다. 두 교수가 초석을 닦았다면 부경대 백인성 교수와 전남대 허민 교수, 서울대 임종덕 교수는 최근 10년간 공룡연구의 르네상스를 이끈 학자들이다. 지자연의 이융남 박사는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공룡 연구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 중 지난 2000년 2월 경남 하동군 금성면 갈사리 앞바다 돌섬에서 대형 초식공룡 한 마리의 뼈를 발견한 백인성 교수는 고환경연구의 권위자다. 올해초 ‘부경사우루스’(천년부경룡)라는 정식 학명을 갖게 된 이 공룡뼈는 한반도 토종 공룡의 존재를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됐다.
임종덕 교수는 “1억 6천만년동안 지구의 지배자였던 공룡은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한 현재의 새로 살아남아 우리 곁에 살아 숨쉬고 있다”고 주장한다. 임 교수는 지난 2001년 경남 고성군 남해안의 한 무인도에서 길이 30cm, 너비 3cm로 완벽한 형태를 갖춘 익룡의 뼈화석을 발견했다고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이융남 박사는 중생대 공룡을 비롯한 파충류와 신생대 포유류 화석 연구를 통해 최근까지 큰 진전이 없던 한국의 척추고생물학 분야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가 지난 2002년 경남 하동군에서 발견한 악어화석 세계 고생물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속(屬)과 종(種)의 악어인 것으로 밝혀냈다. 일명 ‘하동수쿠스 아세르덴티스’. 이 박사는 또 시화호 주변에서 발견된 거대 공룡알 화석지를 연구중이다.
한편 북한에서도 중생대 고생물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평안북도와 황해남도 지역은 대표적인 중생대 지층군으로 분류된다. 1990년대 중반 후기 쥐라기 내지 전기 백악기에 해당하는 시조새 화석이 신의주 인근에서 발견돼 ‘창시새’라 명명되기도 했다. 국내 학계는 대체적으로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지난 1998년 황해남도 평산군 산성리 지역에서는 두발로 걷는 수각류 발자국 화석이 발견돼 북한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원더풀 코리아노사우루스
세계의 공룡 권위자들이 과학동아에 코리아노사우루스에 대한 평가를 전해왔다.
“한반도는 공룡 뼈화석과 발자국 화석을 동시에 연구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미국 캔자스대 생태진화생물학과 래리 마틴 교수
“한반도 남해안은 공룡의 군집생활과 번식을 연구하는데 최적의 요지다.”
-미국 남부감리대학 루이스 제이콥 교수(前 세계척추고생물학회장)
“조만간 한반도에서 세계 공룡사를 뒤흔들 화석이 발견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중국 국립척추고동물-고인류과학원 조중허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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