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미국국립식물원의 베리 잉거 박사가 이끄는 한 무리의 식물학자들이 조용히 한국을 찾았다. 추위에 강한 식물종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흑산도, 홍도 등 주로 섬을 돌아다니며 동백나무, 단풍나무 등의 종자를 채취해갔는데, 그 중 홍도비비추로 불리는 옥잠화도 있었다. 이후 옥잠화는 한국산이라는 사실이 철저히 가려진 채 잉거 박사의 이름을 딴 ‘잉거비비추’라는 낯선 미국산 식물로 둔갑했다.
식물 사냥 극성
미국, 일본 그리고 네덜란드 같은 나라가 한국에 자생하고 있는 식물을 반출해 간 것은 오래전부터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토종 식물이 외국으로 빠져나가 새로운 품종으로 개발되거나 다른 산업적 용도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식물병에 저항성이 강한 참나리의 유전형질이 유럽의 백합 개량에 사용됐고, 북한산의 털개회나무는 ‘미스킴 라일락’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돼 역수입기막힌 사례도 있다. 또 토속식물인 복주머니난, 섬말나리, 변산바람꽃이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일본에서는 대규모로 팔리고 있다. 8월에 황색꽃을 피우는 한국 특산종인 나도승마는 국내에서 희귀하지만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식물원이 보유하고 있는 흔한 종이다.
이처럼 외국의 ‘식물 사냥꾼’들이 우리나라를 예의주시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식물다양성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기후와 지리적 위치가 남쪽의 열대지방과 북쪽의 한대지방이 만나는 교차점에 있는 전형적인 온대지역이기 때문에 사계절 기온변화가 매우 극심하다. 따라서 서식하는 식물들이 매우 다양하고 특이하다. 특히 4000종 가량의 식물 중 약 10%는 한국에만 자생하는 특산식물인데, 이는 좁은 면적에 비해서는 상당히 많은 수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세계는 새로운 식물자원을 확보하고 그 공급권을 독점하기 위한 ‘종자전쟁’에 혈안이 돼 있다. 미국의 국립보건원(NIH)은 수많은 열대우림의 식물자원을 연구용 시료로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글락소나 브리스톨 같은 수많은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중국, 베트남, 브라질, 코스타리카 등 식물자원이 풍부한 나라로부터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식물 시료를 수집해 언제든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어느 정도를 갖고 있는지는 공개하지 않은 채 새로운 식물자원을 찾아 확보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국내에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 있는 ‘한국식물추출물은행’에서 다양한 식물자원을 확보하고 이를 표준화된 연구용 소재로 만들어 국내의 과학자들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2001년부터 지금까지 1700여 종의 국내 자생식물로부터 2700여 가지의 연구용 재료를 만들어 추출물은행에 보관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자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번진 이유는 뭘까. 조류독감과 같은 새로운 전염병이 생기거나 동맥경화, 당뇨, 천식 등 난치성 질환이 늘어가면서 연구자들이 해결의 실마리를 식물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황금기를 누려온 화학합성에 의한 신약 개발이 점차 한계를 드러내자 식물과 같은 천연물에서 약효가 있는 물질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식물 몸값이 금값
신약은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생명공학기술이다. 식물 1종을 의약자원으로 평가할 때 생기는 연간 가치는 적게는 3억원에서 많게는 15억원까지 매우 높다. 이를 근거로 국내 자생식물의 잠재적 가치를 계산해보면 약 4000종의 식물이 연간 1조2000억원에 달하는 ‘몸값’을 갖고 있다. 하나의 식물이 의약품으로 개발될 때는 약 450만배의 부가가치가 다시 창출된다.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
2010년경 생명공학제품의 세계시장은 약 1000억달러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식물관련제품이 30~40%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식물자원은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품고 있는 광맥과 같은 것이다.
일찍이 식물의 경제적 가치를 깨달은 미국 등은 외국에서 ‘해적질’한 식물에서 많은 신약을 개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의 국립암연구소에서 ‘칼라놀라이드 에이’라는 약물이 에이즈 바이러스의 증식에 중요한 역전사효소를 억제하는 효과를 가지면서도 기존의 에이즈 치료제인 AZT에 저항성을 갖는 바이러스에도 효과가 우수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약물은 말레이시아의 열대 식물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칼라놀라이드 에이는 현재 말레이시아에서 임상시험을 거의 완료했다.
‘후퍼진 에이’는 치매 등 뇌질환에서 기억유지를 방해하는 효소를 저해하는 효과가 있으며, 기존약물인 도네파질이나 타크린보다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역시 중국의 남부지방에서 사용되던 민간약에서 추출한 것으로 현재 미국에서 알츠하이머성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자생식물인 쑥에서 위염 치료제가 개발됐고 큰꽃으아리(위령선), 하눌타리(괄루근), 꿀풀(하고초) 등에서 관절염 치료제가 개발돼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그 외에도 상당수의 천연물신약 후보들이 임상시험 중이거나 신약으로 개발되고 있다.
자원의 보고 페루
우리나라라고 한정된 국내 자원에만 머물 필요가 있을까. 시선을 밖으로 돌려 본다면 세계적으로 25만~30만종의 식물이 있고, 그 중 아마존의 열대우림에만 10만종 정도가 존재한다. 우리도 그 곳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은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로부터 중요한 약용식물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아마존강이 있는 페루와 국제협력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2014년까지 페루 측과 공동으로 ‘유용 식물소재 추출물 연구사업’을 진행하면서 아직 개발되지 않은 수많은 페루의 토종식물을 중심으로 식물추출물은행을 구축하고 난치성 질환 치료제를 개발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8월 필자는 페루의 아마존강 상류 지역을 답사하고 왔다. 페루는 해발 4000m가 넘는 고산지대인 안데스산맥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해양성 기후가 동쪽으로는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있어서 식물자원이 매우 풍부한 나라다.
해발 3000m에 이르는 고산지대에 있는 과거 잉카제국의 수도인 쿠스코와 ‘사라진 도시’ 마추피추를 둘러보고 이키토스로 향했다. 이키토스로 가는 도중에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페루는 쿠스코에 갈 때와는 사뭇 달랐다. 안데스 산맥에는 식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안데스를 벗어나니 녹음이 우거진 열대의 식물상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페루에는 해안지대, 고산지대, 열대우림지대 등 세 가지 기후대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키토스는 아마존강의 상류지역으로 수많은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곳에 있는 페루국립아마존연구소를 방문했는데, 이 연구소는 수많은 아마존의 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것이었다. 필자를 포함한 현지 답사단은 데니스 델 카스티유 또레스 연구소장과 아마존대 부총장, 아마존식물원 약용식물학자 등 20여명의 과학자들과 회의를 하며 페루의 중요한 약용식물에 대해 소개받았다.
화려했던 잉카문명을 지닌 페루에는 전통적으로 병을 치료하거나 건강을 유지하는데 다양한 토종식물들을 활용해 온 사례가 많이 있었다. 해발 3000~4000m 사이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마카’라는 식물은 마치 인삼처럼 각종 질환에 유익한 최고의 민속약으로 꼽히며, ‘우냐데가토’라는 식물은 염증질환에 아주 좋은 약재로 이용되고 있다. ‘상그라데그라도’는 주로 상처치료에 사용돼 왔는데 최근 미국에서는 이 식물에서 에이즈 환자의 설사를 멈추게 하는 치료제가 개발되기도 했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역시 페루의 자연환경이 가져다 준 풍부한 식물자원이었다. 아마존은 예상했던 대로 ‘지구의 식물원’이었다. 식물자원이야말로 아직 개발의 여지가 많고 장차 자국의 희망을 채워줄 큰 자산이 아닌가.
고유종 관리 시스템 필요
지금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은밀히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서 세계 구석구석에 있는 식물자원을 확보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자연사 박물관과 같은 국가적 차원의 생물표본관이 없기 때문에 식물자원 관리가 어려운 상태다. 국제 관례상 생물표본관에 해당 종이 없을 경우 자생종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외국이 우리의 종자를 가져가 자기나라 고유종으로 주장해도 이를 반박할 근거가 전혀 없다.
따라서 한국은 국내의 식물자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한시라도 빨리 갖춰야 한다. 또 이제는 한정된 우리의 자원에 머물지 말고 페루 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식물자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세계는 지금 소리 없는 종자전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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