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문 이야기를 하기 전, 내 소개를 해야겠다. 나는 털. 사람들에게는 친숙하면서도 그다지 입에 담지는 않는 이름이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금기처럼 여긴다. 그래서 직접 이름을 부르는 대신, 머리카락이나 수염, 눈썹이라고 바꿔 부른다. 심지어 사타구니처럼 은밀한 부위에 나면 음모라고 어려운 말로 에둘러서 표현한다.
나를 제대로 털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일 때가 많다. 특히 겨드랑이에 난 털은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마저 있다. 그래서인지 여성의 경우 요즘은 겨드랑이 털을 깎는 문화가 많이 퍼져 있는데, 간혹 깎지 않은 여성에게는 ‘겨털녀’라는 별명이 붙는다. “양심에 털 났다”는 말까지 들으면, 듣는 털 참 화난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당신 몸에 나는, ‘케라틴’이라는 단백질로 이뤄진 지름 약 0.02~0.2mm의 길고 가는 섬유는 모두 털이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이름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달콤한 향기가 난다”라고 노래했다. 미용실에서 화려한 스타일로 멋을 낸 머리카락도, 평생 햇빛 한 번 못 본 채 속옷 속에서 일생을 마치는 음모도 다 우리 털 가문의 소중한 일원이다.
털 난 도마뱀?
이제 우리 털 가문의 구성원을 소개하겠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털은 포유류에만 있다. 털 난 도마뱀이나 개구리, 해삼을 본 사람은 없을 거다. 가끔 미생물에게도 섬모나 편모 같은 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미생물의 세포 내 기관일 뿐이다. 털은 편모나 섬모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크기도 훨씬 크다. 곤충 등 절지동물문이나 지렁이 같은 환형동물문에 속하는 동물에게도 털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지만, 우리 포유류의 털과는 구조와 특징이 다르다(54쪽 참고).
모든 가문이 그렇듯 뼈대 있는(진짜로 심지나 뼈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털은 오히려 가운데 심지 부분이 성근 구조다) 우리 털 가문에도 시조가 있다. 하지만 시조가 언제 어떤 동물에서 태어났는지는 잘 모른다. 포유류가 살기 시작했던 약 2억 2000만 년 전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더 오래 전부터 우리 가문의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조상을 알려면 먼저 털을 구성하는 물질인 케라틴 단백질에 대해 알아야 한다. 케라틴은 하나의 단백질 이름이 아니라 단백질 집합의 이름이다. 크게 알파와 베타 케라틴 두 종류가 있는데, 포유류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알파 케라틴이다. 사람의 경우, 67가지 서로 다른 알파 케라틴 유전자가 있다. 뚜렷한 역할이 없는 13종을 뺀 나머지 54종이 실제로 몸에 이용되는 단백질을 만든다. 37개는 피부 상피세포를 만드는 데 쓰이고, 나머지 17개는 손톱과 발톱, 그리고 혀의 표면을 만드는 데 쓰인다. 이 17개 안에 우리 털을 만드는 케라틴도 포함된다.
조류나 파충류는 구조가 조금 다른 베타 케라틴을 이용한다. 베타 케라틴은 비교적 부드러운 알파 케라틴에 비해 훨씬 딱딱한 조직을 만들 수 있다. 갑옷처럼 딱딱한 악어의 피부나, 새의 부리 표면을 덮고 있는 막, 그리고 파충류의 발톱이 모두 베타 케라틴으로 만들어진다. 그 동안 포유류 이외의 동물에서는 알파 케라틴이 없다고 생각했고, 알파 케라틴이 포함된 털은 포유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해 왔다.
2008년 오스트리아 빈 의대 레오폴트 에크하르트 교수 연구팀은 사람의 유전자 가운데 알파 케라틴 유전자를 찾아 닭(조류)과 녹색애놀도마뱀(파충류)의 유전자와 비교했다. 혹시 알파 케라틴 유전자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놀랍게도 정말 알파 케라틴 유전자가 녹색애놀도마뱀에서 발견됐다. 발견된 유전자의 위치가 발가락과 관련된 곳이어서 발톱을 만드는 데 쓰인다고 추정했다. 포유류와 파충류의 털은 알파 케라틴을 만들 수 있는 공통조상에 유전적 뿌리가 있을 확률이 높아졌다.
이 연구가 사실이라면 우리 털 가문의 조상은 포유류와 파충류의 공통 조상이 살던 약 3억 3000만 년 전부터 3억 1000만 년 전 사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생대 석탄기로, 대략 초기 파충류가 출현한 시기와 비슷하다. 물에서 완전히 벗어나 숲 한가운데에서 주위를 살피고 있는 이 초기 파충류의 자그마한 발톱 속에, 우리 조상이 털로 태어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오래된 포유류 털 화석
비록 3억 3000만 년 전에 우리 시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만,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화석인데, 오래된 털 화석이 발견되기란 좀처럼 힘들다. 2006년 2월,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 하나가 생물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중국 난징대 지구과학과 치앙 지 교수팀이 중생대 쥐라기 지층에서 초기 포유류의 화석을 발견했다. 발에 달린 물갈퀴와 넓적한 꼬리가 고스란히 화석으로 남
아 있었다.
이 동물이 오늘날의 비버처럼 육상과 물 속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생활했다는 뜻이다. 당시 육지는 공룡이 주름잡던 시대다. 초기 포유류들은 대부분 체구가 작고, 흉포한 공룡의 눈을 피해 땅에서 살살 기면서 살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육지뿐 아니라 물 속에서 사는 포유류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밝혀졌다. 당시 포유류 생태계가 오늘날처럼 다양하고 풍성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 시선을 더 사로잡은 특징이 있다. 선명한 털 자국이다. 화석은 털의 모양과 길이, 그리고 뻗은 방향까지 알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았다. 전형적인 포유류의 털이었다. 땅 속에서 드디어 우리 조상을 만나다니 횡재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 동물이 살던 때를 알아보니 약 1억 6400만 년 전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가장 오래된 조상이 눈으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포유류는 왜 우리와 같은 털을 갖게 됐을까.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일 거다. 우리는 추울 때 보온 단열재 역할을 한다. 항온동물인 포유류가 체온을 유지하기에 유리했다. 과거부터 발톱을 만드는 데에만 쓰이던 알파 케라틴이 어쩌다 돌연변이로 삐죽한 털로 변했고, 이 돌연변이를 거친 개체가 점점 더 많이 살아남아 털 달린 포유동물이 됐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 지금은 멸종한 털매머드다. 신석기 시대 빙하기에 유라시아 북부에서 번성했던 털매머드는 온몸이 길이가 1m 이상 되는 뻣뻣한 털과 그 속을 빽빽하게 채운 짧고 가는 털로 덮여 있었다. 같은 매머드에 속하더라도 따뜻한 곳에 사는 종에는 이렇게 털이 많지 않았다.
나는 확실한 증거를 얻고 싶어 화석의 털을 가져다 성분이나 색깔을 분석하고 싶었지만, 소용없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화석은 생명체를 구성하던 물질이 빠진 자리에 광물이 들어가 만들어진 엄연한 돌(광물)이다. 그 안에서 유전자나 단백질을 뽑을 수는 없다. 이런 연구가 가능해진 것은 화석이 아니라 사체 일부가 남아 있는 신생대 후기 이후다. 이 얘기는 잠시 뒤에 하기로 하고, 털의 또다른 역할을 살펴보자. 바로 색과 무늬다.
아름다운 색의 비밀은 복잡계 물리
우리 털은 포유류의 패셔니스타다. 규칙적인 줄무늬가 우아한 얼룩말이나 오묘한 다각형이 수학적인 멋을 내는 기린, 그리고 호쾌하고 아름다운 호랑이와 표범의 무늬는 모두 털 덕분에 가능하다. 특히 호랑이와 표범의 털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책 ‘논어’에도 등장한다.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도 털이 하나도 없다면, 털 뽑은 개나 염소 가죽과 똑같다(안연 편).”
개나 염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호랑이나 표범도 털 뽑으면 볼품이 없어진다는 뜻이다(이 구절은 정확히는 ‘실질적인 내용과 겉멋이 다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아무튼 우리 털의 색이나 무늬를 보면 신기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누가 털 하나하나에 명령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짙은 털은 짙은 털끼리, 옅은 털은 옅은 털끼리 모여서 날까. 흰 털과 검은 털이 어떻게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지어 날까.
유전자 등 생물학적인 이유보다는 복잡계 물리학 덕분일가능성이 높다. 야네르 바르-얌 미국 뉴잉글랜드복잡계연구소 교수는 저서 ‘복잡계 동역학’에서 단순한 물리학 모형을 이용해 털의 무늬를 재현했다. 바르-얌 교수는 격자 안에 검은 점과 흰 점을 배치하면서 점 사이의 상호작용 패턴을 복잡계 물리학의 변수 형태로 지정해 줬다. 그러자 검은 점과 흰 점이 서로 자기들끼리 모였다. 일부러 점들끼리 모이게 하거나 무늬를 만들도록 하지 않았는데도 규칙적인 무늬가 만들어진 것이다. 표범 무늬처럼 점을 찍은 뒤 “각 점 사이의 딱 중간 지점을 제외하고 점을 찍는다”와 같이 조건을 주면 기린의 기하학적인 무늬도 만들 수 있다.
포유류는 왜 털로 무늬를 만들까. 무늬가 동물들 사이에서 사회적 의사소통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포유류는 몸의 거의 모든 부분이 털로 덮여 있다. 따라서 털의 패턴 등 겉 모양을 통해 같은 종인지 구분해야 한다. 또 털로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고양이나 개는 화가 나면 등의 털을 곧추 세운다. 야생에 사는 맹수류는 더 극적이다. 한껏 털을 부풀리고 세워서 적을 위협한다. 사람이 표정이나 몸짓으로 전달하는 감정을 동물은 털로 표현하는 셈이다. 반대로 사람은 이렇게 털로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을 잃었다.
최근에는 새로운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털매머드는 최근에 멸종한 동물인데다 빙하기 때 묻힌 사체가 많다. 2006년 사체에 있는 조직 일부를 꺼내 유전자 분석을 해 본 결과 뼈에서 Mc1r이라는 유전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유전자는 털에서 붉은 빛이 돌게 하는데, 우성일 때와 열성일 때 조금씩 다른 색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털매머드가 밝은 금발에서 오렌지색과 짙은 갈색까지 다양한 색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데 보통 동물이 다양한 색을 지니는 이유는 보호색을 위해서다. 눈으로 덮이거나 툰드라 초원이 된 빙하기 때 왜 털매머드는 반대로 눈에 확 띄는 색을 한 걸까.
화려한 깃털은 짝짓기용?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문인 새의 깃털은 파충류인 공룡에서 나왔다. 새 자체가 오늘날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공룡의 후손이다. 공룡 가운데 깃털을 달고 있던 종만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깃털의 성분은 오늘날 파충류의 피부와 같다. 이 사실은 깃털이 파충류의 피부, 특히 갑옷 같은 비늘에서 진화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넓고 평평하던 비늘이 세밀한 구조로 갈라지면서 깃털이 됐다. 목적도 처음에는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었다. 포유류의 털처럼 온도를 유지하고 물에 젖지 않도록 몸을 덮는 역할을 했다.
화려한 색은 비교적 초창기 깃털공룡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작년 3월 ‘사이언스’를 통해 공개된 깃털공룡 ‘안키오르니스 훅슬레이아이’의 색상 연구가 그 증거다. 이 깃털공룡은 1억 6000만 년 전 중생대 쥐라기에 살았던 길이 40cm정도의 작은 공룡이다. 보존 상태가 좋은 화석이 발견돼 깃털 안에 들어 있는 색소(멜라노좀)의 모양과 밀도를 정밀 분석할 수 있었다. 멜라노좀이 둥글면 붉은 빛을 띠고 긴 원통형이면 검은색에 가깝다.
복원 결과 이 공룡은 전체적으로 검은색과 회색으로 된 몸이지만 얼굴에 붉은 무늬가 있고 볏도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다리에는 흰 무늬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요즘 새 못지 않게 화려한 모습이다(아래 사진).
그렇다면 왜 보온용 깃털에 이런 색이 있었을까.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짝짓기 용도가 컸을 것이다. 털이 포유류에서 서로의 정체를 드러내고 감정을 표현하는 역할을 했던 것처럼 초기 새와 공룡의 깃털도 사회적인 역할을 했다. 매머드의 화려한 색도 같은 역할을 했을지는 미지수다.
털 없는 원숭이, 세상에 나다
이제 마지막으로 인간과 우리의 관계를 알아볼 차례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사람은 털이 거의 없는 피부를 지닌 유일한 영장류이자 몇 안 되는 육상 포유류다. 고래 같은 바다 포유류와 일부 지하 종을 제외하면 털이 없는 포유류는 아르마딜로나 하마, 코끼리 등 덩치가 큰 종뿐이다.
털이 없는 사람의 피부를 ‘벌거벗은 피부’라는 말로 표현한다. 앞서도 말했듯 일부 부위에는 털이 있다. 머리카락과 사타구니, 겨드랑이, 눈 위가 대표적이고, 피부에도 짧고 듬성듬성하지만 털이 나 있다. 하지만 다른 포유류에 비해 헐벗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왜 우리와 멀어졌을까. 가장 설득력이 높은 주장은 햇빛이 강한 동아프리카에서 진화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여기에 육식을 시작했다는 점도 꼽힌다. 사냥을 하거나 육식동물이 먹고 남은 고기를 주우려면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발빠른 초식동물을 못 따라가거나, 육식동물에게 잡아 먹히기 쉬웠다. 더구나 사람이 진화한 동아프리카는 서아프리카처럼 울창한 밀림이 아니라 키 작은 관목이 자라는 초원이었다. 햇빛은 강렬하고 더웠다. 털은 열대 초원지역의 낮에는 불리했다. 느리고 힘이 약한 인간은 다른 강한 동물이 활동하는 밤을 피해 햇빛이 비치는 낮에 지구력으로 승부해야 했고, 몸의 열을 최대한 빨리 배출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일단 털이 사라졌다.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직사광선을 직접 쬐는 머리 부분만 털을 남겨서 두뇌를 보호했다. 피부는 모낭과 땀샘 등의 구조가 변해 묽은 땀을 쉽게 배출하게 됐다. 체온 조절이 쉬워진 것이다. 자외선을 막기 위해 피부가 검게 변했다. 이런 변화는 작지만 큰 변화였다. 인류는 더운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었고, 지구 전역으로 퍼져 살게 됐다.
이 과정에서 초기 인류가 예측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추운 지방에 취약해졌다는 점이다. 인류는 잃어버린 털을 다시 동물에게서 찾고 있다. 털가죽을 벗겨 몸에 걸치기도 하고, 털이나 깃털만 뽑아서 두툼한 보온용 옷을 만들기도 했다. 털 대신 식물에서 뽑아낸 섬유를 쓰기도 했다. 솔직히 요즘 우리 털은 헷갈린다. 인류는, 우리와 완전히 헤어진 게 아닌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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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동물의 털, 인간의 털
Part 1. 털, 동물은 입고 인간은 벗다
Part 2. 털 벗은 인간, 다시 털을 만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