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환은 재어놓았습니다. 지금 열두시를 치고 있습니다. 자, 그럼 됐습니다. 로테! 로테! 안녕, 안녕!”
남편이 있는 로테에 대한 연정에 고뇌하던 베르테르는 결국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25세의 청년 작가 괴테를 하루아침에 문단의 총아로 만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쓰여진 동기부터 예사롭지 않다.
괴테는 23세 때 약혼자가 있는 샤로테 부프라는 여성을 향한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방황했다. 결국 샤로테를 잊기 위해 도피한 괴테는 몇달 뒤 대학 시절 친구인 카를 빌헬름 예루살렘이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다 괴로움을 못이겨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충격에 휩싸인 괴테는 자신의 경험과 예루살렘의 죽음을 소재로 집필에 돌입, 단 14주만에 소설을 완성하고 사랑의 고뇌를 극복한다.
괴테처럼 삶의 고비를 맞아 상황을 잘 헤쳐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예루살렘처럼 실의에 빠져 삶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런 개인차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최근 국내에서도 자살이 급증하면서 그 원인과 대책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우울증과 밀접한 관계
자살의 원인을 밝히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명쾌한 해답은 나와 있지 않다. 자살은 인간만의 현상이기 때문에 동물실험이 불가능하고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누가 자살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장기간의 관찰도 어렵다. 결국 자살한 사람의 가족이나 친구를 통해 사인을 찾는 ‘심리학적 부검’이나 뇌를 조사해 내부의 화학적·해부학적 특이 사항을 관찰하는 정도다.
자살한 사람들은 다른 원인으로 죽은 사람들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심리학적 부검 결과 자살한 사람들 대부분이 우울증의 성향이 있었으며 그 중 절반 정도는 증상이 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즉 우울증의 소양이 있는 사람들이 힘겨운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해결책으로 자살을 택한다는 것이다. 실제 우울증 환자의 15% 정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자살한 사람들의 뇌도 차이가 있다. 뇌속에 존재하는 중요 화합물의 농도가 달랐고 일부 조직이 위축되는 등 해부학적으로도 변화가 보인다. 이런 변화는 우울증 환자의 경우와 비슷해 우울증이 자살과 밀접히 관계돼 있음을 암시한다.
자살자나 우울증 환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뇌속의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serotonin)의 활동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신경전달물질은 뉴런과 뉴런 사이의 접합 부분인 시냅스를 옮겨다니면서 뇌세포 사이의 신호를 전달한다. 세로토닌은 뉴런 사이의 대화가 안정적으로 이뤄지는데 중요한 분자로 뇌간에 있는 등쪽 솔기핵(dorsal raphe nucleus)에서 주로 분비된다.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감정이 불안정해져 근심걱정이 많아지고 충동적인 성향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살자나 우울증 환자의 뇌속에는 세로토닌이 부족하다. 세로토닌은 남성보다는 여성에서 수치가 높지만 여성은 세로토닌의 농도가 조금만 변해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여성에서 우울증이 더 많이 생기는 것도 이런 민감성 때문이다. 실제 자살시도도 여자가 더 많다. 다만 자살성공율은 남자가 더 높은데, 이는 공격성과 관련된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은 남성들이 훨씬 과격한 자살 방법을 택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멜라토닌도 원인물질로 지목
현재 널리 쓰이는 항우울제도 뇌속에서 세로토닌이 좀더 오래 남아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물질들이다. 많은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의 80% 정도는 이런 약물로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조박정신과 조성준 원장은 “우울증은 약물이 비교적 잘 듣는 질환”이라며 “반면 심리치료 등 다른 방법은 약물치료 정도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임상 경험은 우울증이 마음의 문제라기보다는 뇌의 이상으로 인한 증상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뇌속의 송과선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 역시 자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우리 몸의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물질로 알려진 멜라토닌은 수면 외에도 배고픔, 성욕 등 각종 생리적 기능에 관여하는 분자다.
지난 1988년 미국 컬럼비아대 마이클 스탠리 박사는 멜라토닌과 자살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스탠리 박사는 자살로 사망한 사람 19명과 다른 원인으로 죽은 19명의 송과선에서 멜라토닌 수치를 측정했다. 그 결과 자살로 죽은 사람들의 멜라토닌 수치가 훨씬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멜라토닌 분비가 왕성한 밤에 사망한 경우 차이가 두드러졌다(그림 1).
이 결과는 우울증 증상과도 일치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불면증은 멜라토닌 수치가 낮을 때 생긴다. 실제로 일부 우울증 환자들의 경우 멜라토닌 수치가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
멜라토닌이 75mg 함유된 경구 피임약을 복용한 여성들이 성격이 밝아졌다는 임상 연구도 있다. 유럽에서 우울증 치료제로 인기가 있는 약초인 세인트 존스 워트(St. John's wort) 속에는 멜라토닌의 생성을 촉진하는 성분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린시절 정신적 충격이 멜라토닌 분비 저하를 유발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스웨덴의 요한 벡-프리이스 박사는 지난 1985년 행한 실험에서 17세 이전에 부모의 사망이나 이혼으로 부모와 헤어진 경험이 있는 우울증 환자의 경우 멜라토닌 수치가 측정되지 않을 정도로 낮음을 확인했다. 벡-프리이스 박사는 사춘기가 끝나기 전 결정적인 시기에 겪은 강한 감정적 경험이 멜라토닌 생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추측한다.
전쟁이나 부모 학대 등 격심한 스트레스를 겪은 아이들의 뇌는 핵심적인 영역의 조직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는다는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즉 어린시절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뇌 구조 자체가 손상을 입어 뇌속의 분비 물질들의 균형이 파괴된다는 것이다. 조기교육 열풍으로 어릴 때부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우울증과 자살이 급증하고 있는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해부학적 구조도 변화
뇌의 구조, 즉 해부학적 변화는 자살자나 우울증 환자의 뇌에서도 관찰된다. 미국 워싱턴대 이베트 셀린 교수팀은 만성 우울증 환자의 해마 부피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10% 정도 더 작다고 ‘미국정신의학저널’ 올 8월호에 발표했다. 해마는 뇌에서 기억과 학습에 관여하는 부분으로 최근 연구 결과 기분에도 연관된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증 환자 중에서는 약물 치료를 받지 않는 사람들의 해마가 더 작았다. 연구자들은 외부 스트레스가 해마의 신경세포 발달을 억제해 우울증을 일으킨다고 추측했다.
컬럼비아대 신경생물학과 르네 헨 교수팀은 항우울제가 해마에서 새로운 신경세포가 자라게 한다는 사실을발견해 과학전문지 ‘사이언스’ 8월 8일자에 발표했다. 신경세포의 성장과 우울증의 연관성을 보여준 최초의 결과다. 연구자들은 우리를 어둡게 한 뒤 먹이를 둔 가운데만 빛을 비췄다. 우리속의 쥐 가운데 중 소심한 녀석들은 먹이에게 다가가는데 더 망설인다. 이 녀석들을 골라내 반으로 나눠 한쪽은 항우울제를 투여하고 나머지는 물만 먹였다.
4주 뒤 관찰한 결과 항우울제를 복용한 쥐들은 먹이에 다가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35% 정도 줄었다. 그만큼 활발해진 것이다. 반면 대조군은 변화가 없었다. 명랑해진 쥐들의 뇌를 조사한 결과 해마에서 새로 생긴 세포수도 대조군에 비해 60%가 더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항우울제 투여로 신경세포가 회복되는데는 4주 정도 시간이 걸린다. 이 사실 역시 항우울제 투여시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고 꾸준히 복용해야 서서히 나타난다는 임상적 사실을 설명해준다. 약을 수일 먹어보고 약효가 없다고 약물치료를 불신해온 우울증 환자들이 유념해야 할 내용이다. 이처럼 자살로 이어지기 쉬운 우울증이 심리적 요인보다 생리적 요인이 큼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병원을 찾지 않는다. 신경정신과를 꺼릴 뿐더러 기분의 문제가 약물로 해결되리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일정량을 꾸준히 장기간 복용하는데도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항우울증제의 부작용도 복용을 꺼리는 이유다. 충동성을 낮추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의욕상실이나 성욕감퇴, 두통같은 증상이 수반되는 약물도 있다. 실제로 세로토닌에 작용하는 항우울제 복용자의 40% 정도가 성생활이 소원해진다. 거세한 동물은 세로토닌 분비가 증가한다는 연구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항우울제가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고 의사들은 강조한다.
저명한 신경학자인 미국 아이오와대 안토니오 다마지오 교수는 최근 출간한 저서 ‘스피노자를 찾아서: 기쁨, 슬픔, 그리고 느끼는 뇌’에서 우울증은 우리 몸의 평형이 깨진 결과가 의식으로 나타난 상태라고 주장한다. 즉 척추나 뇌간, 시상하부 등 뇌의 원초적인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의식의 영역인 대뇌피질의 활동을 좌우한다는 것이다(그림 3).
마약복용자들이 느끼는 극심한 우울증도 이 결과이다. 마약인 ‘엑스터시’ 복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가 이를 잘 보여준다. 엑스터시를 처음 복용하면 은근한 쾌감이 느껴지는 고양상태(highs)가 오지만 반복할수록 고양상태에 머무르는 시간은 짧아지고 심한 우울감이 찾아온다. 엑스터시가 세로토닌의 작동 시스템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다마지오 교수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슬픔에 고뇌하는 사람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경향을 상실한 상태”라고 말했다. 심각한 우울증을 앓거나 그 종착지인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이것이라는 설명이다.
자살, 유전과 환경의 복합 영향
62세에 라이플로 자살한 헤밍웨이. 헤밍웨이의 가족 내력을 보면 4대에 걸쳐 5명이 자살로 생을 마쳤다.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한쪽이 자살할 경우 나머지 한쪽이 자살할 확률이 13%나 되는 반면 이란성의 경우 0.7%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과연 자살이나 우울 성향도 유전과 관련이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유전자가 관여할까.
영국 킹스 칼리지 아브샬롬 카스피 박사팀은 우울 성향에 유전자가 관여한다는 연구 결과를 ‘사이언스’ 7월 18일자에 발표했다. 세로토닌의 전달에 관여하는 물질인 5-HTT의 유전자가 그 주인공이다. 5-HTT 유전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긴 형질(l)과 짧은 형질(s)이 그것이다.
동물실험 결과 l형질 유전자만(l/l) 있는 동물은 외부에서 주어진 스트레스에 더 잘 적응한다. 반면 s형질을 하나(s/l) 또는 2개(s/s) 갖고 있는 생쥐는 소음같은 스트레스에 공포 반응을 보였다. 역시 s형질만 2개 갖고 있는 원숭이를 스트레스가 많은 환경에서 키우자 세로토닌 전달 체계가 손상을 입었다.
연구자들은 이 결과가 사람에게도 적용되는지 알아보기로 하고 뉴질랜드의 젊은이 8백47명을 대상으로 정했다. 이들은 3살 때부터 20년째 장기적으로 역학 조사를 받고 있는 집단이다. 설문조사 결과 이중 17%가 지난 1년간 우울증을 경험한 적이 있고 3%는 자살을 생각했거나 시도했다. 유전자조사 결과 s형질만 갖고 있는 사람(s/s)이 17%, s형질과 l형질을 하나씩 갖고 있는 사람(s/l)이 52%, l형질만 갖고 있는 사람(l/l)이 31%였다.
설문조사와 유전자조사를 비교해 분석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지난 1년 동안 심각한 스트레스가 없었거나 한두번뿐인 경우 세 집단 사이에 우울증에 빠지거나 자살을 생각하는 경향에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심각한 스트레스가 4차례 이상인 경우는 큰 차이가 났다(그림 2).
s/s인 사람들에게서 위의 두 경향이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반면 l/l 집단은 별 변화가 없었고 s/l은 그 중간 정도의 경향을 보였다. 심각한 스트레스가 빈번할 경우 s/s인 사람들은 l/l인 사람들에 비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2배 이상, 자살을 생각하거나 실행할 확률은 3배 이상 더 높았다.
이 결과는 자살이나 우울증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외부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능력과 관련됨을 암시한다. 우울증 성향, 즉 s형질만 갖고 있는 사람도 평탄한 삶을 산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다만 과도한 스트레스에 접하게 되면 취약함을 보인다. 최근 10년 사이에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2배 이상 오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