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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첨단기술 휘날리는 한국영화

스크린 속에 숨겨진 영상기술

 

첨단기술 휘날리는 한국영화


한겨울 어느 벌판. 중공군복 차림의 수많은 병사들이 고지를 향해 달린다. ‘하나, 둘, 셋…, 1백, 2백…’ 그 수를 헤아리려던 관객은 제풀에 지친다. 어림잡아 1만명은 족히 넘어 보인다. 엑스트라의 출연료만 해도 1백억원대의 제작비를 거뜬히 넘길 듯한 기세다. 이어지는 수만명의 피난민 행렬에 또한번 눈을 의심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엑스트라를 과연 어떻게 모았을까. 비밀은 바로 첨단 컴퓨터그래픽(CG)을 이용한 특수효과에 있다. 최단기간에 관객 1천만명을 돌파하며 연일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스펙타클도 첨단 영상기술과 장비를 결합해 만든 결과물이다. 10만명이 나오는 장면을 찍기 위해 동원된 엑스트라는 불과 2백-3백명. 1982년작 영화 ‘간디’의 장례식에 등장한 30만명의 인파가 모두 실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요즘같은 환경 변화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화면의 요술은 사람수를 늘리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앞에 보이는 산을 옮기기도 하고 아예 속시원하게 없애 버리기도 한다. 사람이 쥐나 외계인과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더이상 신선함을 주지 못한다. 너무 식상하기 때문이다.

CG기술과 첨단 영상장비의 발전은 불과 20년 사이 영화 제작 풍토를 확연히 바꿔 놓았다. 전통적인 촬영현장작업에서 CG작업을 포함한 후반작업쪽으로 제작 과정의 비중이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또 컴퓨터가 영화제작에 이용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이 하나로 통합되는 추세다.

CG기술은 상당히 다양하다. 지난해 12월 개봉된 영화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은 개봉 전부터 초미의 관심거리였다. 전편에 비해 20배 커진 대규모 전투 장면 때문이었다. 대규모 전투신을 찍기 위해 피터잭슨 감독과 웨타디지털사는 컴퓨터로 만든 20만개 이상의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물론 모두가 CG로 만든 가상인물들이었다.

이처럼 대규모 군중은 소수의 주인공과 엑스트라만으로도 충분히 만들어진다. 미리 여러 장면을 찍어놓고 나중에 이를 합성하면 수많은 군중이 한 장면 속에 들어있는 듯한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이 부족하면 CG로 만든 가상인물을 등장시키면 그만이다.

화면 속 인물이나 물체를 없애는 기술은 비교적 전통적인 CG기술이다. ‘짠~’하고 갑자기 나왔다가 ‘뿅~’하며 사라지는 장면은 1960-1970년대 공상과학영화에서 흔히 나온다. 영화 ‘태극기…’에서도 내용과 상관없는 불필요한 부분을 지우는데 이 기술이 쓰였다. 촬영장이 도심 가까이 있었던 탓에 아파트와 산이 보였던 것. 제작팀은 1950년대 종로와 평양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배경들을 모두 지웠다.

CG영상과 실영상을 합성하는 기술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시리즈와 ‘쥬라기 공원’에서 성공을 거뒀다. 컴퓨터로 만든 장면과 카메라로 실제 촬영된 영상이 합쳐져 살아있는 외계인과 공룡 모습을 완벽히 재현해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간’ 아미달라 공주와 ‘외계인’ 자쟈 빙크스가 나누는 대화가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도 모두 이 합성기술 덕택이다. 이런 효과는 사람이 마치 옆에 가상캐릭터나 CG가 만든 사물이 있는 것처럼 연기한 장면과 CG 영상을 합성해 만든다.

영화의 특수효과에 물론 컴퓨터 합성 기술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월리스와 그로밋’은 흙으로 빚은 인형을 조금씩 움직이며 찍은 사진들을 연결시켜 하나의 연속된 영상을 만드는 스톱모션 기법을 사용했다.

영화 ‘매트릭스’의 명장면 가운데 하나인 공중 정지 장면도 여러대의 카메라로 동시에 촬영하는 스톱모션 기법을 이용했다.

이밖에도 정교한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는 로봇을 이용한 촬영 방법도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애니메이션과 일렉트로닉스의 합성어인 애니메트로닉스라는 이 기술은 말 그대로 CG와 특수분장을 합쳐놓은 기술이다. 인형 안에 정밀 기계 장치를 넣어 정교한 움직임을 연출하는 것. 공상과학 영화의 고전 ‘킹콩’의 킹콩과 ‘그렘린’의 모과이, 쥬라기 공원의 새끼 티라노사우르스를 만들어낸 것도 이 기술이었다.

그렇다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명장면인 대규모 전투 장면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2백-3백명의 적은 인원이 4백배로 불어난데는 나름의 비결이 있다.

2백명이 10만명으로 불어나다
 

모션컨트롤카메라를 이용해 군중을 만드는 기법^피사체의 좌표값을 기억하는 모션컨트롤카메라를 이용해 일단 근경부터 촬영한다. 엑스트라들의 위치를 다른곳으로 옮겨 옷을 바꿔입게 하고 다른 포즈를 취하도록 지시한 뒤 다시 촬영한다. 이런 방식으로 몇차례 촬영한 필름을 한장면에 합성하면 거리를 걷고 있는 한무리의 군중으로 보이는 것이다.


제작진은 근경과 원경으로 나눠 작업했다. 모션컨트롤카메라를 이용해 화면 가까운 부분부터 화면 중간까지 같은 각도에서 3백명의 엑스트라의 위치를 여러번 바꿔가며 촬영했다. 이렇게 촬영한 필름을 하나로 다시 합성하게 되면 화면 아래 부분부터 중간 부분까지 사람들로 차게 된다. 모션컨트롤카메라는 컴퓨터와 연결돼 각각의 피사체 위치를 공간좌표로 기억하기 때문에 나중에 피사체 위치가 바뀌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원경에서 뛰어다니는 병사들은 모두 가상 캐릭터들이다. 화면 중간부터 위쪽의 원경에는 컴퓨터로 제작한 가상캐릭터들로 채워진 것이다. 가상캐릭터의 움직임은 모션캡처기술로 만든다. 모션캡쳐란 공간속 사람과 사물의 위치와 움직임을 추출하는 기술이다. 배우의 실제 연기를 가상 캐릭터가 따라하게 만든다는 개념이다. 그중 광학식 모션캡쳐는 피사체 각 관절에 부착된 마커가 반사한 빛을 읽어 입체 제작에 필요한 3차원 좌표로 바꿔주는 첨단캡쳐기술로 통한다. 카메라가 읽은 반사광이 공간좌표값으로 바뀌면서 가상캐릭터의 움직임에 생동감을 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에 등장하는 수만-수십만 군중은 바로 이런 기법을 활용해 만든 것이다. 중공군 침입 장면 외에도 피난민 행렬, 피난 열차에 오르려는 군중 장면도 모두 이렇게 제작됐다.

첨단 영상기술은 사람수 외에도 값비싼 장비수도 무한정 늘릴 수 있다. 대규모 전투 장면에 등장하는 수십대의 야포 사격 장면이 바로 그런 경우다. 대당 수천만원하는 대포를 수십대 제작할 수는 없는 일. 일단 대포 1문만 만든뒤 각기 다른 위치에서 촬영한뒤 한 장면에 겹치면 대포수를 쉽게 늘릴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옷을 바꿔입고 촬영한다면 그만큼 현실감은 더해진다. 헝그리 정신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만든 셈이다.
 

정밀제어기술과 광학기술이 결합한 모션컨트롤카메라.


특수효과 불모지 오명을 벗다

한국 영화에서 특수효과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4년작 ‘구미호’부터. 물체 모양이 서서히 변해가는 모핑기법을 이용해 고소영이 구미호로 변신한 모습을 그렸다. 물론 기술 수준은 사람으로 따지면 걸음마를 시작한 정도였다. 하지만 국내 특수효과는 ‘은행나무침대’ ‘퇴마록’ ‘성냥팔이소녀의 재림’ ‘화산고’ ‘장화홍련’ 등을 거치며 화려한 변신을 시도한다.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일부러 ‘튀게’만든 일부 작품을 빼면 실제인지 컴퓨터 합성인지 분간하기도 이제는 어려울 정도.

최근 특수효과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첨단 영상 장비와 기술에서 비롯된다. 몇몇 나라들의 전유물이었던 첨단 영상기술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활발히 개발되면서 그 발전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영상 관련 기술을 집중 개발하고 있는 곳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단 한곳뿐. 연구팀은 또 영화제작을 실질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제작시설을 운용하고 있다. 분당의 게임기술지원센터의 경우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한 골룸을 만들어낸 모션캡처장비와 ‘태극기 휘날리며’ 군중 장면을 찍은 모션컨트롤카메라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연구팀이 연구하고 있는 분야는 ‘실사기반 컴퓨터그래픽’ 관련 기술이다. 실사기반 컴퓨터그래픽이란 실제 촬영된 영상과 컴퓨터그래픽을 합성해 현실감 넘치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첨단 연구분야다.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가상캐릭터를 영화에 등장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라고 설명한다.

가상캐릭터를 만드는 것 말고도 실물과 디지털 캐릭터 사이에 상호작용을 연구하기도 한다. 실사와 그래픽화면을 합성했을 때 화면 속 캐릭터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는 연구다. 영화 스타워즈에는 디지털 캐릭터가 실제 등장인물을 꽉 껴안은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사람이 정말 껴안거나 싸우는 것처럼 자연스레 보이게 하는 것도 상당한 수학적 계산과 프로그래밍 실력이 따라야 한다.

연구원은 최근 한 보고서를 통해 기존의 단순 애니메이션 기법보다 한차원 높은 가상연기자를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스스로 알아서 주위 환경을 인식해 자연스런 움직임을 만드는 가상캐릭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연구원 부설 게임기술지원팀 양광호 팀장은 “사람의 동작을 추적해 영상을 얻는 기술 등 일부 분야는 이미 세계 어느 연구실보다 앞서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첨단 기술이 꾸준히 국내에서 각광 받고는 있지만 특수효과의 지나친 사용이 오히려 영화의 예술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스토리를 무시하고 자칫 특수효과 등 비주얼에만 신경쓴다면 결국 관객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수효과의 덕을 본 스타워즈나 스타트랙, 이번 태극기 휘날리며도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자가 받는 영화상
 

피터 젝슨 감독이 제작한 영화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중 한장면. 화려한 특수효과로 올해 미국 영화 예술 및 과학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우리시간으로 지난 3월 1일 오전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닥 극장에서 열린 제76회 미국 영화 예술 및 과학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예상대로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의 독무대였다. 작품상과 감독상 등 후보에 오른 11개 부문 중 한 부문도 놓치지 않고 모두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 것. 그런데 보름 전 또다른 아카데미 시상식이 거행됐다. 바로 아카데미 과학기술상이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화의 발전과 관련된 과학기술자들에게는 큰 잔치다.

아카데미 과학기술상은 1931년 제4회 아카데미상 시상 때부터 거행해 왔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됐다. 과학기술상 수상자 선정을 위해 아카데미는 매년 40여명의 전문가로 과학기술상 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위원회는 영화에 쓰인 영화촬영술, 디지털 이미지, 전자기술과 필름, 조명장치, 음향효과에 대해 면밀히 조사해 후보를 내놓는다. 최종적으로 아카데미 운영국이 투표로 선정한다. 평가요소는 그 기술이 얼마나 참신하고 효율적이며 경제적이냐는 것이다.

올해 오스카 트로피(사진)를 수상한 과학기술상 수상자는 컴퓨터를 활용한 영화 오디오 제작 시스템인 ‘프로 툴즈’(Pro Tools)를 개발한 디지디자인(Digidesign)사와, 영화 촬영 카메라에 로봇시스템을 적용하는데 기여를 한 쿠퍼 컨트롤즈(Kuper Controls)사의 빌 톤드로(Bill Tondreau)에게 돌아갔다. 과학기술상 고든 소여상(The Gordon E. Sawyer Award)은 평생을 영화기술에 바친 피터 D. 팍스에게 돌아갔다. 소여상은 오스카 트로피와 함께 수여된다. 그외 21명의 영화기술 관계자들이 과학기술상 명패와 상장을 받았다.
 

오스카 트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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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만드는 영화, 과학자가 만드는 영화
① 첨단기술 휘날리는 한국영화
② 영화의 완성도, 과학자가 책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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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박근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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